트위터, 그 140자의 평등주의. 이택광, 박권일, 김민하, 최태섭, 김남훈 . p119
트위터라는 히스테리 기계
트위터라는 인터넷 네트워킹의 방식은 ‘타자를 향해 수다 떨기’라는 주체화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히스테리적 주체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의 행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확인 행위가 곧 즐거움의 원천이고, 공동체의 ‘교환’을 인준하는 쾌락원칙의 발현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끊임없이 붕괴시키는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기 위한 방식이 트위터라고 볼 수 있다. 트위터는 이 관계의 대체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고 있는 중요한 변화의 일부분이라고 하겠다.
거울은 우리를 비추는 것이라기보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따라서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시를 다듬거나 화장을 고치는 것은 ‘나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기보다, 나를 바라보아줄 ‘다른 이의 욕망’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트위터도 거울의 원리를 가감 없이 따른다. 다시 한 번 되물어보자. 우리는 트위터에 왜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는가? 사연의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아 파라노이아
가장 흔히 보이는 증상은 히스테리성 인격 장애. 다른 말로 흔히 ‘연극성 인격 장애’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치료를 요하는 ‘장애’인 경우는 실제로 드물겠지만,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 유사 히스테리성 인격 장애를 목격하는 경우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전시 욕망, 인정 욕망? 물론 그들의 모든 발화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다.
자기 전시 욕망은 그야말로 자신을 보야주고 대상화시키는 것에 집중된다. 요컨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물신화fetishism, 자기소외다.
인터넷의 발달은 무관심을 끔찍한 지옥으로 만들었다.
소셜미디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음모론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자기 전시 욕망이 히스테리적 증상이라면 음모론은 편집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편집증이란 일종의 ‘체계적인 망상’이다.
트위터는 분석할 시간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매체다. 어떤 사안에 대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돌아다니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이전에, 이미 판결은 내려진다. 140자라는 한계는 분석의 정당성이 아니라 수사의 적절성에 더 신경 쓰게 만든다.
트위터에 보여지는 현실, 즉 타임라인은 사실 자기 자신이 편집한 현실이다.
이제 소셜 미디어의 내면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바로 ‘히스테리아 파라노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