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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물교환 성립.”
“네가 훨씬 손해인데도?”
“‘오래된 것들’의 기본 정신이잖아. 손해를 손으로 느끼지 않는 것. 난 이게 마음에 들어.”
산책을 통해 얻는 또 다른 의미 있는 발견은 인류가 얻은 모든 진리가 결국엔 자연에서 온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어느 오후, 산책을 하던 다윈은 문득 과학과 수학, 철학, 문학, 종교, 예술에서 이루어진 근본적인 성취가 모두 이렇게 하늘과 땅과 나무를 바라보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학자도 화가도 어느 날 이렇게 똑같이 자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바라본 자연을 전혀 다른 기호로 역사에 남겼다. 그 간결한 진리를 체득하고 난 뒤로는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 자연에서 얻은 결과는 해석하는 과정으로 느껴져
“할아버지랑 아버지도 가끔은 이렇게 안아 보세요. 그러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예요. 전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죠? 그릇끼리 부딪치지 않는데 어떻게 서로의 영혼을 느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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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자유란 건 그렇게 공휴일처럼 날을 정해 놓고 누리는 게 아니라, 갑자기 한밤중에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을 때 뛰쳐나갈 수 있는 걸 말하는 거 아니야?”
“넌 정말 한 번도 그런 충동에 휩싸여 본 적이 없어? 취침 종소리가 울린 다음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다거나, 야간열차를 타고 다른 지구로 가고 싶다거나, 갑자기 한밤 중에 누군가를 찾아가서 놀래주고 싶은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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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운 책인 경우에는 “읽지 말고 제목만 봐도 좋단다. 어떤 책들은 제목에 모든 게 담겨 있으니.”하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나 사실 이 서재에서 아버지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너무 애써 공부할 필요는 없어. 아이들은 책을 내려다보기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상상해야지.”였다. 일반적인 1지구 부모들이 보이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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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자 습기를 머금은 미지근한 여름 밤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정원의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자연이 위대한 것은 그것이 뜻을 이루는 데 어떠한 어색함도 띠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온종일 비를 내리다가도 갑자기 해를 띄우고, 그러다 또 깜깜한 밤을 만들어 달을 내보내고 별을 반짝이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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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부모는 어느 훌륭한 종교보다도 낫다. 그러나 훌륭한 종교가 드물듯 훌륭한 부모도 드물다.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그분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었다. 나에게 신을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아무리 약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소중한 한 가지는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셨지. 부모에게는 그게 자식이란다…”
“아버지, 왜 할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잔인하게 말씀하세요?”
“잔인하게 들렸니?”
“네, 아버지의 아버지잖아요. 제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상상이라도 할 수 있으세요?”
“맞아, 이건 성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패야. 확률만을 따진다면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래도 게임을 할 수 있는 패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거야. 존재와 비존재는 단순히 많고 적음의 차이랑은 비교할 수 없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이잖아. 희박하지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가능성이 생길 수 있는 거니까.”
“루미 넌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놀라운 사람이야.”
부모님에게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목적지라니,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그런데 어쩌냐, 여기엔 목적지란 게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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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여긴 왜 아이들이 안 보여요?”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거다. 여기선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 살리는 것도 목적 없는 일이니까. 40년 전에 태어난 나 정도가 거의 마지막 세대지. 그런 나마저 연줄을 잡아서 8지구로 도망가긴 했지만…이런 식으로 우린 멸종되고 있는 거지…”
다윈은 자신과 같은 국적을 가진 현대 인간이 멸종에 이르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9지구의 느낌을 ‘멸종’보다 더 정확하게 전해 줄 단어는 없을 것 같았다.
노인들의 무지가 너무 커서인지, 다윈은 반감보다는 오히려 동정심이 들었다. 폭동을 전쟁으로 잘못 인지한 채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하는 반성 대신 “그 전쟁에서만 이겼으면”하고 한탄하는 한, 그들의 삶을 잘못 든 길을 잘못 든 줄도 모른 채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다윈은 60년이 지나도록 노인들이 진실을 깨달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안타까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이제 와 그들의 믿음을 바꾸려 했다가는 괜한 혼란만을 키울 것 같아 망설임 끝에 입을 다물었다. 폐허가 된 고아원에서 볕을 쬐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혼란보다는 평안일 것이다.
너무 높이 친다면 바깥 세계가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거주자들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신체와 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를 안전하게 보장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지점, 독립적인 사생활의 가치를 보장하면서도 훌륭한 공동체의 일원임을 늘 주지시켜주는 지점, 가장 이상적인 울타리는 바로 그 지점이 될 것이다.
나는 법을 만드는 일과 울타리를 치는 일은 원시적으로 동질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하위 지구의 삶을 들여다보신 적이 있다면 이상적인 울타리가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말씀을 하시지는 못하실 테니까요…그것도 다른 지구의 삶은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 외딴 프라임스쿨에 앉은 눈먼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요. 그렇다면 거기에 ‘이상적인’이라는 문구를 붙여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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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 변화’라는 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공무원들이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얘기다. 내가 다윈 너에게 공부로 조언할 주제는 못 되지만 역사책을 봐 봐. 세계를 바꾼 역사적 사건들은 알고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거 아니야?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기회가 있었고.”
“인류사를 발전시킨 혁명 중에 폭력으로 되지 않은 게 있어?” (촛불혁명!)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이 모든 게 제자리에만 멈춰 있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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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됐어. 친구는 한 명이 모두인 거니까.”
자고로 아이들이란 새와 같아서 그 작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노래가 되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어떤 세상을 바랐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저 막연하지만 강렬하게, 어떻게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루미는 “막연하지만 강렬하게, 어떻게든.” 하고 할아버지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멋진 말이었다.
“자유가 남겠지. 니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해.”
“바로 그게 문제야. 인간은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지. 네가 말한 그 부모 자식 간의 사슬에 얽혀서, 그게 자신들을 결박하는 족쇄란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거라고.”
“다윈,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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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영광과 흠결을 같은 방향에 두는 건 인간의 발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퇴보적인 관점이야.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전 세대의 영광은 이어가고 흠결은 사라진다고 하는 게 문명의 발달에도 부합되는 것 아니겠어?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유래했지만, 그럼에도 모든 인간은 새로운 존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