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의 작게 걷기. p282
자박 자박, 그냥 걷는다. 작게 걷는다. 사진은 찍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리고, 손글씨로 적는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지만, 돗자리와 간식, 스케치북과 연필만은 철처히 준비한다. 소소하지만 오래 기억될 이야기들, 작게 걷기, 같이 걸을까?
- 준비물: 두 다리, 스케치북, 연필과 펜, 눈과 귀
- 가져가지 않는 것: 이어폰, MP3, 카메라
작게 걷기 전에…
- 가져가는 것: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 돗자리를 깔기 가장 좋은 곳을 찾는 안목/ 7000원이 넘는데 맛은 없는 밥에 분노하는 결기
- 가져가지 않는 것: 짧은 시간에 가능한 많은 것을 보려고 하는 마음/ 제대로 보기 전에 일단 사진부터 찍으려는 태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여행하기 위한 투철한 계획
돌아오기 위해.
나는
여행을 했구나.
그 아름답고 고요한, 꿈같은 곳을 떠나
나는 다시 낡고 더럽고 시끄러운
나의 도시로 돌아왔다.
사진 1장을 찍든 100장을 찍든, 별로 차이가 없더라. 내가 거기서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가 중요하지 무엇을 많이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곳에서 내 기분이 좋았고, 충만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곳의 모든 걸 악착같이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어맨 아무것도 몰라여” 나는 그렇게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대학까지 나온 내가 할매보다 더 똑똑라이라 생각했다. 거만하게도.
근데, 아닌 것 같다.
할매는 감자도 깻잎도 양파도 파도 상추도 호박도 배추도 고추도 마늘도 무도 시금치도 다 밭에서 만들어낸다. 나는 나무 이름, 풀 이름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지만 할매는 수많은 나무와 풀과 새, 곤충들을 알고 그것들이 언제 나고 언제 지는지, 어떻게 심고 어떻게 먹는지를 다 안다. 나야말로 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아이일지도, 오디를 빛의 속도로 분류하는 할매가 천재같이 멋있어 보였다.
나는 한참 ‘떠나보내는 그림’을 그리며 바라보았다.
그려놓자. 기억하자. 잊지 말자.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사라지기 전에
없어지기 전에
거기 있을 때에
많은 것을 더 많이 사랑하자.
내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건 참 재미있는 거구나.
우리는 택시를 타고 다시 어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행 다녀온 후였다. 여행에서 찍은 엄청나게 많은 사진들과, 탐나서 챙겨온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돌아와서는 그때처럼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신기하지 않았다. 점점 의미는 퇴색했고 수천 장의 사진 중 내가 기억하는 건 그리 많이 않았다.
그 후부터는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을 보며 그리는 것보다 여행지에서 그리는 것이 훨씬 생동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한 장소에 오래 있게 되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물도 훨씬 오래 바라보아야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많이 보고, 많이 다닌다고 꼭 좋은 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 ‘내가 선택한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이 있을텐데…’라는 미련을 버리고 내가 선택한 것에 집중하고 만족하는 것. 그걸 하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1인용 계곡? 이름난 계곡에 가지 않아도, 경치가 좋은 산에 가지 않아도, 캠핑을 하지 않아도 그저 삼청동 공원 초입에 있는 개울에 발만 담궈도 왠지 여름 피서는 다 즐긴듯이 만족스러운 기분이 된다. 그러고보면 나는 사람이 없고 조용하고 자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만족스러운가보다. 사람 많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곳보다 말이다.
사진 한장이면 1초에 끝났을 것을
손으로 호호 불어가며
30분 동안이나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