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나를 흔들다. 법륜. p254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깨달음입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스스로 ‘그래, 브라만들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스스로 모순을 알아버린 것이지요. 이것을 ‘깨달음’이리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맞고 틀림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의문이 있는 사람이, 의혹이 있는 사람이, 무지가 있는 사람이 확연히 깨달아 버리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어느 것이 옳다든지 혹은 그르다든지 하여 옳고 그름을 판정하기보다는 늘 스스로 알아서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두 번째 특징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들어도 합당합니다. 결코 신비롭거나 비합리적이지 않아요.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불교인이든 비불교인이든 부처님의 법을 들으면 그냥 고개가 끄떡여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번째 특징은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겁니다.
18 전생도, 내생도 바로 ‘지금’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면 삶이 달라집니다.
19 지금 좋고 미래만 좋은 게 아니라 과거까지 좋아지는 거예요. 이것이 법의 미묘함이며 법의 위대함입니다.
불자가 되는 길은 어려운 경전을 독송하고 오래 앉아 명상하고 절을 많이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욕할 때, 짜증낼 때 한 번 방긋이 웃는 데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독파하는 것보다 더한 진수.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와 짜증이 일어나는 겁니다. 마음에 화와 짜증이 일어났을 때도 가급적 빨리 ‘내가 내 생각에 사로잡혔구나. 내가 내 입장을 고집하는구나.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경계에 끄달렸구나’ 이렇게 돌이키게 되면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방긋이 웃을 가능성이 커지지요. 더 나아가 상대의 말에 동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셨어요? 저라도 그랬겠네요.” 이렇게 될 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장애들이 사라집니다.
29 무념의 상태. 도무지 자기가 부지런히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 중생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이는 나와 중생, 나와 세상을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세수할 때 손. “야, 내가 좋은 일 했지? 너, 모르면 큰일 날 줄 알아!”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왜 그럴까요? 자기 몸이기 때문에, 한 몸이기 때문에…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자기 몸과 같이 생각하는 존재가 부처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법이 바로, 이 세상은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하나나하를 보면 별개 갔지만 그 연관된 전체를 보면 하나일 뿐이라는 연기법이죠.
35 자기 자신을 잘 보살펴라. 수행자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며 자기 자신을 잘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틀렸을 때는 틀린 줄 알아차려야 하고,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잘못한 줄 알고 뉘우쳐야 하며, 자신이 모를 때는 모르는 줄 알아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아! 내가 화가 났구나’하고 알아차려야 돼요. 이렇게 자신에 대해 깨어 있으면서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 “눈에 뵈는 게 없다” “욕심에 눈이 어둡다” 이런 말도 있죠.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
36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조용한 곳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알고, 길게 들어올 때는 길게 들어오는 줄 알고,..코끝에 마음을 집중해서 이런 숨의 상태를 알아차립니다.
호흡을 잘 관찰해 보면 언제 숨이 가빠지는지 알게 됩니다. 화를 내거나 흥분할 때, 남을 욜하려 할 때, 남의 물건을 훔치려 할 때, 이성에 대한 욕정이 일어날 때 숨이 가빠지죠.
37 조용히 해라? 장난치고 떠들고 있으면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외부의 경계에 반응하는 순간에 알라차리면 그 즉시 업식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느낀에 따라 충동적으로 반응해서 집착하는 상태로 옮겨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38 오늘 우리 자신에게 깨어 있지 못합니다. 음식 먹을 떄만 해도 혓바닥 맛에 집착해서 깨어 있지 못할 때가 태반이죠. 미각에 집착하면 혓바닥은 좋아하지만, 위가 괴로워하고 몸이 괴로워해요. 살이 찌면 그 뒤에 따를 고통도 매우 큽니다.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음으로 해서 스스로에게 경고하고 조절해 가는, 그래서 괴로움을 없애고 복을 짓는 공부를 해나가야겠습니다.
42 수행자는 참아서는 안 됩니다.
참을 것이 없으려면?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하는 분별이 끊어져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은 내 관점,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분별이 일고 그런 생각이 일어났을 뿐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49 꼭 말을 해야 아나? 99.9퍼센트의 사람들은 말로 표현해 주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자기 마음을 상대에게 진실하게 전달하지 않은 채 막연히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나 하고 생각만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말입니다. 말은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없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50 “식사가 준비가 다 됐습니다” 이건 알림이죠. “식사하세요” 이건 알림인 것 같지만 명령이에요. “밥 안 먹고 뭐해요?” 이건 시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알림뿐이고, 먹고 안 먹고는 그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인생에 간섭을 하고 있지요. 언제까지 먹어라. 안 먹으면 치워버릴 거야…그래서 시비가 되는 겁니다. 열심히 식사를 준비해 놓고 도리어 그로 인해 시비가 붙는 거죠.
51 밥 먹을 때를 알리는 것은 침묵과 같습니다. 묵언을 하라는 본래의 뜻은 입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입을 다물라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침묵입니다.
55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이미 뉘우쳐 사과를 했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붙들고 문제를 삼는 것은 그가 여전히 그 사건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 게 아니라 이 사람이 그것을 놓지 못하기 떄문에 소한이 일어난 거라는 말입니다.
56 현재에 깨어 있다? 틀렸을 때 틀린 줄 알아차리고, 모를 때 모르는 줄을 알아차리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못한 것을 알아차리는 것!
59 “좋은 도반은 수행의 전부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매일 스스로 참회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포살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자자를 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정이 바로 수행 공동체가 되겠지요.
61 불가에서는 세 번 얘기하면 실행에 옮긴다고 해요.
81 계율이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처음부터? 아닙니다! 계율은 수행자들이 살아가면서 생긴 여러 문제들을 부처님이 보시고 수행자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나하나 지적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생겨난 것입니다(비전이 중요한 이유!)
92 무상하다는 말은 허무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물의 본질, 사물의 실제 모습을 묘사한 말. 실제의 세계는 그렇게 무상하다는 겁니다. 어떤 존재도 항상하는 것은 없다, 늘 변화한다는 거지요. 이 변화를 알지 못하고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각각의 존재들이 개별적 단독자라고,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116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법도 상대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됩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어떤 마음을 가질 때 행복해지는가,…”네가 옳다는 생각을 버려, 불자가 이래도 되겠어?” 라고 한다면 도리어 갈등이 생깁니다.
121 번뇌. 아침마다 어떤 옷을 입을까? 옷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까? 이처럼 쓸모없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살기 때문에 늘 바쁘고 고달파지는 겁니다.
128 원래부터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어리석을 때 나쁜 인간이 되지요. 사람이 본래부터 착한 것이 아니에요. 잘못을 뉘우칠 때 바로 착한 사람이 됩니다. 귀한 사람이 되느냐 천한 사람이 되느냐도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른 겁니다.
155 물 싸움에서 전쟁으로? “물이 중요하오,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오?” “그렇다면 그 하찮은 물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면 이는 현명한 일이오 어리석은 일이오? “부처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처님이 어리석다고 말했나요. 자기들이 직접 말했나요?
137 다툼은 사소한 문제로부터 출발합니다. 납북관계고 마찬가지. 자기의 이해와 목표에만 사로잡힘으로써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처럼 사실에 입각해서 양쪽을 잘 설득할 사람, 소위 중재자가 있어야 하는데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negotiator 문재인!)
153 노비를 해방시킨 스님이 드물다? 불법에 정통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의 모습의 꿰뚫어보고 그것을 뛰어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는 얘기지요.
171 화합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고 하는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하는 것이고요.
173 평등의 가치. 음식도 같이 먹고 물건도 같이 쓰고 생활도 같이 할 때 내부가 화합이 되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서로간에 차이가 나기 시작하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입니다.(최고의 복지는 평등?!)
185 인연 과보를 확연히 알며 인연 과보의 도리를 벗어나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깨달으면 인과를 벗어난다고 하는데, 인과를 확연히 알고 확실히 꺠달으면 인과에 매이지 않게 되지요.(원인을 알아야 해결책이 제대로 보인다!)
222 가고 안 가고는 그 사람의 일입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입니다.
지도를 가지고도 헤맬 때? 그럴 때는 길을 잘 아는 사람, 곧 경험이 있는 스승에게 물어여 합니다
똑같은 법문, 다른 얘기? 아는 만큼 들린다? 그래서 자기 공부가 중요합니다. 자기 점검이 필요한 거예요. 부처님은 다만 가르칠 뿐입니다.
239 그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꿈을 깨워주는 겁니다. 그 꿈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흔들어 깨워주는 것이죠. 바로 법에 눈을 뜨게 함으로써 스스로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