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주 길고 야심적인 저작으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쓰고자 한 것이 1950년이니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파악해야 할 자료가 엄청나기도 했고, 경제란 것이 분명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의 주체가 논쟁을 불러올 소지도 많았습니다. 또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쉬지 않고 항상 진화하는 것이어서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기술은 느린 걸음으로라도 다른 사회과학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기술은 늘 새로 태어나는 것이어서 해마다 달라집니다. 그 변화를 따라가려면 열심히 달리며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 있던 작업들을 흔들기도 하고 뒤집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4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을 따라 천천히 진화하는 거대하고 구조적인 ‘장기 지속’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역사가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4세기 동안의 시간과 세계 전체를 놓고 어떻게 그에 걸맞는 사실과 설명을 조직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장기적인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심층의 균형과 불균형을 선택했습니다.
52 이처럼 시장경제를 제한하고 있던 한계야말로 시장경제를 정의해주고 또 시장경제의 진정한 역할을 드러내주는 것이지만, 이점을 분명하게 의식하는 역사가는 아주 드뭅니다….하지만 이러한 측면들, 말하자면 교환의 규모가 규칙적으로 증가하면서 나타나는 가시적 현상들에 현혹되지 않는 소수의 역사가 가운데 비톨트 쿨라Witold Kula를 꼽을 수 있습니다. 쿨라의 비유를 소개하자면, 우물 밑을 들여다볼 때 깊은 물속까지 시선을 두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깊은 물속은 물질생활을 말하는데, 시장가격이 물질생활이라는 우물 표면에 닿기는 하지만, 항상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깊은 물속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물의 표면과 깊은 물속, 이 두 가지 차원을 다 고려하지 않는 경제사는 절름발이가 될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55 가격이 인위적으로 정해질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무엇보다 시장은 생산과 소비를 잇는 불완전한 연결 장치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시장이 부분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58 자본주의란 용어가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 말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달리 쓸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60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팽창한다
62 사실 여러분들에게 설명해드려야 할 문제는 딱 한 가지입니다. 즉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와, 또 반대로 시장경제를 자본주의와 합당하게 구분할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64 국제 상인들. 반시장. 부정. 유통. 불평등 교환
1950년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대형 고객과 거래하는 국제 상인들은 그들의 상선을 모조리 통상적인 무역로와는 다른 방향으로 빼돌리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고는 가격이 정상 가격보다 서너 배까지 오른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나 제노바로 화물을 보내 비싼 가격에 판매합니다.
나는 이 사장을, 기존의 전통적인 시장과 다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반反시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출현한 이 시장을 과도한 교란을 유발할 만큼 전통적 시장의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도 애쓰지 않았습니까?
66 상거래 경로가 아주 먼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그만큼 통상적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쉬어졌고, 자본주의적 과정이 더욱 선명하게 발생하게 됩니다.
이처럼 높은 이익을 거두는 것은 거래하는 지역과 품목을 갈아타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74 이제 요약을 좀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환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곳에 자리하는 교환이고, 이러한 교환은 투명하기 때문에 경쟁의 힘이 항상 작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교환이고 섬세하며 지배력을 행사합니다…자본주의가 자리하는 영역은 첫 번째 교환이 아니라, 두번째 교환입니다.
75 자본주의의 밑바탕을 이루는 불평등한 힘의 관계는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최초의 자본주의가 자기 모습을 펼치고 세력을 형성하며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것은 사회의 최상층에서였습니다.
77 전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다
93 이제 그 퍼즐 조각들을 다 합쳐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제3권의 목적입니다. “세계의 시간”이라 표현한 부제가 내가 노리는 목표를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그 진화 과정, 그리고 자본주의가 활용하는 수단을 세계의 전체사와 연결시켜보는 것입니다.
역사란 형태와 경험이 시간을 따라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그런데 이 세계는 불평등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100 이 경제계들의 형태가 서서히 변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심오한 역사가 드러나게 됩니다…이들 전형적인 경제계가 유럽 자본주의를 낳고, 나중에 세계 자본주의를 낳은 모태였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01 자본주의는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130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에서 이 두 가지를 주워 담지 않습니다.
167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기존의 시각을 뒤집다
삼층집 모델(물질생활, 시장경제, 자본주의). 브로델은 약 400여 년 동안의 역사적 시공을 작업 공간으로 설정해두고 자본주의라는 것의 정체에 접근해 들어갑니다.
179 ‘자본주의는 무엇이다’라고 딱 부러진 정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익이 콸콸 쏟아지는 고전압이 흐르는 곳, 예나 지금이나 바로 그러한 곳에서만 자본주의가 존재한다.” “반시장(독점, 경쟁이 없는 곳)이야말로 자본주의란 실제가 존재하는 곳이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본주의란 것은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 활동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는 물질생활과 촘촘한 시장경제를 겹으로 깔고 않자,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을 대변한다.”
181 최악의 오류는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이라고만 여기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 질서를 이용해 생존하고, 애초부터 육중한 상대자였던 국가와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또 사회 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도 이용합니다.
185 만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브로델에게 “당신은 자본주의가 어떤 생산양식이라고 정의하는가?”라고 물었다면, 브로델은 아마도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생산양식이라기 보다 어떤 생산양식이든 가리지 않고 결합하고 변형시켜서 높은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독점을 구현하는 존재가 아닐까요? 그와 같은 카멜레온이나 히드라 같은 존재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