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1,2. 김성동. p
동뜬. 동뜨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겨례의 얼을 ‘씻김’하는 ‘소리체[正音體] 소설’의 탄생_임우기(문학평론가)
소설 『국수』는 19세기 중후반 내부적으로는 조선왕조가 쇠락해가고 봉건제의 계급모순과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어 가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연달아 개항을 요구하는 와중에 야수적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대를 다룬다…
공간적으로는 충청도 내포 지방-현재의 보령, 예산, 덕산-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과 탐관오리들의 학정, 이에 맞서는 인민들의 항쟁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조선 역사의 불행한 시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국수』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마구 파괴당하기 전 우리 민족이 마지막 누리게 되는 조선 고유의 아름다운 말과 글, 전통적 생활 풍속, 풍정, 풍물 등을 섬세하고 생생하게 되살린다.
당대의 인정, 물정, 문물, 풍속 등 실제의 미세한 생활상을 말할 것도 없고, 그 무엇보다도 훗날 일제 강점기에 갈가리 찢기고 빼앗기게 될, 조선의 멸망 직전까지 생존해 있던 온전한 겨레말을 정밀하게 복원하고 생생히 되살려내었다.
1권
다만 두 가지 바둑이 있을 뿐. 참선에도 활선이 있고 사선이 있듯 바둑에도 활기가 있고 사기가 있는 것.
“무릇 목숨 있는 것은 다 소중하니, 남 목숨 소중한 줄 아는 자라야만 내 목숨 소중한 것도 알 수 있는 법. 지극히 당연한 이 이치를 모른 채로 아생은 뒷전인 채 살타만 하고자 하니 운석이 둔하고 행마가 무거울밖에. 그런 마음으로 어찌 이기기를 바랄까. 백전백패는 물론이고 동타지옥 업만 지으리니.”
22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상을 봐야 된다. 참모습을,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껕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가상이니, 몬(물건) 실상이 아니로구나. 가상이라는 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 부질없구나. 늘 그대로 있지 않으니 무상이라. 이 도리를 깨치고 난 연후에애 국수가 되든 부처가 되든 될 것이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이며.
삼라만상이 다 그렇듯 돌 또한 살아 있는 목숨이니라. 살아 있는 목숨이라는 것은 저마다 타고난 바 성품에 따라 제 살길을 찾아 움직여 나가는 생물이라는 뜻이니, 돌 또한 마찬가지구나.활기는 무엇이고 사기는 무엇인고? 이러한 이치를 깊이 깨달아 어느곳 어느 것에도 이끌리지 말고 돌 길을 따라 더불어 함께 움직여 주는 것이 산 바둑이요, 이러한 이치를 모른 채 돌을 잡은 자 마음으로만 돌을 움직여 가는 것은 다만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만 이끌려 있으므로 죽은 바둑이다. 돌을 죽일 뿐만 아니라 나를 죽이는 일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일체 독을 죽이되 죽이지 않고 일체 돌을 살리되 살리지 않는 법을 여산혀해로 보여주고 쓸 줄 안다면 일체중생이 편안하리니. 하물며 바둑이겠느뇨.
178 아조 오백년 동안 갈가리 찢겨지고 무너져서 빈 껍데기만 남아버린 나라. 도적떼는 해마다 늘어만 가고 민란은 그칠 사이가 없어 온 나라가 아우성인데, 날탕패 사당패 온갖 놀음 벌어지는 궁궐에서는 질탕한 풍악소리 끊어지지 않는다.
고신을 받기도 전부터 본밑을 뽑은 위에 더 많이 갈퀴질할 수 있는 자리와 곳으로 가고자 피눈이 되는구나. 승냥이와 이리떼 같은 수령방백이며 아전토호들 갈퀴질에 백성들은 가죽과 뼈가 서로 맞닿아 있는데, 해마다 흉년이요 역병은 또 창궐하여 민인들 시체는 산을 이루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강을 이루는구나. 뿐인가. 왜와 양이 무리들로 해서 오늘 서울 장안은 우량하이 소굴이 되고 삼천리 강산 삼백스무세 고을은 짐승들 발자취로 덮여가고 있으니, 이 나라와 이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255 백성들 마음을 잃을지언정 선비들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김사과만이 아니라 사모 쓴 벼슬아치들 모두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선비들 마음을 잃을지언정 백성들 마음을 잃어서는 죽어도 안 된다는 것은 김병윤 생각이었다.
285 현가 못된짓을 들춰내면서 새삼스레 알게 된 것이지만, 아전 나부랭이 몇을 갈아치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원줄기에서부터 바로잡지 않고서는 공연히 가지만 잡고 흔드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2권
184 우물정자 가운데 점을 하나 찍으면 퐁당퐁자가 아니냐. 우물에다 돌을 던지면 퐁당하고 들어가지 않느냐. 그것이 퐁당퐁자라는 것이다. 풀초 아래 배암삿자를 한 것이 바시락밧자라는 것이다. 풀 속에 배암이 지나가면 바시락바시락 하지 않느냐…글자라는 것이 본시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과 뜻을 서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 뜻에 따라 만들어 쓰는 것이 즉 문자인 것이다.
226 아, 시방 조선팔도 삼백스무세골마다 들앉은 게 죄 사모 쓴 도적늠덜뿐인디…
227 풋보리라도 잡아 죽을 쑤어 끼니를 잇고자 하여도 아직 보리가을도 되지 않아 이제 겨우 싻이 돋는 보리는 언제나 패려는지…복사곳 살구곳에 오얏곳 눈부신 울바자 너머 추라치 헤엄지는 냇가에는 땅버들 곳솜 휘날리는 삼월이라지만 아직 곳샘바람 손 시린데, 길쌈 거리마저도 죄 팔아올려 좁싼 됫박이나마 팔아먹을 마련 없는 집 아낙들은, 홑적삼에 홑치마 삼베 허리끈 바짝 졸라매고 구리비녀 나무비녀 꽂힌 귀밑머리 흩날리며 산으로 들로 헤매이고 다닌 것이었느니
247 뫼순이 바위.
337 토지야말로 천하에 근본이올시다. 그런데 이 큰 근본이 이미 헝클어졌은즉 다른 것들이 다 따라서 헝클어지는 것이야 마침내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337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사람들이 이끗만 좇아 숭상하는 풍조가 일어난 까닭인데, 시방 세상은 오로지 이끗만 좇아 일신일가 안락만을 숭상하고 의리를 저버리고 있으니….무엇보다도 먼저 의리를 일으켜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