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의 의미. 존 버거.
카메라는 신의 눈을 대신해 온 것일까?
사진술의 이용
74 나는 수잔 손태그(손택)가 『사진 이야기』라는 저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내가 인용하게 될 모든 인용은 그녀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모든 것은 그녀의 책에 대한 독서 경험에서 비롯된다.
카메라는 1839년 폭스 톨벗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기계로서 카메라가 발명된 지 겨우 30년도 지나기 전에, 사진술은 경찰의 서류 정리, 전쟁 관련 보도 자료, 군대의 정찰, 포르노그래피, 백과사전의 자료 정리, 가족 사진첩, 엽서, 인류학 자료의 기록,…그보다 조금 뒤인 1888년에 최초의 값싼 대중적인 카메라가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마르크스(1818년 태어났다)는 카메라가 발명되던 해에 성년이 되었다.
75 사진술의 가장 자유로운 순간으로서 사진은 순수 미술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민주주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대중적인 매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도 잠깐이었다. 다름 아닌 이 새로운 매체가 가진 ‘박진성’이 사진을 고의적인 선동 수단으로 이용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조직적으로 사진을 동원한 선전술을 이용한 최초의 단체에 속했던 것은 나치였다.
79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진들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81 카메라가 신의 눈을 대신해 온 것일까? 종교의 쇠퇴는 사진의 발흥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문화는 신을 사진 속에 끼워넣어 왔던 것일까? 이러한 변신은 처음에 그래 보였던 것만큼 놀라운 것은 되지 못한다.
기억이라는 기능은 어디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마치 그들 자신들이 어떤 사건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부터 보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지 않았더라면 목격되지 않았을 사건들을 주목하고 기억하는 눈이 존재하지 않을 수고 있지 않겠느냐고 묻게..
82 19세기가 계속되는 동안 자본주의 세계의 세속화는 신의 심판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심판이라고 은폐했다. 민주주의와 과학은 그러한 심판의 행위자가 되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사진이, 우리가 살펴봐 온 것처럼 이러한 행위자들의 보좌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진리라는 것으로서 사진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명성은 여전히 이러한 역사적 계기 덕분인 것이다.
83 그러한 편의주의는 모든 것-자연·역사·고통·타인들·재앙·스포츠·섹스·정치-을 구경거리로 바꿔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 도구는 카메라이다.
사진에 의해 표현된 장면은 직접적인 예상의 영원한 현재를 창조해 내게 되며, 기억은 필요한 것, 혹은 매력적인 것이기를 그치게 된다. 기억의 상실과 함께, 의미와 판단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된다. 카메라는 우리에게서 기억이라는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꼼꼼하게 다른 것들을 살펴 주게 된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 어떤 신도 그토록 냉소적인 적은 없었는데, 그 까닭은 카메라는 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잊기 위한 기록?!)
84 수잔 손태그는 역사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 신의 위치를 찾아낸다.
그 신은 독점자본주의라는 신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는 문화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구매를 자극하고, 계급·인종 그리고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상처를 마비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여흥이 공급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천연 자원을 보다 잘 이용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관료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무한한 양의 정보를 그러 모아야 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실재를 주관하하고, 실재를 객관화하는, 카메라의 양대 능력은 이러한 필요성을 이상적으로 충족시키며, 그러한 필요성을 강화시키게 된다.
카메라는 진보된 산업사회의 작동에 본질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실재를 규정하는 데, 하나는 구경거리(대중을 위해)로서, 하나는 감시의 대상(지배자들을 위해)으로서이다. 이미지의 생산은 또한 지배 이념을 공급해 주기도 한다. 사회적 변화는 이미지에 있어서의 변화로 대체되게 된다.
99 하지만 다른 사회적 계급들에게 그러한 전문적인 화가들의 그림은 자신들의 경험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져, 그들은 그것을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의 단순한 사회적 관례나 단순한 치장거리로 여겼던 것이며, 그것이 바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그림이나 조각품이 흔히 파괴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100 어째서 전통의 해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잠재적인 자유가 이용되지 않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들 중 하나는, 아직까지도 화가들이 훈련하고 있는 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대학이나 미술학교에서 그들이 맨 처음 배우는 것은 해체되고 있었던 바로 그 관례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르칠 수 있는 다른 전문적인 지식 체계가 존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점은 여전히 어느 정도까지는 현재에도 그러하다. 다른 전문적 지식 체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