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온도. 이덕무. p359
일상의 아름다움을 담은 따스한 문장들
이덕무가 남긴 글 가운데서도 읽을수록 매료되고 틈틈히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있다. 바로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 속 소품문이다…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쁘고 즐거운 때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을 더 많이 만난다. 그때마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바로 소소한 일상이다.
이처럼 글이란 잘 쓴 글인지 아닌 글인지 기술적으로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묘사하고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두 책은 분명하게 깨우쳐준다.
글쓰기가 두렵고 어려운가? 그렇다면 소품품의 글쓰기부터 시직해보라. 일상의 사소하고 잡다한 것은 물론이고 하늘로부터 땅끝까지 있는 무엇이든 글의 소재로 옮겨 적어도 괜찮다. 형식이나 격식에 구속받을 필요도 없다. 한 줄을 써도 좋고, 열 줄을 써도 좋고, 백 줄을 써도 좋다. 일기의 형식을 취해도 좋고, 편지의 형식을 취해도 좋고, 메모나 낙서의 형식을 취해도 좋다. 길을 걷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문득 글로 옮겨 적을 만한 것이 떠오르면 노트나 휴대전화에 써도 좋다.
그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진솔하게 옮겨 적으면 충분하다.
16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볼 때 글이 떠오르면, 그 그림은 참으로 훌륭한 그림이다. 이러한 까닭에 옛 그림에는 반드시 화제나 발문이 있었다.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 빼어나게 우뚝 솟은 봉우리와 싱싱하고 산뜻한 하얀 구름의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을 오랫동안 부러워하다가 한손으로 잡아당겨서 모두 먹으려는 마음을 품었다…천하에 이보다 더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것을 없을 것이다.
24 순백의 구름. 맑은 하늘에 떠 있는 한 조각의 순백의 구름으로 형암 이덕무의 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으리.
26 아침노을과 저녁노을. 아침노을은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
35 말똥구리와 여의주.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53 소소한 것들의 조화.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높고 넓은 것과 고금의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하면, 장관이고 기이하지 않는 것이 없다.
58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 중간에 있다”
60 서리 조각. 보통 사람에게 서리는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서리 또한 저마다 각양각색의 차이가 있다.
68. 자연과 깨달음. 정신이 맑을 때 한 송이 꽃과 한 포기 풀과 한 덩어리 돌과 한 사발의 물과 한 마리 새와 한 마리 물고기를 조용하게 관찰한다. 즉시 가슴속에 연기가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구름이 가득 일어난다. 마치 기분 좋게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다는 것 같다가 다시 그곳을 깨달아 알려고 하면 도리어 아득해지고 만다.
87 철학자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삶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120 만물을 관찰하는 안목. 만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부패해서 냄새 나는 것 이외는 모두 생기가 발랄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코 억제하거나 저지할 수가 없다.
122 세상은 둥글다. 하늘이 낳은 만물은 그 형체가 둥근 것이 많다…사람과 금수의 눈동자도 물의 정수를 응결해 해와 달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장 둥근 것이다.
140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다.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훗날 반드시 문득 깨치는 알이 있다면, 바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때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관청의 수령이 평온하고 조용한 성품을 갖춰서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을 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베푼 혜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후임으로 온 수령이 몹시 사납고 잔혹했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비로소 예전 수령을 한없이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143 세상을 거역하는 사람. 동방삭은 세상을 조롱한 사람이다. 영균은 세상에 분개한 사람이다. 그들의 고심은 모두 눈물겹다고 하겠다.
세상을 조롱하거나 세상에 분개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만약 진정 세상을 바꾸려고 고심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148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 얼굴에 은근하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과는 더불어 고상하고 우아한 운치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의 가슴 속에는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십 대 시절에 읽었던 책 속에서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을 본 것도 같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속의 한스 숄과 조피 숄,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속의 청년 마르크스, 『레닌의 추억』 속의 블라디미르 레닌, 『옥중수고』 속의 안토니오 그람시, 『동지를 위하여』 속의 네스토 파즈, 『아리랑』 속의 김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속의 신동엽,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속의 김수영,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 속의 전태일,…바로 그들이다.
151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 망령된 사람과 더불어 시비나 진위나 선악을 분별하느니 차라리 얼음물 한 사발을 마시는 것이 낫다.
152 경솔하거나 고지식한 것은 병폐다
159 아이에게 부끄러워할 일. 어린아이가 울고 웃는 것은 타고난 천성이다. 어찌 인위적으로 한 것이겠는가! 어른들은 기쁘고 노여운 감정을 거짓으로 꾸민다. 어린아이에게 부끄러워할 일이다.
솔직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을 되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어린아이를 본보기로 삼으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역설적으로 어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187 작은 재주와 편협한 견해. “예로부터 작은 기술이라도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스스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믿게 되면 점점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되면 작게는 욕과 비난이 온몸을 덮고, 크게는 재앙과 환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제 그대가 날마다 문자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힘써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만들자는 것인가?” 이에 두손을 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감히 경계하지 않겠는가.”
198 어린아이와 거울.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웃는 것은 뒤쪽까지 환히 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서둘러 거울 뒤쪽을 보지만 단지 까맣고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방긋이 웃을 뿐 까맣고 어두운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기묘하다. 거리낌이 없어서 막힘도 없구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만약 세상 견문이나 지식에 물들어 이치를 따지고 해석하기에 익숙한 어른이라면 마땅히 왜 그런지 궁리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뿐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거리낌도 없고 막힘도 없는 초탈의 경지다. 글이란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
198 아이의 지혜. “귓속에서 쟁쟁 우는 소리가 나요” “그 소리가 어떤 소리와 비슷하니?” “그 소리가 동글동글한 별 같아요. 보일 것도 같고 주울 것도 같아요.” “형상을 가지고 소리에 비유하는구나. 이는 어린아이의 무의식중에 표현한 천성의 지혜와 식견이다…”
이덕무는 좋은 글은 동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동심은 거짓으로 꾸미거나 억지로 애써 다듬지 않기 때문이다…세속에 물들고 견문과 지식에 길들여져 동심을 읽어버린 어른의 세계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순수한 말과 표현이기 때문이다. (동심? 가장 직관적이고 진실한 통찰이다!)
200 어린아이의 눙동자. 어린아이의 모공과 뼈마디는 모두 어른만 못하다. 그러나 유독 눈동자만은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보라. 바로 크게 기이한 조짐이다.
어린아이의 눈동자가 왜 크게 기이한 조짐인가?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맑은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성장하면서 점차 견문과 지식을 쌓다 보면 이성적 사유와 논리적 사고에 물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사람들은 보통 세상사와 우주 만물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어른의 성숙한 지성이라 찬사한다. 반면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넘치고 상상력이 풍부하기라도 하면 철이 덜 들어 좀 모자라거나 미성숙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오히려 이러한 인식이 견문과 지식에 눈과 마음이 현혹되어, 보이지만 보지 못하는 장님 신세가 되고 만 것을 알지 못한다.(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마음으로 봐야 해!)
204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보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루신의 말은 숨통을 터준 것 같이 편하다. 아침에 떨어진 꽃을 꼭 아침에 주워야 하는가? 그냥 두었다가 저녁에 주워도 괜찮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대고 하고 싶은 대로 맡길 따름이다.
212 미워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 마음을 가질 때 공평하지 않아 사랑과 증오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심하게 미혹된 사람이다.
227 원망과 비방. 원망과 비방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까닭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면 진실로 즐겁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그저 스스로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 그뿐 아니겠는가. 그러면 원망하고 비방하는 마음은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진다.
230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아이의 어린 시절은 물론 어른의 어린 시절 또한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로부터 삶의 활력과 재생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233 틈과 불화. 천만 가지 틈과 불화가 침범해 일어나고 솟구치는 것은 단지 내가 천만 사람과 더불어 뜻을 맞춰 서로 같이하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고, 저 천만 사람 또한 나를 거들떠보지 않거나 더불어 같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나와 같지 않은 자 가운데서도 그 같은 것을 취할 뿐이라면 함정은 설치하지 않아도 되고 칼날을 녹이고 화살을 거두어도 된다.
237 처신과 처심.
239 최상의 즐거움. 최상의 즐거움은 평범한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만 못하다.
240 혼자 노는 즐거움. 눈 오는 새벽이나 비 오는 밤에 좋은 벗이 오지 않는다.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할까? 시험 삼아 내 입으로는 글을 읽으니 듣는 이 나의 귀뿐이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구경하는 이 나의 눈뿐이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구나. 다시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256 본분을 지키고 형편대로 살다. 본분을 지키니 편안하다. 형편이 닿는 대로 사니 즐겁다. 모욕을 참으니 관대하다. 이것을 가리켜 대완이라 한다.
262 고금과 삼 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역사의 수레바퀴에 넣으면 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된다.
280 세상 모든 일이 놀이 같다면. 그야말로 지극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놀이를 애써 하는 사람은 없다. 마지 못해 하는 사람도 없다.
299 온몸으로 쓰는 글. 시인 김수영은 죽음을 맞기 불과 두 달 전인 1968냔 사월 어느 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김수영,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303 참된 문장이 사라진 까닭. 고문도 쓰일 당시에는 금문이었고 금문 또한 시간이 지나면 고문이 된다. 오직 자신이 지기와 정신이 살아 있는 글을 쓰는 데 힘을 쏟을 따름이다.
304 그저 독서할 뿐. 박지원은 그가 평생토록 읽은 책이 거의 이만 권이 넘는다고 했다. 하루 한 권, 일 년이면 삼백육십오 권, 오십 년을 해도 일만 팔천이백오십 권으로 이만 권이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이덕무는 불과 쉰셋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으로 지독한 간서치, 곧 ‘책만 보는 바보’였다.(글도 썼다!)
314 시문과 서화. 시문을 볼 때는 먼저 작자의 정경을 찾아야 한다. 서화를 평할 때는 도리어 자신의 신우를 돌아보아야 한다.
글을 볼 때는 무엇보다 먼저 글쓴이의 처지와 상황을 알아야 한다. 글의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고 작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글자만 읽지 말고 생각을, 삶을 읽어라) 글씨와 그림을 비평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기운과 그릇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제멋대로 제단하거나 함부로 비방하지 않기 위해서다.
315 글 읽는 선비와 저잣거리의 장사치. 사람의 참된 가치는 신분이나 지위, 제물이나 부귀에 있지 않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317 책욕심. “수학은 미세하게, 자연과학은 깊게, 인문학은 묵직하게, 논리학과 수사학은 토론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들어 준다.”(프란시스 베이컨,『학문의 진보/베이컨 에세이』)
독서가 한 사람의 인생과 성격을 만든다면, 어떻게 그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318 글이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사람의 글을 답습하거나 모방하기만 한 글은 군더더기일 뿐이다…오직 글쓴이의 진솔한 감정과 뜻과 마음과 정신이 담겨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322 일과 독서. 일을 처리할 때는 통용을 귀중하게 여긴다. 독서할 때는 활용을 귀중하게 여긴다.
고봉 기대승이 독서에만 정신을 쏟가가 보리 멍석을 비에 쓸려 떠내려가게 한 일은 결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독서하는 틈틈이 울타리를 두르고 담을 쌓거나, 마당을 쓸고 변소를 치우거나, 말을 먹이고 물꼬를 보며 방아 찧는 일을 한다면 몸과 체력이 단단해지고 뜻과 생각이 평안해져 안정을 찾을 수 있다.
328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문장에 약하고, 문장을 잘하는 사람은 학문에 약하다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그러나 참으로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문장에도 능숙하고, 문장에 능숙한 사람은 학문 역시 잘한다.
오늘날 우리가 고전이라 일컫는 저서의 작가들은 모두 탁월한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허균, 이익,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사마천, 이탁오, 루쉰, 원굉도, 니롤로 마키아벨리,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마르크스, 니체, 괴테, 톨스토이는 학자인가 문장가인가? 그들은 모두 한 시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류의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철학자이자 사상가이자 문장가였다. 대방가란 문장과 학술에 모두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문장이 지극한 경기에 이르면 어떻게 써도 학문 아닌 것이 없고, 학문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무엇을 써도 문장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뜻이 크고 높은 사람이란 마땅히 대방가를 꿈꾸는 사람이다.
330 문장이란 다른 사람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서 터득해야 한다.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더라도 다른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지를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나라의 시는 고려의 익재 이제현을 종주로 삼는다…”
336 내 서재. 서재에 책을 아끼는 아홉 가지 생각을 담았다. 구서(九書)란 독서, 간서, 장서, 초서, 교서, 평서, 저서, 차서, 폭서. 책을 읽는 것, 보는 것, 간직하는 것, 내용을 뽑아 베껴 쓰는 것, 내용을 바로잡아 고치는 것, 비평하는 것, 저술하는 것, 빌리는 것, 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것 등이다. 책을 좋아하더라도 ‘독서’라는 두 글자에서만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349 옛사람과 지금 사람.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지금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옛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351 음덕과 이명. 음덕을 베푼다는 것은 마치 이명과 같아서, 자신은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알게 할 수 없는 법이다. 내가 하지 못하지만 마땅히 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357 다만 쓰고 싶은 것을 쓸 뿐. 신선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담담하여 마음속에 한 점의 더러운 티끌고 없을 때에는 도가 이미 원숙한 지경에 이르고 금단술이 거의 이루어진다. 매미처럼 껍질을 벗고 날아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만약 내 마음에 잠깐 동안이라도 더러운 티끌이 없다면 그 잠깐 동안 신선이 되는 것이다…무릇 번거롭고 속된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신선이 되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숙제하듯이 쓰는 글이 가장 나쁘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을 때 쓴 글이 가장 좋다. 단지 정말로 쓰고 싶다는 마음 외에 아무런 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이 써야 비로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