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가면 1: 원시 신화. 조지프 캠벨. p533
지난 12년의 즐거운 시간을 회고해보려고 한다. 이 작업을 하면서 얻은 주요한 성과는 내가 오랫동안 충실하게 지켜온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생각이란. 인간이 생물학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그 영적 역사에서도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통일성은 하나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펼쳐져왔고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모든 악기들이 함께 소리를 내며 거역할 수 없는 물결을 이루어 장대한 포르티시모로 힘찬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이 절정으로부터 그 다음의 위대한 악장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들은 모티프들이 미래에 다시 등장하지 말라는 없는 없다. 그것들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등장할 것이지만, 그 모티프들은 동일할 것이다. 이 네 권의 책 속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였던 여느 사건들이 일어났음직한 사건일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이 모든 사건들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하더라고 일어났음직한 사건일 수 있다.”
#머리말: 신과 영웅의 자연사를 향하여
신 과학의 얼개
전세계의 신화를 비교하다 보면 인류의 문화사를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동일한 본성의 인류가 가지는 보편성 때문? )
자신이 속한 종교의 성소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독실한 사람들은 다른 전통의 성사(聖事)에 대해서는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대어 반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러 전통을 정직하게 비교해보면 그 모든 전통은 다양한 신화적 모티프-모든 사람이 존중하고 있는-를 저장하고 있는 하나의 금고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 모티프들이 지역적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되고 조직화되고 해석되고 제의화된 것일 뿐이다.
현대 문명들은 인류 공통의 전통을 각기 다른 자리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영적으로 고립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 이해의 공통 지점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가?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의식적 차원이든 무의식적 차원이든 각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에너지를 분출시키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성적 차원에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와 우리 조상의 삶을 이끌어온 신화들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극한적인 대립 국면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17
나는 이처럼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이미 축적된 자료의 보고를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의 통일적인 신화 과학의 구성요소들을 수집할 것이다.
21
장님 코끼리 만지기.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판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비수와 같은 말로 서로를 비방하면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 ‘이것이 그리고 저것이 옳다’고 외칠 뿐이다.
24
신화는 분명 어린이를 위한 장남감이 아니다. 또한 현대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고대적인 것이거나 단지 학문적인 것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신화 속의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부여를 가져온다.
신화는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모두를 움직이고, 폭도를 움직이며, 문명을 움직인다.
42
신은 이미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더구나 신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마저도 초월해 있다!
58
“시는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려는 방식이다”
59
신화는 합리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화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경험의 각인
67
고통과 환희.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비극의 재료를 “인간의 고통 속에 있는 중대하고 불변하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교문화적 신화 연구를 위한 훌륭한 구조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전세계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인상들은 “중대하고 불변하는 것”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상들 가운데 고통 그 자체-비극의 원재료-가 확실히 가장 일반적인 인상이다. 적어도 서론적인 의미에서는 고통이 인생사의 요점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신화의 시적 변형, 즉 연민과 공포를 통한 비장한 정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종교 의례에 의한 정화(카타르시스)와 심리적으로 정확히 대응한다고 말하였다.
종교 의례와 마찬가지로, 비극은 마음의 초점을 바꿈으로써 고통을 환희로 변화시킨다.
68
스스로 비극적 연민을 느끼면서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동시에, 비극적 공포를 느끼면서 “비밀스러운 원인”과 하나가 된다. 그 때문에 영혼은 어느 날 기쁨의 탄성과 함께 인간성과 지성 둘 다를 뒤로 남겨 놓고, 현상이라는 가면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별안간 깨닫고 그것을 도약할 수도 있다. 즉 비극의 양식은 끝나고 신화가 시작된다.
69
당신의 얼굴을 보려는 사람은 모든 형태의 얼굴과 모든 형상을 초월해야만 합니다….모든 얼굴 속에는 얼굴의 얼굴이 가려진 채, 수수께끼 속에 보입니다. 우리가 모든 얼굴을 초월하여 얼굴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개념도 없는 신비적 침묵과 비밀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그것은 가려져 있지 않은데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눈과 언어와 지성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71
그는 우리와 함께 있는 동시에 아득히 먼 곳이 계십니다.
단 하나의 참된 지혜는 인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지혜는 위대한 고독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만 그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 궁핍과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 마음은 그 감추어진 세계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73
궁극적 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신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시는 근원적 말이 일상적 말들 배후에서 울려퍼지도록 하는 예술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화는 자신을 통하여 형상들의 형상 없는 형상을 드러내는 형상 만들기이다.
결론: 신화의 기능
521
국지적 이미지와 보편적 길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깊이와 성실성이다.”
근본적 관념과 종족적 관념. 근본적 관념들은 각 지방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형성된 종족적 관념-근본적 관념을 실제화하는 수단인-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상태로 직접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근본적 관념들은 인간 자신의 이미지처럼 인생의 파노라마 안에서 아주 다양하게 굴절된 형태로서만 알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나 의례를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영구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을 가리키는 단서로 간주할 수도 잇고, 각 지방, 즉 관련된 종족의 풍토, 역사 그리고 사회학의 함수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신화와 의례의 이 두 측면을 가리키는 인도 용어는 각각 마르가와 데이시이다. 마르가는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길”을 의미하며, 데이시는 어떤 제의의 종파적·역사적 측면-특정한 종족과 민족과 문명을 형성하는-즉 그것의 “지역적, 국지적, 종족적” 차원을 가리킨다.
나는 이 두 인도 용어를 바스티안의 용어와 연결시키려고 한다. 이 인도 용어들은 바스티안의 통찰력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어떤 신화적 이미지의 두 측면이 지닌 심리학적 힘을 서양의 용어들보다 더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길”로서 기능할 때, 신화와 제의는 개인의 변화를 초래한다. 개인을 지역적·역사적 조건에서 해방시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522
신화적 상징은 표현 불가능한 세계를 구체적이고 국지적인 상징을 통하여 겸험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국지적인 상징 형태의 힘과 호소력이 확장되는 동시에 경험자의 정신이 그것을 초월하게 되는 어떤 역설이 가로놓여 있다. 시화가 지닌 독특한 도전적 힘은 바로 이러한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 자체의 시도 속에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화학의 전체적 논점과 신비를 놓치게 된다.
525
사랑, 권력, 그리고 덕의 속박
고전적인 인도철학은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하는 목표들과 이 목표들로부터 절대적 해방을 구별한다. 이 세상에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목표들은 더도 덜도 아닌 세 가지이다. 사랑과 쾌락(카마kama), 권력과 성공(아르트하artha), 그리고 법적인 질서와 도덕적 덕행(다르마dharma)이 바로 그것들이다.
529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사제 도시국가 시대의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느낀 자신들의 경외심을 무언극을 통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언극은 그들이 천상의 법칙이라고 생각한 법칙에 근거하였다.
532
그러나 신전의 경내나 춤마당 또는 어떤 성스러운 장소에서는, 이 모든 것을 하찮은 난센스로 보이게 할 어떤 초월적 신비감이 단편적으로아나 체험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에 의해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삶의 네번째 목적(세계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경외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샤먼이 걷는 ‘고통의 길’은 네번째 목적에 일생을 바친 최초의 알려진 사례이다. 샤먼들은 신호를 마르가, 즉 심리학적 변형에 이르는 길로서 진지하게 이용한다.
533
신화는-따라서 문명은- 시적·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그 중간에 종족적 관념으로부터 근본적 관념에 이르는, 국지적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길이 놓여 있다. 여기서 보편적 존재란, 사람들이 알면서도 알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인간 그 자체이다. 왜냐 하면 남성적 경험 양식과 여성적 경험 양식으로 양극화되어 있고, 유아기에서 성인디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고, 완고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고, 세계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 정신이랴말로 궁극적으로 신화발생 지대이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은 모든 신들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이며 신들의 노예이자 그 주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