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김풍기. p
#책의 운명을 이야기하다
사람이나 다른 생물처럼, 나는 책에게도 그 나름의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책일지라도 그 책의 탄생에는 온갖 인연들이 오묘하게 얽혀 있다. 그것의 이면에 스며 있는 책의 이력은, 물론 누구에게나 읽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나 나나 모두 책을 귀하게 여기고 읽지만, 나는 책의 탄생과 소멸, 전승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사연들이 언제나 궁금했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노라면 누군가가 무심코 해놓은 낙서조차도 심상치 않게 보였다.
이런 과정들을 추적하면서, 책의 유통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유의 길을 따라가보고 싶었다. 한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사유와 지식은 책의 유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학파의 형성에는 언제나 그들이 공유하는 책이 있었을 것이다.
책의 운명이 인간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현장이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총론_지식의 유통과 책의 문화사
만화책이든 이름 없는 작가의 소설 작품집이든, 혹은 조잡하게 찍어낸 세계 고전 전집이든, 기본적으로 책을 만드는 마음에는 작으나마 인간과 세상에 대한 희망이 들어 있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책 만드는 과정을 보면 누가 함부로 책을 대할 수 있겠는가…이 문장에 생략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을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책의 유통으로 만들어지는 학파.
책을 읽는 행위는 읽는 것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읽는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그의 사회적 행동에 변화를 준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점에 놓여 있다. 근대 이전 수많은 책들은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해석되면서 자신의 가치를 발현하였다. 나는 그들이 읽었던 책들을 오랫동안 다시 읽고 생각하면서, 그 책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책은 언제나 시대와 독자의 해석을 기다리며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하나의 텍스트였지만, 동시에 그 해석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수시로 변화시키며 사유의 역사를 만들어 온 주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유의 자유로운 떠돎을 따라가보는 여행인 셈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매뉴얼
「선가귀감」
#벗으로 삼고 싶은 사람, 박지원
「연암집」
연암 박지원을 벗으로 만들기. 맹자는 책을 통해서 ‘옛 선현들을 벗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렇게 멋지고 기상 넘치고 생각 깊은 사람을 벗으로 삼을 수 있다면, 내 삶도 한층 빛나지 않을까 싶다.
#개처럼 살아온 삶을 벗어나라
「분서」
348 유서 쓰는 사람. 옛 사람들의 유서를 꽤 여러 편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바로 명나라 때의 사상가 이지(1527-1602)의 유서다. 그의 호가 탁오이므로, 흔히 ‘이탁오’라고 불린다.
350 흔적을 찾기 힘든 책. 이탁오의 책을 처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허균. 역모 혐의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허균. 만년에 「한정록」편찬. 중국 문인들의 글 중에서 읽을 만한 것들을 메모, 주제별로 나누어 편집. 여기에 이탁오의 「분서」가 등장한다.
353 동심설. 중국철학사에서 이탁오의 이름은 ‘동심설童心說’과 함께 소개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었던 최초의 일념, 그 진실된 자리를 동심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라면서 그 동심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은폐되어 발현하지 못하게 되므로, 중요한 것은 동심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개 같은 나의 인생. 54세가 될 때까지 이탁오는 비교적 평범한 관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가 갑작스럽게 가족과 헤어져 치열한 학문의 길로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현실적으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당시의 심사를 담은 글 한 편이 눈길을 끈다.
나이 50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이탁오의 이 진술은 그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름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진전시킨다고는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의 학설을 동어반복처럼 되뇌기 일쑤다. 표현만 슬쩍 바꾸어서 마치 자기 이야기인 듯 서술하지만, 남의 생각을 훔쳤거나 아니면 정확한 의도를 추측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말을 상찬하기에 바빴던 사실을 자신이 왜 모르겠는가.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근대 이전 지식인들에게 경서 공부라 무엇이었을까. 성현들의 말씀을 읽으면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실천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준비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여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관직에 나아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출발점, 그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성현들의 말씀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글쓰기를 잘할 수 있었으므로 경서를 익히는 것은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여겨졌다. 이러한 현실을 이탁오는 강력하게 비판했다.
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 남을 따라 짖기만 하는 개가 되지 않으려면 공부와 실천의 합일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함께 공부를 하며 서로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이를 ‘도반’이라 부르거니와, 이탁오 역시 그런 존재를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승과 벗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원대한 목표가 있다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는 스승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만을 따라서 오직 한길로만 가기에는 너무도 많은 유혹과 욕망이 횡행한다. 따라서 내 삶의 어지러움을 잡아주고 힘들 때 함께 독려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벗들이 필요하다.
이탁오 역시 스승과 벗을 중시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스승과 벗의 범주는 조금 특별했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친구란 원래가 하나이니,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하겠습니까?
공부의 길을 걷는 나 자신도 이탁오의 글을 읽으며 주변을 돌아본다. 나에게는 저와 같은 스승이자 벗이 있는가. 나는 스승이자 벗으로서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공부에 대한 열망이 치열한다. 그런 생각들이 책갈피 사이로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