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유아교육 읽기. 리세롯 마리엣 올슨. p
이 책은 현대 교육개혁 속에 만연한 담론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표준화/시험과 같은 절차들을 비판한다. 지식을 안정적이며 규정되어 있고 전수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러한 지식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결과물을 우위에 두는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한다.
근대 학교교육. 학교교육이 발전해온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난 50년간의 유아교육을 포함하여 근대 학교교육은 들뢰즈식으로 표현하자면 재현의 논리에 사로잡혀 아이들의 생명성 길들이기라는 결과를 낳았다.
유아교육을 의무화하는 과정은 학교교육 의무화 과정과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경로를 밟아왔으나 유사한 사회적 요구와 목적에 의해 두 기관 모두 제도권 속에 포함되어왔다. 생산이 점차 지식과 기술의 재생산과 분리되어감에 따라 이른바 아이들 키우고 가르치는 일이 ‘자연적인’ 맥락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재현의 논리.
학교교육이 제도권 속에 자리 잡게 된 배경을 공부함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학교제도가 재현의 논리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며, 학교의 전통은 재현적 지식 혹은 과거의 지식들을 재생산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재현의 논리 이면에는 재생산과 생산이 분리될 때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세상을 재현해야 하고 과거의 세상을 재현하고 있는 그 ‘지식’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그 지식은) 소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어른 세대에서 젊은 세대로 전달되는 과정인 전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젊은 세대와의 소통 없이는 이상, 희망, 기대, 표준, 의견들을 전달할 수 없고 사회적 삶은 존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룬드그렌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학교교육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온 19세기 초 이후 강력한 변화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가 과거 지식을 재생산하는 기관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학교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성을 갖고 사회뿐 아니라 개개인에게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야 할 책임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식을 명명하고 그것을 말하는 과정들이 ‘진짜’를 재현하고 있지 않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나, 재현의 논리는 여전히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들뢰즈나 가타리를 포함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안다to know’는 것의 의미가 ‘진짜’ 실체와 실체에 대한 객관적인 재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강력히 반대한다. 실체에 대한 객관적 사유를 반대하는 철학자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지식의 맥락적 특징. ‘명명화 과정’은 한 맥락에서 존재했던 것들이 다른 맥락에서도 사용되고 이해되어야 일어나며, 맥락을 벗어나면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사유를 재현에 종속시키는 고전적인 이미지는 진정한 사유의 의미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한 들뢰즈. 들뢰즈는 이러한 사유에 대한 이미지가 사고 행위를 억압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교육은 학급의 장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길들이는 기구가 된다. 들뢰즈는 사유를 하나의 다른 활동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니체로부터 영감을 받은 들뢰즈는 사유를 창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지의 것 또는 익숙하지 않은 것과 마주칠 때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그 무언가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식에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기초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발명하고, 창조하고, 실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고를 비재현적이고 유목적으로 이해하는 방식, 즉 리좀적 사고를 뜻한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없다. 리좀은 항상 중간에, 사이에, 간주 중에, 중간적 존재로 머문다. 나무는 계열적이지만 리좀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상호 연계적인 성격을 지닌다. 나무는 동사형의 ‘~이기’ 또는 ‘~임(to be)’에 해당하지만 리좀의 구조는 ‘그리고and, 그리고…그리고’로 이어지는 접속사이다. 이러한 접속사는 동사 ‘임’을 흔들어 뿌리째 뽑을 만큼 충분히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유아를 하나의 개인으로 보고 유아가 누구인지를 탐색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많은 연결체들 또는 마주침들의 ‘접속and’을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재현이 결코 안정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열려 있고 불안정한 집합적인 욕망의 배치라는 상황에서 틈을 만들고 탈주하고 더해가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미 세상 속에 있다
그들은 결과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이들의 학습과정을 따라가면서 아이들의 힘이 학습과정을 어떻게 지속시키는지에 주의를 기울였다.
교사의 역할.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험이 발생할 수 있는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복잡한 연결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정해주는 것이 진정한 교사의 역할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음에도 학교 체제 내에서 아이들은 젖먹이처럼 여겨진다.
어느 진보 신문에 모제르는 성인의 시각에서 아동기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글을 인용했다.
재현과 재생산의 전통 그리고 일방적인 전수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조나 체제의 첫 번째 조건을 틈으로 보았다.
마주침과 사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사고가 사고를 창조해낸다는 독특한 사유를 제공한다….정착하지 않고 안정된 장소가 없이 활동을 수행하는, 유목적 사고를 제안했다. 유목적 사고는 규칙과 관습을 해체시킬 뿐 아니라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연결시킨다…유목적 사고는 사고와 동시에 사고의 조건을 매 순간 만들어가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고는 마주침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세상 속의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이 무엇은 재인의 대상이 아니라 근원적인 마주침이다.
마주침은 우리가 전혀 몰랐던 우주에 접근할 수 있게 하므로 아주 즐겁고 긍정적인 일이다.
실험적 경험론. 실험이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에 대한 관심으로, 발생하는 것, 새로운 것, 그리고 진리를 재현하고 제인하는 것 그 이상이다. 실험으로서의 사고는 새롭고, 재미있고 독창적인 것이다.
사고한다는 것은 실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험은 늘 발생과정 속에 있다. 그것은 새롭고, 재미있는 것으로 진리의 외현을 대체시키고 그 이상을 요구한다.
들뢰즈의 경험론은 철학의 인식론적 전통에서 말하는 경험론과 다른, 특별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사고와 실제의 불안정성과 끊임없는 생산을 설명해주는 길들여지지 않는 경험론이다.
강렬하고 예측불가능한 실험을 하려는 유아학교들의 욕구와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