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진짜 친구. 설흔. p
“고요한 때는 생각이 괜찮다가도 막상 일을 만나면 어지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건 네가 고요한 가운데서 수양할 줄만 알았지 극기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조그만 힘이 들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게다. 사람은 반드시 일을 통해 연마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고 너의 두툼한 두 발로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문인은 붓으로 다른 이를 핍박한다.
그래서 다른 이도 문인을 붓으로 핍박한다.
무인은 무기로 다른 이를 제압한다.
그래서 다른 이도 무인을 무기로 제압한다.
‘대나무 대신 개똥이면 어땠을까?’
대나무도 사물이고, 개똥도 사물이니 안 될 건 없다. 왕양명, 개똥을 보고 주자의 이론이 틀렸음을 깨닫다! 진리는 개똥에 있지 않고 개똥을 보는 마음에 있다! 성즉리가 아닌 심즉리! 흥미로운 견해가 아닐 수 없다. 그랬더라면 양명학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을까? 더럽고 냄새나는 개똥이었다면 고고한 주자학과의 차별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이용휴는 그의 하나밖에 없는 스승이다.
가르쳐준 스승이 아니라 알아봐준 스승이다(그러니 진짜 스승이다)
“자네는 이미 소유하고 있네.”
“무엇보다 자기를 이기는 공부를 해야 한다네.
천리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알지.
인욕이 있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지.
알면 뭐하는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공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새것만 강조하다 이상한 쪽으로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옛것을 모범으로 삼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훨씬 나을 터이오.
선생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의 공부는 나날이 줄어드는 것을 추구하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 푼의 인욕을 줄일 수 있다면 한 푼의 천리를 회복할 수 있다. 얼마나 경쾌하고 깨끗한가!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가!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은 경쾌하고 깨끗하고 간단하고 쉬운 진리를 복잡하고 어렵고 더럽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사람은 진리를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람 곁을 맴돌다 고개 숙이고 떠나가는 것이다. 진리가 떠나간 뒤에야 사람은 진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공허하게 외친다.
“내겐 이미 방이 있습니다. 남들 보기엔 허름해도 내겐 이미 방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멋진 이름도 있습니다. 구양수는 자신의 서재를 아름다운 배에 비유했고, 육유는 책 둥지라 불렀습니다. 난 이 방에 골목길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골목길 집에 골목길인 당신이 살고 있네요.”
집에 있으면 / 지붕 스치는 바람이 괴롭다. / 밖에 나가면 / 떠도는 중이 좋다. / 처는 거미 / 자식은 누에. / 나의 온몸 / 그들이 휘감았다.
‘갈림길에 이르렀으면 의심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네.’
속인을 마주해서는 세속을 벗어난 말을 하기 어렵고, 장님을 마주해서는 비단 무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법이지요.
그자: 글이란 뭐요?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오?
그자: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이오. 남을 위해 쓰는 것이오?
그자: 그대도 잘 알겠지만 남을 위해 쓰는 글은 오래가지 못하오. 이언진의 시는 독특했소. 하지만 그는 인정받고 싶어 안달복달하고 있었소. 꼭 몇 년 전의 나처럼.
그: 원굉도와 왕세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군요. 의고파니 창신파니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군요.
그자: 원굉도와 왕세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지. 중요한 건 이언진이 시인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오. 시인이 뭐요? 시 몇 편 쓰고 끝내는 게 시인이요? 아니오. 시인은 평생 시를 쓰는 사람이라오. 환호와 칭찬은 비난과 혹평이 그렇듯 시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소.
“…하늘은 지난해 진 꽃으로 다시 올해의 꽃을 삼는 법이 없으니, 어쩌면 우리가 쓰는 문장도 그와 같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우리의 운명도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꽃이 지고 꽃이 피는 진리. 지난해의 꽃과 올해의 꽃. 냉정하나 진리인 그 말을 들은 그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발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