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 편해문. p
왜 대한민국 도시 놀이터의 놀이 기구는 한 회사에서 만들어 공급한 것마냥 똑같지? 왜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지? 왜 돈을 주고 실내 놀이터에 가서 놀아야 하지? 도대체 왜 그런 거지?
한국의 놀이터를 바꾸지 않고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들의 삶이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내 질문이 당신의 질문이 되길 바란다.
마을 가꾸기 또는 도시 재생의 물꼬가 놀이터에서 마중물을 퍼야 한다. 아이들은 좀 놀고 부모들은 좀 쉬고 해야 마을도 가꾸고 재생도 될 것이 아닌가.
창의와 혁신을 부르짖는 나라에서 아이들 놀라고 만든 놀이터 앞에서 절망한다. 6만 개 놀이터가 공공 놀이터로 제구실을 다할 수 있을 때 아이도 살고 부모도 숨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놀이터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 아이들이 지금 어떤 ‘놀이 생태계’에 놓여 있는지 잠시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알아야 놀이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들을 모르고 아이들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놀이터만 짓겠다고 하는 분들은 꼭 읽기 바란다. 아이와 놀이라는 나침반이 없이 놀이터를 찾아가겠다는 것은 표류하겠다는 것이다.
소비가 놀이, 마트가 놀이터
돈으로 아이 키우기를 멈추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교육은 비로소 시작되고 아이는 살아나고 놀이 또한 싹이 틀 것이다.
돈으로는 아이들을 한 치도 키울 수 없을뿐더러 메신저와 SNS로는 더더욱 어렵다.
부모가 사는 게 아니다 보니, 아이들도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작고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친다.
한 현인이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망가뜨리고 싶으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 줘라. 또 사 줘라.”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 앞에서 지갑을 열지 않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이 자본의 한복판에서 증명하시라. 마트가 놀이터가 되고 소비가 놀이가 된 세상일지라도.
놀이터 밖에서 소진되는 아이들
이렇게 한국에서 십몇 년을 보낸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앓는 질병이 있다. ‘학습된 무기력’과 ‘자발적 복종’이다. 부모는 집에서 교사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뭔가를 하지 못하게 한다.
아이들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이고 생태적인 놀이터가 없어 놀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갈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갈 시간이 없습니다. 놀이터에 가도 함께 놀 친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놀이터란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런 허접한 놀이터라도 아이들이 갈 수만 있다면 아이들은 그곳을 최고의 놀이터로 만듭니다. 놀이터를 새롭게 만들 때, 이 점이 간과되면 ‘놀이터 토건’으로 갈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점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대형마트에서 주택 가까이까지 치고 들어오는 돈 내고 노는 ‘놀이터 사유화’의 거센 바람에 맞서 놀이터 제자리 찾기에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규제와 제한을 넘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이다.
「어린이놀이터시설 안전관리법」은 관리주체를 위한 법이지 아이들을 위한 법이 아니다.
놀이 기구는 하나의 점이고 놀이터는 작은 원이다. 점과 원 밖에 세상이라는 아이들의 실제 놀이터가 커다랗게 존재한다. 놀이 기구와 놀이터를 하나로 보려는 고정된 사고가 아이들 놀이 공간을 조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아이들은 놀이 기구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놀이터에서 놀고, 놀이터에서 놀기보다는 세상에서 논다.
놀이 기구 없는 놀이터를 상상하지 못하는 까닭은 반복된 시각적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