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p
보수는 자기욕망에 비교적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욕망에 정직하다보니 욕망이 굴절될 여지가 적습니다. 그러나 진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권력의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여러 욕망 중에 명예를 선택한 것일 뿐, 무슨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닙니다.
돈, 섹스, 권력 어느 것이든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은 진보진영에서 존경받기 어렵습니다. ‘권력’은 얻고 싶어도 ‘권력의지’는 숨겨야 합니다. 권력의지를 숨길 때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모여들지만,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진보 지지자들은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욕망을 감추고 살다보니, 남의 숨겨진 욕망이 자꾸 눈에 밟혀서 상대방의 욕망을 들춰내고 난도질하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보여줍니다…
르네 지라드의 희생양 이론. 욕망은 타고난 본능이나 충동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도 인간은 늘 뭔가를 강렬하게 욕망하는데 그 욕망은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욕망은 다른 사람(모델)의 욕망을 흉내낸 것입니다.
#작가의 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입시로 상징되는 모방욕망의 사회는 늘 희생양을 원합니다. 욕망이 억압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일탈자가 되거나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날로 정글로 변해갑니다…르네 지라르는 이러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한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설명합니다…
“흔히 조기교육, 영재교육이 우수한 과학자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과학고도 만든 거고. 근데 그거 완전히 착강이야. 너 창의성이 뭔지 아니?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데 창의성이 과학고에서 만들어질 것 같아? 전혀 아니야. 창의성이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야. 자연과학의 세계에는 정치가 없을 것 같지?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이론을 만들 때는 누구나 상상할 수 없는 저항에 부딪혀.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가 학계에서 매장당하는 경우도 많아…창의적이 되려면 당연히 용기가 필요해…”
‘선’을 넘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점차 창의성이란 결국 선을 넘는 용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선을 넘지 못하는지 근원을 찾다보니, 우리 사회의 한계도 알게 된 셈이죠. 선을 넘는 사람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 선은 넘는 사람의 특이함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창의성 또는 노벨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규범을 의심할 줄 모르고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남에게도 해를 끼치지만 자기 자신도 해를 입습니다.
교리는 딱 한가지뿐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규범은 모두 지켜져야 한다는 세계관을 상상도 못할 불관용적 태도와 끝없는 불안을 낳습니다.
우리나라 가정이 불행한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남자애들이 결혼 전까지 너무 착한 게 문제입니다. 다들 일찍이 자기 공간을 포기하고 엄마 말을 너무 잘 듣는다는 거죠. 결혼 전까지 엄마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다보니, 나중에 엄마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하에 없는 착한 내 아들이 여우 같은 년을 만나서 괴물이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