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2. 한홍구. p320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모든 사회적 문제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사람들이 지워버리려 애쓴 기억들을 되살리는 날이 선 글들이었기에 몇몇 독자분들은 1권을 읽고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라는 항의 편지를 보내 주시기도 했다.
지뢰밭 같은 금기투성이의 현대사 속을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글을 써내도…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__그 감춰진 역사
베트남 파병 “경제적 이득”에 의문?
흔히 베트남 참전이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전쟁이라는 불행한 기회를 틈타서 경제적 이익을 따지는 발상도 몸서리쳐지지만, 백 보를 양보하여 계산기를 두들겨보더라도 한국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베트남전을 통해 한국은 10억달러에 조금 못 미치는 ‘경제적 이익’을 얻은 반면, 연 인원 30만 명을 파견하여 5천 명의 사상자와 1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2만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피해와 민간인 학살이라는 멍에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벌어들인 10억달러가 한국의 경제발전에 요긴하게 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투병력 대신 지원병력 위주로 우리보다 훨씬 적은 인원을 파견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 대만 같은 나라들이 우리보다 적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일본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 큰 ‘경제적 이익’을 보지 않았던가?
만일 박정희가 민족주의자였다면, 그리고 『월남망국사』을 읽으며 베트남의 불행을 남의 일로 보지 않았던 민족적 지식인들의 기억을 조금이라고 물려받았다면, 그는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베트남의 전장에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제 나라 젊은이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 찢어지던 전화를 기억합니다
김 상사님,
지난 3년간 진실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박정희, 양지를 향한 끝없는 변신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 첫 번째는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 광복군에 들어간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_남자의 변신은 무죄?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그는 왜 만주로 갔는가.
박정희 자신은 만주행의 동기를 “긴 칼 차고 싶어서”라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국제정세에 아둔한 박정희?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미국과의 연계만이 자신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미국을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핵개발을 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뿐이다.
독재정권이 더 악랄했다_서대문 형무소, 일제의 만행만 기억할 것인가
일제도 펜과 종이만은 빼앗지 않았다.
그의 수많은 옥중시들은 우유팩 위에 나뭇가지나 못조각, 손톱으로 꾹꾹 눌러 쓴 것. 김남주는 이렇게 깨닫는다. “아, 그랬었구나/ 로마를 약탈한 민족들도/ 약탈에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기는 했으되/ 펨과 종이는 약탈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보에티우스 같은 이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쓰게 되었구나”라고…감옥을 보면 사회가 보이는 법이다.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_강제전향의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 ‘비전향 장기수’
‘내면의 자유’를 지킨 최전선 투사들
김일성이 가짜라고?
항일영웅으로서의 김일성의 명성은 식민지 조선의 특수 상황 속에서 다분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 과장된 명성은 조선의 대중에게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널리 알려졌지만, 서구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에게는 생소했다. 그러나 분명 김일성은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는 다시없는 영웅이었다. 대중의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기대는 너무나도 컸다. 해방된 조선에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일제를 무찌르던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업적을 의심하거나 그는 비난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미완의 ‘아리랑’을 위하여_잊혀진 혁명가 김산의 자취를 찾아서
‘아리랑’의 최후를 아는가_김산의 발자취를 찾아서
군대의 역사, 병역기피의 역사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40여개 국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가혹하게, 우리나라처럼 철저하게, 우리나라처럼 많은 인원을 처벌하는 나라도 없다…과연 우리가 지켜야 할 나라가, 자신의 양심 때문에 도저히 총을 들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엄벌해야만 하는 그런 그악스러운 나라여야 하는가?
거지 중의 상거지, 해골들의 행진_이승만과 우익청년 테러집단의 ‘국민방위군 학살 사건’
인민군에 빼앗기기 않기 위하여…국민방위군의 예산 유용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말이 훈련. 훈련을 빙자하여 마을에 가서 재주껏 빌어먹으라는 것이었다.
‘녹화사업’을 용서할 수 있는가_프락치짓까지 강요한 가장 비열한 국가범죄
박정희 정권 때는 그래도 순진했다. 전두환과 보안사
인민군도 무작정 처벌 안 했다_다시 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
쇠사슬에 묶인 학원, 그리고 지식인
교육열이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대학시험이 썩어빠진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공정성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팔자가 필 수 있다는 신화, 바로 그 신화가 이 불합리한 교육열을 지탱해온 비결의 하나였다.
학교가 원래 니꺼였니?_’개인왕국’으로 전락한 비리사학의 역사적 뿌리
현재 사립학교의 학교 운영비를 보면 중·고등학교의 경우 재단 부담금이 2%에 불과하고, 사립대학은 6%애 머물고 있다. 사립학교의 운영비가 실질적으로 등록금이나 시민들의 혈세에 의해 조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립학교들이 개인의 소유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학 코미디? 시국선언을 막으려고 교수들을 아침 일찍 출근시켜 교정을 뛰게 했던 조선대 박철웅 총장.
이젠 개천에서 용 안 난다_대학입시, 갈수록 약화되는 계층 이동의 기능
역사를 통한 세상읽기
의열단…테러?…그러나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자각이 미운놈과 더불어 사는 지혜와 관용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신문고는 원래 ‘폼’이었다_군대 시절 소원수리 떠올리게 하는 청와대 앞 대고각
‘불도저’와 ‘두더지’를 아십니까
모든 변화는 불도저라 불리는 김현옥이 시장으로 있을 때 일어났다. 와우아파트가 우르르 무너지면서 김현옥은 물러났지만,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땅 위를 평정한 불도저 김현옥의 뒤를 이은 양택식은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답게 지하철을 놓고 웬만한 네거리에는 지하도를 파서 보행자들을 땅 밑으로 밀어넣으면서 서울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서울, 40년 전부터 만원이었다_서울 ‘변천사’에 대한 서울 토박이의 넋두리
서울은 만원이다. 이미 40년 전부터 서울은 공동묘지까지 만원이다. 서울은 우리가 걸어온 압축적 근대화가 가장 압축적으로 집약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