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강헌. p357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All art constantly aspires towards the condition of music.” – Walter Horatio Pater(1839~1894)
20세기 이후 인간의 일상에 음악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은 거의 없다.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도 음악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수많은 예술 중에서 음악만큼 신비화의 추앙을 받은 예술도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기나긴 인류의 음악사 속에서 시대와 지역, 장르를 넘어 어떤 특수한 음악적 현상이 이끌어내는 특별한 역사적 장면을 주목하고자 했다. 과연 어떤 동기와 역학이 음악사적 진화의 도약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정치경제적 요소와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게 되는지는 살펴보고자했다. 이 책의 표지에 실린 ‘music in history history in music’은 바로 그런 의도를 담은 말이다.
마이너리티의 예술 선언_재즈 그리고 로큰롤 혁명
재즈와 로큰론, 그것은 노예의 후손이 하층계급 아프리칸 아메리칸과, 한 번도 독자적인 자신의 문화를 갖지 못했던 10대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화적 권력을 장악한 혁명의 다른 이름이다.
재즈는 무엇일까
똑같은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음악인데 클래식과 재즈는 무엇이 다를까.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미국 뉴욕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클래식과 재즈의 차이를 굉장히 명확하게 말했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을 사실 클래식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내가 볼 때 클래식은 그냥 ‘엄격한 음악’이다.”
작곡가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가능. 절대 그 틀을 벗어나서는 아 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야외에서 청바지를 입고 연주하는 건 봐줄 수 있지만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야 하는 부분을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하면 절대 안 된다. 이렇게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 그것을 클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클래식은 번스타인이 말한대로 엄격한 음악인 것이다.
그에 비해 재즈에는 그런 엄격한 규칙이 없다. 악기부터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정해서 연주하면 된다. 심지어 똑같은 연주자가 오늘 연주한 곡과 동일한 음악을 다음날 다르게 연주해도 된다.
재즈는 규칙으로부터 자유롭다. 과연 자유로워서만 그럴까? 사실은 전날 연주했을 것을 기억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악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손님들을 더 ‘꼴리게’ 만들 수 있는 음악이 필요했던 것. 그래서 내가 ‘재즈’란 말을 우리말로 ‘꼴림’이라고 번역하려 했던 것이다.
스윙이 시작되자, 흑인들이 정말 힘들게 만들어놓은 것을 백인들이 다 빼앗아간다. 그래서 스윙 시대 최고의 스타 밴드들은 다 백인들로 이루어졌다.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의 단원도 트럼펫을 부는 딱 한 명만 흑인이고 모두 백인이었다…이때부터 흑인들이 음악을 만들면, 백인들이 그것을 가져가서 돈을 버는 구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나중에 로큰롤도 그랬고, 1970년대 전 세계를 뒤엎은 디스코 역시 흑인 게이 공동체의 문화였지만, 결국 이것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비지스와 존 트라볼타..
혹시 여러분이 재즈를 듣다가 문득 …농장에서 어떤 흑인 노예가 하늘을 향해서 뭔가를 부르짖는 듯한 소리가 느껴진다면, 그 순간 재즈는 온전히 여러분의 음악이 된다. 싱커페이션이 어떻고, 임프로비제이션이 어떻고, 오프비트의 4박자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다 필요 없다. 그런 이론적인 것은 재즈가 아니다…재즈는 그런 게 아니다.
흑인 노예가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던 소리인 필드홀러는 당연히 음악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절망의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재즈에는 바로 이것이 들어 있다.
재즈는 평등하다? 악기들 모두가 동등. 록밴드의 철학이며 이것은 명백히 재즈로부터 물려받은 행위.
똑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누구는 재즈보컬리스트, 누구는 팝 보컬리스트? 그 차이는? 재즈와 팝 보컬리스트를 나누는 기준은 딱 한 가지다. 자신을 연주자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가수는 재즈 보컬리스트라 칭한다.
재즈와 로큰롤의 역사? 결국 마이너리티가 문화의 주인이 되었다.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_통기타 혁명과 그룹사운드
‘가요’라는 말을 절대 쓰면 안 된다.
가요라는 말은 한국 대주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 아니다. 국민가요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트로트를 지칭하던 한국어는 유행가였다…미나미 총독에 의해 국민가요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이것이 전국에 강제적으로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민가요라는 말이 너무 길어너, ‘국민’이 빠지가 ‘가요’가 된 것이다.
한대수 「자유의 길」 금지곡. “자유의 길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가사 바꿔!”…풀려나간 앨범을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전부 수거하고, 앨범을 만들었던 신세기음향에 있던 마스터테이프까지 압수하여 남산 대공분실에서 산산이 때려부셨다. 그래서 이 앨범은 지금 한 장에 100만 원이 넘는다. 그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귀한 앨범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 21세기 초의 한국 대학 그리고 청년 엘리트들은 살인적인 생존경쟁에 휘말려 더 이상 문화적 대안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 앞 세대의 유산과 그것의 정신을 계승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의 ‘88만원 세대’로 요약되는 청년세대의 위추그 대학의 정신적 황폐화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대학은 더 이상 사회의 비판적 시각의 담지자로서의 소명을 폐기하고 매스미디어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주류문화에 무장해체되고 흡수합병되었다.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_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천재학자들의 공통점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딱 한 줄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인문학자가 말년에 모차르트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 못 끝내고 죽었다.
“그는 천재도 아니고, 신동도 아니다. 그는 ‘궁정 사회의 시민 음악가’였다.”
이것이 그의 본질이고,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거리는 겨우 14년. 이 14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굉장히 많은 것이 뒤집어졌다. 이번 장의 핵심은 “이때 뒤집어진 것들이 무엇이며, 그것을 뒤집은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니, 왜 귀족들은 나를 그들과 같이 인정해주지 않는 거야?’
어쩌면 모차르트에게 계몽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인문학적 이해가 있었더라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절대로 이 궁정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간단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최후의 비극은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규범화시킬 이념이 없었다는 점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예술가적 존재를 빈의 궁정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같은 것을 꿈꿨지만 둘은 다른 삶을 살았다. 모차르트의 비극은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시대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살았던 시대가 달랐다. 비록 14년밖에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는 확연히 달랐다.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한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짧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언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을 규정하는 말 중에 나는 롤링 마뉘엘의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기술science에서 의식conscience으로 만든 사람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파괴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권능이 베토벤과 베토벤 시대에 생겨났다. 모차르트가 빈에 다다른 1781년부터 베토벤이 빈에 묻히게 되는 1827년 사이에 서구의 음악사는 다시 새로운 거대한 반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 두사람은 인류 음악사상 가장 거대한 전복의 드라마를 기술한 인물이 되었다.
두 개의 음모_ <사의 찬미>와 <목포의 눈물> 속에 숨은 비밀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현해탄의 동반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센세이셔널리즘과 함께 극적으로 개막한다. <사의 찬미> 신드롬의 배후엔 일본 제국주의 음악 자본의 음모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신드롬을 징검다리로 하여 일본의 엔카 문화는 1935년 <목포의 눈물>을 통해 한반도 상륙을 완료했으며 엔카의 한국 버전인 트로트는 최초의 주류 쟝르로 등극한다.
전복과 반전으로서의 음악 문화사.
이상하게도 20세기 이후 우리의 역사는 너무 많은 대목들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 그래서 지난 100년간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굉장히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이 혼돈 속에 빠져 있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알겠지만, 오늘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가 끊임없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시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치열한 접전지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20세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날을 묻는다면, 나는 1949년 반민특위의 좌절을 꼽겠다. 왜냐. 나라는 빼앗길 수 있다. 전쟁에서 지면 식민지가 될 수 있다…중요한 것은 다시 나라를 되찾았을 때, 그 이전의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우리의 반민특위 좌절이 똑똑히 가르쳐준다.
음악 문화의 역사. 그것이 그저 순탄한 역사적 이행과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기획된 음모의 역사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의 전복과 반전의 역사이다.
명성황후, 아니 민비의 진실.
갑오농민혁명 진압.
뮤지컬 「명성황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곧 자신의 나라의 백성을 죽이기 위해 강대국에게 파병 요청을 하고 강산을 피로 물들였으며, 결국 그 강대국의 정치 깡패들에 의해 타살당한, 한마디로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를 단지 일본에 의해 참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나라의 국모로 묘사한다는 것에 경악을 금지 못했으나 흥행에는 크게 성공했다.
민씨 일파에 의한 매관매직이 온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도저히 함량미달의 목민관이 관직을 차고 앉아 백성들을 짐승같이 수탈. 더이상 견딜 수 없던 민중들이 봉기한 것이 동학농민혁명.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바로 족벌 민 씨 일가의 수장인 민비였다.
다이나믹 코리아. 최소한 5000번의 민란.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은 그 이전에 일어난 민란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인내천, 사람이 하늘, 상민이든 천민이든 누구나 임금이라는 말. 개벽!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명확한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식민지 경험을 가진 수많은 국가 중의 하나이면서도 서구에 대해 열렬한 추종자가 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서구가 아닌 이웃나라 일본에게 식민 지배. 서구는 증오가 아니라 구원과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홍난파, 사대주의적 맹종의 시작.
“우리의 전통음악은 미개한 음악이므로 빨리 버려야 한다…서구 음악을 우리의 것으로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본디 음악이란 선율과 리듬과 화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의 음악에는 선율과 리듬은 있지만 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서양음악의 규칙일 뿐이다.
1980년대 신문 자료를 보면 나온다. 풍물패. 자국의 전통문화를 배우면 불온해지고, 그걸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를 기소한 나라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교육이 서양음악만을 음악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하물며 우리 것이라고 하더라도 불온한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다.
김유진과 윤심덕 동반자살과 <사의 찬미> 대박. 타살의 심증들. 기획 자살
1935년 <목포의 눈물> 공식 판매량 5만장 돌파. 식민 30년 동안 엔카 반복과 학습 과정. 당시 대중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것. 이것은 이제 식민지 지배 아래 한 세대를 통과하면서 일본 엔카의 음악 문법이 우리 속에 내면화되었다는 굉장히 슬픈 이야기이다.
갑자기 노태우 정권 시대에 이르러 트로트를 전통가요란 이름으로 방송에서도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
1984년 『음악동아』 11월호에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굉장히 자극적인 기사를 하나 기고. 「누가 뽕짝을 우리 것이라 우기느냐」
‘황국신민의 노래’라는 뜻의 국민가요
<감격의 시대>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하지만 이 노래는 난징의 함락과 황군의 연승을 축하하는 노래.
해방 50주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이상한 나라에서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홍난파와 현제명 그리고 식민지성의 청산
진짜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현제명. 당시 일제에 부역한 지식인들 가운데 백번 양보해서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제명은 달랐다. 그는 확신범이었다….노골적으로 전국과 온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징병을 독려했던, 본격적인 친일파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한국음악계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걸까….미군정의 조선 접수. 아베 총독의 인수인계. 영어 가능 전문인력 명단 추천. 서울대를 종합대학으로. 자신은 예술대학 음악부장. 다른 과는 차치하더라도 예술대학이 종합대학으로 들어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술가가 되는 것과 학문을 하는 것이 같은가. 해방 이전부터 경성에는 남산음악학교라는 전문적인 음악교육기관이 있었다. 이것을 종합대학, 국립서울대학교 안으로. 이게 한국의 교육을 아주 망치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기형적인 근대 음악 문화.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가 꼭 해결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제이자 예술적 과제인 ‘식민지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만드는데 지금 이 순간까지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20세기 한국 근대음악사의 불행한 전복이자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불한당들의 미국사』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번스타인의 음악론』
『모차르트-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베토벤 평전-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