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p301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사적 영역으로 위축되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미국의 정치 문제가 수많은 사람에게 너무 광대하고 복잡하며 일상의 뿌리에서 매우 멀어서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일입니다.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기억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첫째, 이른바 “정치 뉴스”를 숨 가뿐 속도로 광범위하게 보여줌으로써 결국 우리의 무력감을 자아내는 대중매체에 우리가 저항해야 한다는 점입니다…이 책에서 핵심으로 담고 있는 두 번째 간청…우리 국민은 많은 쟁점에서 언제나 이견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자유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자, 그 위대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견을 드러낼 때 더 좋은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든 그것이 살아남는 데 근간이 되는 “마음의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제가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기”라고 부르는 마음의 습관 말입니다. 일상생활의 장소들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될 수 있는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은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인프라를 구성합니다. 그것이 건강하게 유지·보수되어야 민주주의가 잘 작동합니다.
#역자 서문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질 때, 체념하지 않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엄습하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맹목적인 집단 숭배에 열광하거나 사적인 안위와 소비주의에 탐닉하지 않고, 내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응시해야 한다.
그래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서져 흩어지는broken apart’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이 요구된다.
선악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애매함’과 ‘긴장’을 끌어안아야 한다.
어둠의 시간, 눈은 보이기 시작하네. – 시어도어 로스케, 「어둠의 시간에」
9·11 테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마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폭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적어도 그만큼의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링컨의 연설. 그는 남과 북을 “나쁜 놈”과 “좋은 놈”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했다. 만약 그렇게 나누었다면 우리는 거의 국가적인 자살에 이르렀으리라. 어떠한 차이든 극복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서 정치적 긴장을 끌어 안는 것에 대해 링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근본 신념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상대방을 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아는 만큼 보인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리)
정치란 권력을 사용하여 삶에 질서를 함께 부여하는 행위로서, 심층적으론 하나의 인간적인 기획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두 가지 이유로 환호한다. 하나는 그것이 다양성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세 가지도 필요없다. – E.M. 포스터,『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환호』
생물의 다양성 덕분에 생태계는 보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이 될 수 있으며, 변화에 잘 적응하고 스트레스에도 잘 견딜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이런 단일 경작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것은 대지의 생명력을 떨어뜨리고 음식의 질과 음식 공급의 지속가능성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존 울만 이야기. 마음이 부드러울 때,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는 더 커다란 능력으로 “깨져 열릴” 수 있다.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다는 것…결정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오는 조급함이나 다양한 의견의 충돌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무지 속에서 결정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
정의를 위한 투쟁의 핵심 요소는 잠깐 동안만이라도,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동안이라도 한 걸음 나서면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작고 비영웅적인 행동들이 불쏘시개로 쌓여나가다가 어떤 놀라운 상황에서 격렬한 변화로 점화될 수 있다.(촛불혁명!)
부서져 열린 마음은 자비심만이 아니라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택시기사의 가르침? 대중을 알아야 해요. 거기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운답니다. 대중을 알지 못한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생각을 나누면서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니까요. 꼭 학교에 다니는 거 같아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면 도움이 되지 상처가 되지은 않아요.
활력 있는 공적인 삶은 민주주의의 열쇠다(공간 역시! 사랑방)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왜? 우리의 비전을 복잡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생각들을 뿌리채 뽑아버리며, 독실한 믿음을 깍아내리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성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관용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도록 강요하면서까지 우리의 이해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아침 신문에 실린 소식들이 닿지 않는 방, 또는 그런 시간이나 그런 날이 당신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뉴스를 찾아 내면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가 민주주의를 좌우하는 질문들이라고 부른 것들을 품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내면의 교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서로에게 조언을 하는 대신, 우리는 상대방을 경청함으로써 그가 더욱 깊은 대화 속으로 들어가고 자기 나름의 내적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던진다.
쓰이지 않은 마음의 역사
부고 기사가 아무리 길고 자세하며 표현이 풍부하다 해도 언제나 인생의 본질은 빠뜨린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지나온 마음의 역사다.
세상의 중심에는 쓰이지 않은 역사가 있다. 역사가들은 보이는 움직임에 대해 쓴다. 인구의 움직임, 문화적 인공물 그리고 테크놀로지, 자연자원과 돈, 군사력과 정치권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릴케가 상기시켜주듯이 “보는 것에는 경계가 있다.” 세상을 빚어내는 더 깊은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충동이다. 시장을 움직이는 희망과 탐욕, 군대를 일으키는 사랑과 증오, 권력을 자극하는 창조 또는 통제의 욕망 등이 이에 해당된다.
비극적 간극 속에서 희망을 갖고 행동하라
개인적·정치적 삶에서 우리가 끌어안아야 하는 모든 긴장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도전적인 것은 “비극적 간극”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견디고 행동하는 것이다…우리가 비극적 간극 속에서 오랫동안 희망을 가지고 견디며 행동하려면, 단지 ‘효율성’을 성패의 궁극적인 척도로 삼을 수 없다. 우리는 효율성보다 높은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충실함이라는 기준이다. 우리는 자신이 의지하는 공동체에 충실한가? 절박한 필요에 대응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가? 우리 본성의 보다 선한 천사들에 그리고 그들이 우리 안에서 불러내는 것에 충실한가?..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낮아도 공공선을 증언하라는 용기의 부름에 충실한가? 충실함이 우리의 기준이 될 때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과업에 계속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의를 실현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사랑스러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공이산, 변화는 ‘비효율적’으로 온다?!)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완전히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자기 안에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한 빛뿐만 아니라 깊은 어둠의 유산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오직 상상 속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 평화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의를 계속 꿈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