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이국운. p184
#헌법 묵상
‘나는 누구인가?’
세월호 사건.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스스로 귀중하게 취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와 본질을 궁금해하는 경향이 있다.
2016년 가을,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이게 나라냐?”
누구에게 던지는 질문인가.
결국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현존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이다.
자유시민들의 공유된 말.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하는 말을 우리는 흔히 법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현존을 통치자 앞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법률로만 구성된 세상일 것이다. 통치자는 법률로 말하고, 시민들은 그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
서로에게 말할 자유가 있고, 통치자에게 말할 자유도 있다. 이때의 말할 자유는 당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말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고, 정치공동체의 현존을 표상한다는 통치자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 말없이 복종하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정치가 아니다.
헌법은 근본적으로 자유 시민들의 말이다. 자유 시민들이 서로에게 한 말이며, 또 통치자의 말 즉 법률에 맞서서 한 말이다.
자유 시민들의 공유된 말, 그것이 바로 헌법이다.
듣고, 생각에 잠기기
불의한 통치자에 맞서서 광장에 남겨놓은 자유 시민들의 공유된 말. 바로 그것이 헌법인 까닭에 우리는 헌법을 생각할 수 있다. 아니 더 깊이 들어가 헌법을 묵상할 수 있다…공유된 말, 즉 누군가에게 말하게 하려고 먼저 걸어온 말이기 때문이다. 헌법은 타자에게 말 걸기이다. 그 말을 먼저 듣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유된 말을 헌법에 추가하는 작업은 헌법 묵상을 거친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으리라.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두 문장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누가 말하는가
헌법의 주어는 ‘우리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 대한국민’이다.
우리 대한국민이야말로 헌법 1조를 말하는 주체이다.
“우리 대한국민이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누구에게 말하는가
헌법의 주어를 찾았으니, 이제 수화자, 이 두 문장의 상대방을 찾아야 한다.
헌법 1조의 두 문장은 그와 같은 역사적 상상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 만한 정치적 에너지를 참축하고 있다. 이것이 헌법 1조의 힘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 대한국민’의 자유
탈출의 자유
똘레랑스의 자유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율은 독립을 전제하고, 조화는 타자를 전제한다.
#똘레랑스는 어디서 오는가
똘레랑스란 바로 이 몸에서 출발하여, 오직 그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신과 불화하려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주권인가, 헌정권력인가
신성한 몸들.
헌법 제 1조의 첫 문장은 비유컨데 ‘우리 대한국민이 대한민국의 왕이다!’ 라는 문장으로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대한국민 가운데는 더 이상 왕이 없다!’는 문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읽을 때에만, 탈출-광야-똘레랑스를 잇는 자유의 순차적 누적이 오롯이 살아날 수 있다.
’우리 대한국민’과 ‘대한민국의 국민’
‘We the Korean People’
마땅히 영어의 ‘people’에 해당하는 ‘인민’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의 이념적 상황 때문인지 헌법은 한사코 국가 내적 개념인 ‘국민’을 고집한다.
#민주공화국
민주의 프로젝트.
동일자 중심의 경향성이 노정되는 순간 우리 대한국민의 자유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 대한국민은 안으로부터 분열되며, 그들의 자유는 단지 고립된 개인들의 소유적 욕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 프로젝트는 우리 대한국민이 각자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서오 자유로, 상호간의 평등으로 나아가면서, 자유인의 동등함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기획이다.
자유인의 동등함을 정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민주’라는 한 단어면 충분하다.
똘레랑스의 자유는 살갗의 윤리에서 출발한다. 똘레랑스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적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갗의 윤리로부터 민주주의를 스스로 요청하기 때문이다.
똘레랑스의 자유의 이름으로 신성한 몸의 경계선을 받아들인 우리 대한국민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비지배-자유가 자리 잡는다.
자유와 권력의 미묘한 결합
적극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결탁은 우리 대한국민을 번민하게 만든다. 우리 대한국민이 만든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은 스스로를 신성한 몸으로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그 범위를 끝없이 확대하고 팽창시키려는 욕망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공화의 논리
자유와 평등, 자유와 민주의 모순적 길항관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민주공화국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서부터 민주공화국 프로젝트는 자유의 프로젝트와 민주의 프로젝트를 넘어 공화(共和)의 프로젝트가 된다. 그 출발점은 자유와 평등, 자유와 민주의 모순적 길항관계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처음부터 다시
이와 같이 재구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프로젝트의 뜻을 깊이 이해하는 헌법적 시민들의 역량이다.
#대한민국 프로젝트 1 – 1948년 헌법
미완의 프로젝트
#에필로그
법학 공부 30년.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법학의 독특한 문체였다. ‘개념을 통한 계산’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법학은 객관적 글쓰기를 정상적으로 전제한다. 하나의 개념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여야 하고, 어느 경우에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석되는 문장이야말로 바람직한 문장이라는 것이 법학의 금과옥조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게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나는 법학의 독특한 문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생각하는 주체인 나 자신이 말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동일한 느낌은 법학의 문장들이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식별하기 어려울 때도 드러났다. 실제로 법전이나 법학 교과서의 문장들은 말하는 주체를 생략하거나 감추는 경우가 태반이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은 채 보편적 명제로 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비판법학자의 진로 선택? 영혼없는 글쓰기에 가담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분들이 요구하는 자기 검열을 수용하는 대신 일인칭 단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문체반정을 계속해왔다. 비판법학자로서 나는 법학의 독특한 문체 배후에 일인칭 단수를 질식시키고 상대방을 도외시하는 권력의 글쓰기가 있음을 폭로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 헌법이 주어를 가진 문서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했듯, 대한민국 헌법의 주어는 전문에 등장하는 ‘우리 대한국민’이다. 우리 헌법은 그 주어의 발화로 읽고 해석할 때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