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음. 나카지마 다케시. 253
그 문명은 비문명. 선한 것은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것.
#간디는 욕망에서 자유로웠을까?
변함없는 내 지론입니다만, 인도는 영국인이 아니라 근대 문명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인도는 근대 문명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자치는 우리 마음의 지배입니다.
“나의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 My life is my message.”
간디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전할 수 없었던 메시지란 무엇이었을까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메시지와 어떻데 마주하면 좋을까요?
그 순간, 역사가 움직였다
당신은 기계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가?
‘소금 행진’. 서양의 지배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한 것은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간디는 정치가라는 틀과 종교인이라는 틀을 모두 다 훌쩍 뛰어넘은 특이한 존재였습니다….“간디는 간디다”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면면이 그에게는 있습니다.
간디는 근대 산업사회에 의문을 표시했고,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이상적 모습에서 가치를 찾아냈습니다. 그중에서 그가 주목했던 것은 1년에 넉 달이나 되는 ‘농한기’입니다…이런 여유 있고 느긋한 시간은, 가혹한 자연 조건이 인간에게 부여한 일종의 은혜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간디의 신앙은 지극히 ‘재귀적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재귀적’이라는 말은 어떤 사고나 행위를 객체화하고 난 뒤에 그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의사가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그의 신앙은 근대적이고 재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간디라는 인물을 고찰할 때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간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문명은 비문명입니다”
비폭력과 불복종으로 가는 길
당신은 비폭력을 관철할 수 있는가?
간디라는 한 인간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는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폭력’과 ‘불복종’입니다.
“비폭력은 폭력보가 훨씬 더 적극적”
간디는 틀림없이 부정형으로 말하는 것, 부정의 적극성에 주목합니다. ‘OO해야 한다’라는 주장 속에는 아무래도 ‘힘의 논리’가 들어가게 되고 상대에게 불문곡직하고 무언가를 강제·강요하는 폭력이 수반되고 맙니다. ‘내가 주장하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교만함이 ‘해야 한다’라는 당위의 논리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OO이 아니다’의 논리에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있습니다.
폭력이란 일종의 욕망의 발로입니다.
나는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사로움이 없는 행위라고 확신합니다…사사로움이 없는 행위는 ‘아힘사’보다 더 뛰어납니다.
의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간디의 눈에는 의회의 구성원인 국회의원들이 위선자요, 이기주의자처럼 비쳤습니다. 의원들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 행동을 벌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과 매스미디어의 열광으로 인해 크게 좌우되어, 참된 정의가 실현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 선거인의 성서는 신문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선거인은 그 신문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결정합니다. 신문을 정직하지 않습니다…그 사람들은 한 순간 한 순간 자신의 생각을 바꿉니다. 7년마다 색깔이 달라집니다.
참된 자치란 무엇인가?
나에게 본래 주어진 한계에 따라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자치는 우리 마음의 지배입니다.
간디의 눈에, 인간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늘 모종의 문맥에 그 위치가 설정된 존재입니다.
스와라지. 일반적으로 ‘자치’니 ‘독립’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간디에게는 ‘스와(자기)’ ‘라지(통제’), 다시 말하면 ‘자기 통제’인 것입니다.
‘자기 통제에 바탕을 둔 공공성’이야말로 간디가 생각했던 바로 그 ‘스와라지(자치)’였던 것입니다.
“중앙 집권적 국가의 의회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이익을 위해서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당리당략을 앞세운다.”
상생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인간은 ‘꼭 네가 아니고 어느 누구라도 무방하다’는 식의 대체 가능성에 위협을 받으면 존재의 근거가 흔들리고 맙니다.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로서 사회 내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실감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가는 토대’가 무너지게 됩니다.
‘역사’란 부자연스러운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사티아그라하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간디에게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특이한 사건의 나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는 상황을 암묵적으로 이끌어온 것, 바로 그것이 역사이고 우리의 언어와 사고 양식, 전통 등 일상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은 ‘역사’가 관습을 매개로 옮겨온 빼어난 지혜입니다.
‘이렇게 된’ 것을 이끌어온 것이 바로 역사. ‘역사’는 현재 우리들이 존립하고 있는 근거입니다.
(이것을) 납득한다면 우리는 곧바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디에게 사티아그라하는 항상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납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 맞아!’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티아그라하의 실천이 될 수 없습니다.
“무기의 힘보다 자비의 힘이 더 강력합니다”
달팽이처럼 나아가라
“선한 것은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것입니다.”
홀로 걷기.
최근 정치. 내가 늘 의심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조 개혁’이니 ‘근본적 개혁’이니 하는 것입니다. 손쉽고 재빠르게 자신을 선전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싶은 정치가들은 “중앙 정계를 깡그리 부숴버리자”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습니다. 하지만 개혁과 같은 일들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질 리 만무합니다…세계는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극단적인 개혁이나 혁명 같은 것은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따름입니다.
앞장의 되풀이가 될 테지만, 간디는 근대의 ‘속도’를 근본적으로 의심했습니다. 그는 본래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물과 사람이 서로 왕래하는 산업 사회에 등을 돌리고 평온한 농촌에서 물레를 돌리면 논두렁길을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그는 철도의 존재에 의문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 역시 ‘근대는 지나치게 빠르다’는 실감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달팽이처럼 조금씩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망의 두 얼굴
당신은 성욕을 버릴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은 정말로 간디주의를 견뎌낼 수 있을까요?
여기서도 채식이라는 간디의 행위는 재귀적인 것입니다. 욕망의 억제라는 그의 행위는 모두 그의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철도도, 변호사도, 의사도 필요없다
“인간은 자신의 손과 발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왕래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자치는 우리 마음의 지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금욕’과 ‘자유’가 간디에게는 똑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자유’는 묵티Moksha’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해탈’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불교에서는 ‘열반nirvana’입니다. 욕망에서 해방됨으로서 인간은 자유자재한 경지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더 큰 만족’. 간디는 ‘더’를 부정합니다.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비의 확대? 간디라면?
“가난한 인도는 해방되겠지만, 부도덕을 통해서 부자가 된 인도는 결코 해방될 수 없습니다.”
간디의 가족은 행복했을까? 가족의 일원으로서 고통을 강요받았다는 점에서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
당신은 ‘실험’을 계속할 수 있는가?
급속한 변화로 말미암아 욕망의 비대화가 초래한 사회는 반드시 사람들의 정신에 왜곡과 스트레스를 야기합니다.
불이일원론. 생명이 모두 연결. 제각각이면서 함께이고, 함께이면서 제각각인. (따로또같이!)
간디의 ‘물음’을 생각하다
단식과 단식투쟁은 어떻게 다른가? 차이라면 정치적인 요구가 수반되느냐 아니냐.
이론과 현실 사이에 낀 모순. 하지만 간디는 그걸 견뎌냈어요.
다시 말하면 ‘하고 있는 일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살아가는 기술’을 실천하는 거. 그런 의미에서 종교란 ‘방법’이라는 말이 맞는 말.
그 점이 대단히 중요. ‘세상사에는 대개 두 측면이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정리해버릴 수 있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지만 그렇게 정리를 할 수 없습니다…원리주의가 실현되면 세상은 무의미해지고 말 거예요..그렇게 되면 문제는 ‘모순’을 어디까지 견뎌낼 수 있느냐?’가 됩니다.
저는 이번에 간디라는 인물에 관해서 조금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요. 이 ‘모순’이라는 점이 가장 재미었었습니다. 사상과 실천, 종교와 정치라는 이런 이항 대립이 여러 측면에서 모순되고 있는데, 그게 재미있어요…모순 통합…그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시대 인도에서 해냈습니다.
간디는 자신의 인생을 ‘실험’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실험’이라는 건 필시 그런 의미까지 다 포함한 것이겠지요. 그 자신이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에 실험을 했다는 점 때문에 저는 간디에게 매력을 느끼는 겁니다.
종교가도, 정치가도 아니다. 그냥 ‘간디는 간디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20세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도대체 그 힘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아마도 간디가 보낸 ‘물음’의 핵심일 것입니다.
‘메타 종교’는 공허한 논의?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이 간디의 뛰어난 면입니다.
간디의 탁월한 점은 걷고, 먹지 않고, 소유하지 않은다는 인간의 본원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 모순을 돌파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통정적 이념과 구성적 이념의 절대 모순, 유와 무의 절대 모순을 뛰어넘어 통합하는 길은 ‘행위’밖에 없습니다.
이론만으로는 안 된다, 행동하라!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 성불을 해서 부처가 되더라도 그 위에 또 위가 있다” “깨닫고 난 뒤에 다시 깨달으라” 그러니까 내내 멈출 수 없는 것이죠. 부처라는 것은 수행을 거쳐서 부처가 되려는 과정의 모습입니다.
휴식을 위한 기술. 그냥 쉬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휴식을 취하는 것에 무척이나 서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동물입니다…그냥 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것을 하도록 하는 기술이 바로 좌선입니다.
미국의 원시 교단 같은 집단 안에 들어가봤습니다….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공적인 공간 안에 갇혀 지내게 되면 성격이 내향적으로 변하고 성욕도 강해지는 느낌이 들지만, 어느 정도 생활이 엄격해지고 있는 그대로 자연 상태에서 마음이 느긋해져서 안정되면 욕망이라는 것이 약해지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욕은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기 쉽다
실천에 옮긴 금욕 중에서 그가 특히 고집했던 것은 성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간디에 관해서는, 특히 성욕 문제가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념이 물렀기 때문에 그것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
사랑을 몰랐던 간디.
‘나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똑같이 사랑한다. 너도 그 일부다’?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겠군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요.
불교 세계에서 ‘사랑’은 최고의 가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어떻게 보더라도 소유와 지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랑 위에 무언가를 더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이 바로 ‘경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될 수 없어요.”
역사를 들여다보면 ‘혁명가’ 가운데 행복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간디의 실험’은 가정에서 실패였던 겁니다.
자기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죠. 자기라는 존재를 일방적으로 부과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 때문에 부모라는 존재가 먼저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죠. 말하자면 자녀의 존재를 그대로 다 긍정해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근거가 부족하게 되고 이게 결여되면 인간은 아주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스님도 염불만 외지 말고 간디처럼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행동해가는 것이 앞으로 응당 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