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조정래. p427
#작은 디딤돌이거나…_작가의 말
올해로 문학 인생 40년이 되었다. 1970년 등단할 때 오늘이 이다지도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지난 20여 년 동안 꽤 많은 강연을 해왔다. 그때마다 독자(청자)가 아쉬워했던 것이 질문 시간 부족이었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어도 선택되는 사람은 서넛에서 너댓에 불과하니까. 어떤 독자들은 편지를 해오지만 거기에 일일이 답장을 쓰기도 어려웠다. 세 편에 걸친 긴 소설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은 많고, 그것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하는 것은 늘 미안한 심정으로 남았다.
그런대 참언론을 위해 어깨동무하고 나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사IN』에서 출판사를 차렸다는 것이다. 그분들의 일에 작은 보탬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한여름 더위를 무릅쓰기로 작정하고 펜을 들었다. 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사IN』 인턴기자 희망자들이 나에게 보낸 질문은 5백여 가지였다. 그 중에서 겹치는 것은 빼고,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을 간추린 것이 이 책에 수록된 48가지다. 이 육성의 질문들은 모든 독자의 궁금증을 푸는 데 그런 대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한 가지 욕심을 부리자면, 이 글이 앞으로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이나 삶의 벗을 찾은 젊은이들에게 작은 디딤돌이 되거나 미약하나마 한줄기 빛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문학과 역사의 상관관계는
소설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 탐구
‘소설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마음을 써서 답을 구하려 하면 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역사를 포괄한다.
이 두 가지 정리의 핵심은 ‘총제적인 탐구’와 ‘간추려진 기록’입니다. 그중에서 어떤 것이 더 포괄적이고 범위가 넓습니까. 더 말할 것없이 소설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등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작가는 역사를 몰라서는 작품을 쓸 수 없지만, 역사가는 문학을 몰라도 역사 연구를 할 수 있다.’
달콤하고 얄팍한 사랑이야기? 소설이 재미있는 오락거리이고 흥미로운 잡다한 이야기일 수 있는 것은 소설의 여러 가지 기능 중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소설은 1회용 반창고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작품은 그 작품을 있게 한 모국어의 자식들이다.’
다른 예술이 아니라 ‘문학 작품’은 모국어가 없으면 탄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학 작품은 자연히 그 모국어를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고,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국어를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같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진실’만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으며, 기득권을 향유하는 보수 세력과는 갈등하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진보적인 작가의 길은 조금은 성직자의 길이기도 하고, 조금은 철학자의 길이기도 하고, 조금은 개혁자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편할 리 없지만 보람 있고, 작품으로 감동적인 형상화를 이루어내면 독자의 박수갈채 속에서 그 생명을 오래 보장 받게 될 것입니다. 문학은 종교와 철학과는 다른 그 무엇일 것입니다.
‘논 아흔아홉 마지기 가진 놈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보고 팔라고 한다.’
‘외삼촌네 떡도 커야 사 먹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우리 인간의 삶과 속마음, 그리고 심리를 이처럼 응축시켜 실감나게 갈파한 금언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그 속담에는 수천 년에 걸치 우리 조상의 지혜와 슬기와 철학과 교훈이 영원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빼어난 속담 백 가지만 곱씹으며 살면 철학책 따로 읽을 것 없고, 삶도 실수 없이 바르게 살 것입니다.
바르고 굳센 민중성의 표상들
마음에 드는 주인공? 제가 뽑은 여섯 명의 주인공이 갖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미 그 점을 눈치 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르고 굳센 민중성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민중’이라는 추상성을 저는 소설을 통해서 그 실체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세 소설을 관통하는 세 가지 공통점 중의 하나가 ‘민중성’입니다.
알렉스 헤일리는 작품 『뿌리』가 갖는 의의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인에 의해 씌여진 달갑잖은 역사.’
그 기록에 흑인 노예를 억압하고, 학대하고, 유린하고, 착취한 사실이 진실하게 씌었을까요? 그들은 잘못을 철저하게 은폐했기 때문에 누가 나선 것입니까.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펜 하나를 들고 그 거짓의 기록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섰습니다. 그 필연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고 숙명입니다.
역사는 얼마든지 거짓으로, 가짜로, 위선적으로 씌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맞서고 도전해서 진실을 찾아내고자 하는 존재가 누굽니까. 작가입니다. 그래서 작가를 뭐라고 한다고 했다지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
백 번, 천 번 거듭해도 지나치지 않은 일깨움입니다.
취재일기.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국가보안법의 서슬은 전혀 변함없이 시퍼랬습니다. 그 서슬 아래서 사회주의 활동을 했거나 빨치산 투쟁을 했던 사람들은 전부 모습을 감추어 ‘지하의 생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해의 물고기처럼 어디론다 꼭꼭 숨어버린 그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난감하고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열에 아홉이 불쌍한 농민이었어요. 우리가 토벌을 하면서도 가슴 아팠지요.”
“잘못된 지주 소작제가 병이었지요. 토지개혁만 잘되었더라도 그 사람들 입산 안 했어요. 그거야 우리 눈앞에 빤히 보이는 문제 아닙니까.”
“농부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휩쓸렸다고 말하는 건 안 되지요. 하나밖에 없는 목숨 걸고 싸우는 게 무슨 장난인가요? 소작인이 학교 공부 못 배웠다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줄 아세요?”
그들이 무심코 하는 이런 말들은 귀가 번쩍 뜨이는 뜻밖의 수확이었습니다.
그 말들은 소설의 중추를 이루게 될 사회 갈등의 핵심이고, 그 원인 파악이면서, 명백한 입산 이유였습니다. 그 몇 마디 말은 사회과학 서적 어디에서도 찾아내기 어려운 진실의 무게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 시대의 연구가 전무한 상태였으니까요. 그리고 문학계에서도 분산서설을 평하며, ‘당시의 농민들은 무지해서 이념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저 강점적으로 휩쓸렸다’는 평론가들의 말이 정설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평을 볼 때마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게 아닌 것을 설득력 있게 쓰고 싶었지만, 중·단편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