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저는 항상 말합니다. 도(道), 즉 길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이죠.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있는 길을 찾아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죠. 이제 왜 제가 노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장자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읽는지 이해되시죠?
춘추전국시대라는 엄청난 혼란기, 제자백가.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면서 노자와 장자가 어떻게 자연과 조화라는 평화로운 이상향을 꿈꾸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생태위기의 해법? 무위자연의 노장사상?)
노자와 장자는 정말 현재 우리 시대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만능열쇠와 같은 철학자일까? 아니면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적 한계 안에서 사유한 철학자일 뿐일까?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것이 하지 못할 것 없는 만능의 힘을 통치자에게 줄 수 있다는 확신? 천하를 통일하려고 각축을 벌이고 있던 당시의 군주들이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천하를 취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 노자는 ‘무위’라는 특효약을 군주들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결국 노자의 무위란 단순히 유위라는 인위적인 노력에 반대해서 자연과 합일을 꿈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소박하게 자연과 벗 삼아 살면서 나무의 싹이나 이름 모를 꽃, 새와 더불어 대화하려는 이 시대의 도인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으로 노자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노자가 통치자인 군주를 위해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장자만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자연과 합일을 꿈꾼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노자를 읽으면, 우리는 전국시대를 호흡했던 노자의 진짜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자와 장자는 다릅니다.
그리고 두 사상가의 차이는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입니다. 보통 노자와 장자는 도가 사상가라 불리지요. 도라는 개념을 강조했던 사상가들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도가 만물을 낳는다’고 주장한 사상가와 ‘우리가 걸어가야만 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 사상가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소통의 철학자, 장자
모자장수의 깨달음. 모자가 필요없는 월나라에 모자 팔러 간 송나라 모자장수.
삶의 문맥. 성심(成心)? 특정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
명경지수!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허심(비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고착된 자의식 vs 임시적 유동적 자의식
보통 사람이나 사변적 지식인은 미녀와 만나서 생긴 의식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아 추녀와 만날 때도 적용한다. 그래서 추녀를 아름답지 않다면서 외면한다.이것이 바로 그들의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완성된 사람에게는 자기가 만난 타자의 타자성에 근거해서 역동적이고 임시적으로 자신의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자의식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며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다른 타자와 만난다면, 그는 그 타자에 따라 자신의 자의식을 다시 새롭게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완성된 사람(至人) 은 삶이나 사유 모두에서 항상 현재를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에서 산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임시적 자의식이다. 임시적 자의식은 구체적인 사태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자의식이다….따라서 임시적 자의식의 임시성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복수성과 다양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고착된 자의식은 기본적으로 타자가 지닌 고유성과 단독성을 부정하는 데서 성립한다.
합리적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서구적 이성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의 논의에는 이미 다른 문명권의 사람, 교육받지 못한 사람, 독창적인 예술가, 어린아리, 환자, 새, 꽃, 나아가 새로 태어날 인간 등이 배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이라는 합의와 동의 절차는 장자에게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영 교과서를 여러 권 읽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수영을 어린아이보다 더 잘 배울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영을 배우려고 물과 소통할 때, 수영 교과서는 오히려 물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직접 물에 뛰어들어 자신을 물의 운동과 흐름에 맞추어 조절한다. 물과 소통한다는 것은 내가 물속에서 수영한다는 것이지, 수영 교과서가 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생각하면 수영 교과서도 누군가가 물과 소통한 뒤 쓴 것이다. 이처럼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소통은 항상 매개없이 이루어진다. 이런 무매개적이라는 성질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소통은 이름뿐인 허구적 소통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 삶은 항상 타자와의 무매개적인 소통을 전제로 영위되고, 오직 이런 무매개적인 소통을 통해서면 변화되어 생성될 수 있다.(직접소통)
갈등을 해소하려면 엄마는 무엇보다 먼저 아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들은 공부가 하기 싫어서 음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려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자를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대상으로 삼으면, 타자와 공생하는 삶은 결국 파괴되고 만다.
#포정의 소잡는 이야기
월든 호수가의 오두막에서 자연을 노래한 소로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한 스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자연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욕심에 대한 글을 썼다…배고픈 승냥이의 울음소리, 독사나 독벌레 같이 우리와 생존경쟁을 벌이는 다른 생명체의 괴로움이 여기에는 완전히 빠져 있지 않은가?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스님은 다만 자신이 자연에게 의미를 부여한 것만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즉 스님은 자신이 자연에서 찾고 싶어하던 것만 다시 찾았다.
외면으로서의 자연은 관조하는 주체의 내면에 매개된 자연, 원근법적으로 드러나는 풍경일 수밖에 없다. 자연이 자연만의 단독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관조하는 주체의 내면에 따라 이해된다면 자연은 이제 더는 자연일 수 없다. 자연은 다만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자연을 소재로 삼는 동양화는 거의 모두 관념화에 지나지 않는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아무리 아름답게 그려도 살아 있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관념화. 단지 내면의 투사물만 있다. 한마디로 그런 자연에는 대상이 되는 풍경만 있지 타자성을 갖는 자연은 없다.
우리는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논리가 세계 패권을 차지한 서양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처럼, 강자의 처지를 전제로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강자가 내세운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명분은 항상 강자만이 철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를 변화시키는 폭력적 타자. 현재 유행하는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담론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어 있다. 차이와 타자는 진정한 의미의 차이와 타자가 아니라 ‘동일성’으로 매개되었을 뿐인 차이와 타자다.
신으로 만난 포정의 소
장자는 위대하다. 그는 타자와 소통하면 다르게 변형될 것이고, 반대로 다르게 변형되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통찰했다.
추상화된 도, 도의 신비화? 아무런 경험도 없이 수행하는 순수한 사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도가학파는 역사관 출신? 우리는 노자가 왜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는 과거에 대한 기록과 책이 널려 있었다.
노자의 한계? 한갓 정치 철학?!
노자의 철학은 그가 영원하다고 본 것은 ‘국가’와 ‘천하’라는 정치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결코 정치 구조를 넘어서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결국 노자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못한 사상가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남음’을 위한 비움의 철학?
노자가 권고하는 ‘재배분’의 논리는 대다수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 켤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이미 ‘남음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어떻게 ‘남음이 있는 사람’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고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가 권하는 무위 정치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교환 관계가 활발해져서 백성이 더 이상 수탈을 폭력이나 강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피통치자의 ‘자발적이 복종’을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자신(군주)과 백성들 사이의 이름(名)에 따른 사회적 지위의 차별과 다름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
노자가 꿈꾼 ‘소국과민’의 실체? 능력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백성이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거주지를 옮기지 않게 해라/ 문자를 사용하지 않게 해라!
노자의 ‘소국과민’이라는 정치이념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지배의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피통치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문자를 통한 반성적 사유와 이론적 대화 능력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는 정책이 어떻게 문명에 저항하는 ‘작은 정부’니 ‘유토피아적 원시 공동체’와 들어맞을 수 있을까?
그도 노자와 마찬가지로 국가 권력의 원천은 농민이라는 사실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결국 무욕이나 무위라는 삶의 원칙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본’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나아가 이 시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서 과잉소비로 대표되는 인간의 욕망만을 문제 삼는 사고방식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과 비슷하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사회적 재분배를 강조하는 복지 정책이나 소비 차원의 시민운동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논리를 영속화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고 있다.(근본치료가 아닌 대증요법들?)
노자를 우리 시대의 대안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생산 양식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문제는 바로 자본주의를 숙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양의 ‘소통’과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의미인가?
이제는 당겨야 열리는 문으로 누군가 바꾸었기 때문에 밀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게 되었다. 밀어서 열리는 것에 친숙한 사람은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 먼저 지적할 것은 ‘밀어야 열린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사람은 결코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친숙한 세계를 해체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마치 기존의 물줄기를 새롭게 터야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동양의 소통 논리에서 ‘트임(流)’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분명해진 것 같다. 장자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비움(虛)’이라는 자기 수양의 운동을 의미한다. 먼저 터서 비워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타자와 ‘연결될(通)’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단순히 말로만 타자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정말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이렇게 물을 때 ‘비움’과 ‘트임’의 중요성 내지는 ‘비움’과 ‘트임’이 얼마나 힘든 자기 수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