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의 철학. 김용휘. p238
이제까지 한국에서의 철학 연구는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주로 강대국(중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의 사상들 가운데 주류로 알려진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국에서 동양과 서양을 분명하게 분리하는 태도는 20세기 초 일본의 동양통합론에 의해 더욱 확산되고 습관화되었다. 이 때문에 전 인류의 지혜를 참조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편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연구 태도는 희석되고, 전공별로 나누어진 좁은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의 연구는 본국에서 제기된 문제와 해답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거나 모방하여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수동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 때문에 서양철학 문헌들에 대한 사상적 연구는, 번역과 개괄적인 소개 논문의 수는 증가했으나, 그 창의성에서는 해방 전후의 수준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상계의 이러한 타성적 관행은 최근의 관제화되고 수량화된 시장주의적 강제에 의해 인식조차 되지 못했다. 대학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양성하고, 학술보다는 기업 이윤에 한눈팔 때, 한국 청년들의 영혼은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동안 비주류이자 비체계적인 가치관으로 치부되어 왔던 근 백년간의 한국 사상사를 타개하는 데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왜 다시 동학인가
지금은 그 문명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위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다시 한 번 커다란 전환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는 서양 근대의 급속한 팽창과 산업화, 제국주의와 함께 동서가 충돌하면서 근대 물질문명과 민주주의의 혜택을 확장시킨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안겨준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그 이전 시기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계급적 평등 문제, 인권, 여성성의 문제, 인간성 상실과 소외, 핵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과 생태계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동시에 새로운 영적 도약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각 문화권으로 분화되었던 인류의 정신적 유산들이 지구촌 시대를 맞아 통합적 영성으로 융합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볼 때 19세기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는 어쩌면 인류 역사에서 제2의 ‘축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세기 중엽의 수운(최제우, 1824-1864) 선생은 이 시대를 ‘다시개벽’의 시대라고 부르짖은 바 있습니다. 수운 선생의 ‘다시개벽’의 의미는 새로운 정신적·영적 도약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그 길을 제시한 획기적 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 문물이 물밀듯 들어와 동서 문명이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선생의 학문적 사색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 변두리 경주 출신으로 양반이었지만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적 한계 속에서 계급의 문제와 서민들의 고난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동학은 근대 문명이 하늘로 대표되는 삶의 신비를 외면하면서 생긴 인간성 상실과 정신적 궁핍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19세기 수운 선생의 고민은 동서가 충돌하고 서민들의 삶이 나락에 떨어지고, 하늘과 인간의 괴리가 심해지면서 생긴 삶의 총제적 위기를 떠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안에는 자연스럽게 밑바닥 민중의 고난과 고통에 입각하여 동양의 유불선 삼교를 바탕으로 서학의 충격을 흡수하고 있고, 하늘과 인간의 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보이지 않는 차원을 아우르면서 삶의 신비와 영성을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학은 오늘날처럼 삶의 신비가 가리워지고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고 서양의 근대 문명이 한계점에 부딪혔을 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비록 변방의 것이지만 보편성을 가진 철학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동학을 다시 지금의 ‘우리 철학’을 되살려 깊이 읽어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안으로는 부패와 무능으로 백성들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야기된 총체적 사회 불안 속에서 우리 백성들에게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길을 제시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주자학이 더 이상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 못했고, 그릇된 신앙과 비결 등의 거짓 학문 등이 난무하면서 백성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던 시절에 ‘내면에서 신성한 하늘을 재발견’함으로써 이기심이라는 구름이 걷히게 하고, 고대부터 중시했던 참된 경천과 참된 인간의 길을 제시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천주’ 사상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응답이었습니다.
‘내유신령’과 ‘외유기화’가 하늘이 인간에게 영과 기운으로서 관계하는 모습, 즉 인간에게 ‘모셔져’ 있는 존재론적 실상을 의미한다면, ‘각지불이’는 영과 기운으로서의 하늘님을 몸 안팎에서 분명히 체험함으로써 하늘과 분리됨이 없는 참된 섬김(경천)을 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모심’은 크게 두 가지 의미, ‘모셔져 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의미와 ‘섬김(경천)’이라는 실천적 명령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