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있는 수업. 류창기. p325
수업혁신, 배움을 넘어 삶으로
#교육 실천가, 가르침의 물음에 직면하다
배움이 교실 안팎을 넘나들기를 원한다면 교사는 아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요구를 획일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저마다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개별적으로 반응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끔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각기 다른 아이들을 상대로 똑같은 학습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모두에게 배움의 기회를 공평하게 부여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이 동일한 지점의 배움에 이르도록 조장하기보다는 아이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개성들을 잃지 않고 배움을 향해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선택권을 내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이 흐르고 넘나드는 배움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학교는 삶의 교육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검증을 거친 지식들이 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 또한 개인의 가치를 배제한 채 중립적인 태도로 교육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하지만 교육 현장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보면 어디에도 가치 중립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쉬는 시간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소한 말다툼에서부터 누가 옳으니 그르니를 판단해야 한다. 수업 중에 오가는 수많은 대화 속 어디에도 중립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가치를 품에 안으며 누구나 열린 눈으로 새로운 것을 펼쳐 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공공성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스스로 교육 전문가의 자리에서 내려와 교육 수행인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교사가 넘나드는 배움을 일으키는 교육을 펼치고자 한다면,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변화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문제를 직면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직면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기에 매 순간 자신의 가르침에 직면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질 용기가 넘나드는 배움에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길 위에서 묻고 답하다
플라스틱 캡에 갇혀서 자란 오이가 겉으로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과연 자라는 과정도 좋았을지 의문이다. 오이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캡을 씌워서 팔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
교육 상품? 교사는 교육 소비자?!
교사의 삶은 조각보를 만드는 것과 같다. 남은 천들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맞대어 기워가듯 교사는 주어진 삶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어 삶을 잇는다. 흩어져 있는 다양한 모양의 조각들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를지, 또 어떤 것과 맞대어 붙일지, 여러 장의 조각 천을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본다.
세상은 조각난 천으로 가득한다. 모양도 제각각이고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심지어 종류도 다르다. 이것들을 교실로 가져다가 기워내는 것이 수업이다.
“얘들아, 나랑 예쁜 조각보 하나 만들어보지 않을래?” 이 물음 하나로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삶의 다리가 놓인다.
배움과 가르침의 만남
하루 일과표는 아침 산책 시간과 수업 시간으로 나뉘어 있지만 배움은 시간을 구별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야만 배움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그네 위에서든,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미끄럼들에서든,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시장 한복판이든 별 상관없다.
모든 것이 배움의 시간이고 배움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움이 시공간을 벗어나 이루어진다는 것은 교사라면 누구나 한다. 하지만 어느 때분터인가 우리는 적당한 크기의 울타리를 치고서는 그 안의 것만들 가리켜 ‘가르침’이라 말하고, 그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모습만을 ‘배움’이라 말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준비하고, 맞이하며, 기대하고, 다가가고 물러서고, 주었다가 돌려받기도 하며, 질문을 던지고, 기다리고, 북돋워주며, 다독이고, 이끌며, 때론 모른채하고, 기회를 넘겨주고, 설득하며 이해하고 박수쳐주고, 단호한 표정을 내비치다가도 한없이 품어주는 것이다.
배움은 또 어떠한가? 배움은 몸에 새겨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며, 익숙해지는 것이고, 뜻을 세우며, 인경을 기르는 것이고,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는 것이며,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것이고, 가르치면서도 배우게 되고, 배우다가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무엇으로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가르침과 배움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세상의 변화는 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교사에게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변화와 가능성, 그리고 성장을 일구어낼 수만 있다면, 머지 않아 사회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하나의 모습일 수 있으나 배움은 하나일 수가 없다.
‘왜’라는 질문이 사라지면서 교육에 대한 묻고 따짐이 멈추었고, 교사는 교육소비자로 전락했다.
교육 신상품을 교사의 손에 쥐어주며 그것을 소비하라고 독려한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것은 낡은 것이니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을 가르치라고 또 무언가를 손에 쥐어준다. 아무리 보아도 예전 것과 별 다른 것 없는 듯한데도 미래에 달라질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역량 등을 운운하며 제대로 한번 가르쳐보라 말한다.
배움은 늘 유동적이고 다방향적이기 때문에 가르침은 늘 배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만다.
배움이 가르침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핑게만 찾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듯이 자그마한 관심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맺는 일이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다.
#교실에 갇힌 배움, 삶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배움
수업장학의 허와 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업 전문가들은 수업을 많이 하기보다는 수업을 많이 보아왔던 사람들이다.(실천가가 아닌 평론가)
교실 밖 아이들의 삶을 바라보다
“네? 아이들 삶을 봐야 한다고요? 수업시간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꼭 그렇게 해야 잘 가르칠 수 있나요?”
#삶이 넘나드는 배움
생각을 더하는 삶의 공간
많은 생각이 쌓여서 공간이 만들어지지만 공간에 담겨 있던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공간에 따라 생각하고, 그 틀 속에서 행동하게 된다. 학교 공간에는 누가, 언제,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 만큼 오래전부터 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배움의 공식처럼 이루어진 40분 또는 50분 단위의 수업과 10분 동안에 이루어지는 휴식시간이 그러하고…
삶과 배움이 넘나드는 교육.
삶은 저절로 가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가꾸는 일은 공간을 만들어가는 일만큼이나 가르침과 배뭉에 대한 열의와 동의를 필요로 한다. 삶과 배움에 대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묻는 과정이 반복될 때 비로소 ‘삶이 넘나드는 배움’이 가능해진다.
삶이 넘나드는 배움에서 교육과정 재구성은 교육과정을 이리저리 쪼개 보기 좋고 먹기 좋게 만드는 것에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시즌제 교육과정의 유연함
넘나드는 배움의 흐름. 수업읽기 – 이야기 – 수업활동 – 마을활동
이야기가 삶이 되어 흐르는 교실
#넘나드는 배움의 교육과정
교육과정, 길 위에서 길을 잃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은 없다.
제아무리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과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율성을 높일수록 의미는 반감될 것이 불 보듯 뻔한다.
교육과정을 이야기의 공간으로
#마을 활동 놀이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