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 강의. 박노자. p275
반면교사로서의 러시아 혁명
원칙적으로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인 관리와 통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라지고 간부들의 공장 사유화 욕망이 불거지면, 결국 오늘날과 같은 야만적 자본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두어야 할 사실입니다.
민주주의 없이,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참여와 감시 없이는 그 어떤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러시아 혁명이 준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이상적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이런 사회라면 새로운 혁명의 파도가 몰아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러시아 혁명이 남긴 긍정적·부정적 교훈을 철저히 학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과거 속에 미래의 씨앗이 있으니 말입니다.
‘원격 학생’. 이 시절 레닌은 홀로 공부하면서 반체제 서적에 빠져듭니다.
사회주의 이상과 현실, 그 간극에서. 그는 공장 노동을 비롯한 여타의 노동을 해본 적이 없지요…당이 얼마나 부유한 지식인 중심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닌,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은 모두 잘사는 집안의 엘리트. 도동자의 정당 지도부에 노동자가 거의 없었던 셈입니다.
당위 위계질서가 사회의 기존 학력자본, 문화자본, 재력 등의 질서와 일치한다면 과연 그 정당의 정치가 평등할 수 있을까요? 노동자 정당의 지도부를 지식인들이 차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였다고 볼 수 있지요.
볼세비키 다수파와 멘셰비기 소수파. 그런데 실제 투표 결과를 보면 다수파와 소수파의 표 차이는 단 한 표밖에 나지 않았어요.
트로츠키. 어쨌든 레닌은 이 논쟁에서 대단한 현실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노골적인 수정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잉여가치론을 부정. 잉여가치론이란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와 그가 임금으로 받는 가치 사이의 차이가 결국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에게 돌아간다는 마르크스의 핵심 이론입니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은 상품의 가치를 원가와 이윤 마진만을 합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해요. 결국 가치라는 것이 교환가치로서만 존재한다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원칙을 그대로 따라버린 셈입니다.
문제는 카우츠키 같은 일급 사민주의 이론가가 만족스러운 이론을 내놓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는 창의력이 부족한 기계론적 사고의 소유자였어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근대 자본과 국가의 폭력성이 노출되다 이후 레닌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품고 공부를 시작. 그 결실로 펴낸 책이 『자본주의의 최루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다국적 기업을 바탕으로 한 자본가 패거리들이 국가를 부추겨 세계를 나눠먹는 전쟁을 벌인다고 본 것이지요…결국 이 전쟁은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원대한 포부를 표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몽상에 가까웠어요. 병사들은 자신과 같은 병사를 장교로 뽑았고, 그렇게 뽑힌 장교는 군사 지식이 모라란 데다가 다른 병사들을 다루질 못했습니다. 그러자 트로츠키는 구제정러시아의 장교들을 다시 군대로 불러들여 새로운 군대의 기간병으로 삼습니다.
한편 레닌은 1917년 12월 20일 체카라는 비밀경찰 조직 창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날을 기점으로 혁명은 매장되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레닌은 혁명 후 일종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겁니다…중앙에는 부패하지 않은 이상주의적 볼셰비키 출신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지방에서는) 출세 지향적인 인간들은 공산당에 입당한 후 체카에 들어가 고속 출세를 하며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레닌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급진적 혁명가이자 사상가입니다.
레온 트로츠키, 영원한 혁명을 위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는 소련 교과서에서 혁명의 잔혹성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트로츠키의 글은 가벼우면서도 깊습니다. 쉽게 읽히지만, 문장 속에 많은 생각들이 포괄적으로 들어 있어요.
결국 트로츠키는 아버지가 가혹한 게 아니라 체제가 아버지를 가혹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트로츠키가 잘하는 일 중 하나는 열변 토하기. 혁명은 열변가의 시대이고, 트로츠키는 그에 들어맞는 사람이었지요.
러시아어로 소비에트란’council’, 즉 노동자들이 모여 의논하는 평의회라는 뜻입니다.
노동자 대표들의 참여형 직접민주주의 체제로, 소비에트 대표는 소비에트 관련 사항을 노동자들에게 보고해야하며 노동자들은 언제든 대표를 소환할 수 있었어요.
세계 어느 곳에 떨어뜨려놓더라도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회주의를 설파했을 사람이지요.
러시아 혁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17년에 시작된 혁명은 1920~21년을 지나면서 관료화되고 권력 구조가 또 한번 바뀝니다. 1927년에 이르러서는 혁명의 마지만 유산이 거의 사라지면서 사실상 스탈린의 무제한 개발독재가 자리 잡게 되지요.
죽음을 앞두고도 거두지 않은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 트로츠키가 국가를 단순한 도구로 여긴 것은 그의 사상의 치명적인 문제점입니다…하지만 국가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지요. 한번 총칼을 쥔 사람은 총칼의 논리에 구속당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한 거예요. 트로츠키는 국가가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국가 만능주의적 사고를 떨쳐내지 못합니다.
폭력적인 고속 성장의 꿈을 좆은 스탈린 체제
레닌이나 트로츠키는 인물 자체로도 흥미롭고 러시아 혁명과 관련해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선보인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지 않아요.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게 거의 없을 정도로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이 박정희나 이명박을 CEO형 대통력으로 칭하는데, 스탈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육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포섭하다. 공산당 이론가들에게 농민들은 정치적 공작의 대상이었고, 대부분의 농민들 역시 노동자 위주의 새로운 국가에 대해 반감을 품으면서 당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농업보다는 산업을 우선시하는 도시인들의 국가 사이에 숙명적인 갈등이 불거진 것이지요. 하지만 이 대립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1929년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농민 협동화 작업을 통해 농민 계층의 척추를 꺾는 파괴적인 승리를 거두고서 농민들을 직접 관리하는 체제를 구축하지요.
러시아의 경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차이가 극심했습니다. 민족 구성도 상당 부분 달랐고, 문화적으로도 차이가 컸지요. 일부 지배층은 집에서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구사하면서 러시아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한국 지배층이 영어를 숭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배층은 서구 문화를 수입해 누렸지만, 피지배층인 농민들은 열악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문맹률이 70퍼센트가 넘었지요.
스탈린 체제하에서는 웬만한 소도시 인구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처형됐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이들. 이들이 빈자리는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스탈린 체제의 대량 총살은 대량 출세의 다른 이름이었어요. 68만여 면이 떼죽음을 당했다면 다른 68만여 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소련의 사회 분위기는 암울하면서도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쳐났습니다. 이루 소련의 지도자가 된 많은 이들이 이때의 공석을 메꾸고 고속 출세를 한 사람들이지요…숙청 시대를 만나 이런 고속 출세의 과정을 거쳐 고급 간부가 된 거예요. 많은 간부들이 총살당하지 않았더라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고속 출세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당시의 출세 패턴은 상당히 압축적이었어요. 폭력과 포섭은 불가분의 관계였고요. 일부에 대한 폭력은 또 다른 이들에게 포섭으로 작용해 대량 폭력이 오히려 신분 상승의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스탈린 체제의 폭력은 개인의 출세와 사회의 성장 가능성에 의해 합리화되었습니다. 성장이란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고, 폭력의 사회적 명분 또한 성장이었지요.
소련은 박정희 시대의 한국처럼 빠르게 압축적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한국의 경우, 박정희의 ‘꿈의 공장’은 포항종합제철이었어요. 유신 체제 이후 철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군수 공업이 가능해졌고, 탱크는 물론 핵무기까지 꿈꿀 수 있는 고속 산업화가 진행되지요. 이런 맥락에서 포항종합제철은 박정희를 대표할 만한 상징물이자 유신 체제의 핵심적인 고리입니다. 소련 역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군사적인 산업화를 필요로 했는데요. 스탈린 시대의 상징물은 마그니토고르스크라는 도시에 세워진 제철 공장입니다. 강철 생산은 농민 수백만 명을 희생해서라도 실현시키고 싶어했던 스탈린의 숙원 사업이었어요. 그에게는 탱크를 만들어서 소련을 세계 최고의 열강으로 키우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출세의 꿈을 부추겼습니다. 성장은 소련 사회가 공유하는 합의점이자 꿈이었습니다. 개인의 꿈은 사회의 성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지요. 수백만 농민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피해자가 되지 않는 이상 대중들은 이는 외면했습니다.
제 조부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민들은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굶어 죽은 농민들의 후손들 중에서도 체제에 대한 문제를 느끼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고 해요. 부풀려진 성장의 꿈, 근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일화는 근대화 과정에서 폭력과 포섭이 어떻게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겁니다.
성장이 둔화되고 이윤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지만, 이를 통한 성장은 양극화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양극화 사회에서 내수가 침체돼, 결국 수출에만 의존하는 성장은 세계시장의 포화 상태라는 벽에 부딪쳐 둔화돼 끝나고 맙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란 결국 부풀려진 허황된 꿈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모순을 전혀 극복하지 못한 채 그 모순에 의해 새로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이죠.
1930년대 소련의 모습을 보면 성장을 향한 인간의 꿈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성장을 약속하는 보수적인 리더에게 몰표가 나오는 이유도 짐작 가능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표를 던지는 이들은 양극화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성장이라는 꿈은 말 그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꿈속의 꿈이 아닐까요?
급진과 온건의 갈림길에 선 유럽의 좌파 정당들
좌파 정당이란 어찌 보면 그 자체로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국가는 자본가계급 위주로 질서를 유지, 관리하면서 민중을 순치하는 기능을 하는데, 좌파 정당 역시 의회정치를 통해 이러한 국가질서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의석을 얻는다 해도 이를 통해 기존의 부르주아적 질서를 넘어서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럼에도 합법적 정당을 만들어서 의회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겠다는 자기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의 늪 속에 있으면서 그 안에서 자본주의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지요. 실제로 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뒤따라온 적색 개발주의
또 다른 질문을 해보지요. 소련이 몰락하고 중국이 체제 전환한 1990년대 초반에 한국의 많은 전문가들은 십중팔구 북한이 조만간 망할 거라고 떠들어댔습니다…김영삼 정권은 처음에는 북한에 일절 원조를 하지 않았아요. 북한 체제가 조만간 무너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북한은 무너지기는 커녕 여전히 건재하고 있습니다.
급진적 반대파의 인기는 높아봤자 30~40퍼센트에 그쳤고 스탈린파가 다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참담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극단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보다 개발을 지지하면서 보수적인 계파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