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박노자. p321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과거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의 자손들이 장차 유치원 시기부터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해 ‘무한 경쟁’에 몰입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지금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우리 상황에서는, 비시장적 사회와 같은 궁극적 이상은 고사하고 일반 대중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한 복지 자본주의만이라도 성취하려면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배계층에게는 왼쪽으로부터의,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계속 넣어야 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왼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크게 봐서 동의어다. ‘무한 경쟁주의’의 지옥에서 ‘왼쪽’으로의 행진만이 우리의 미래다. 현 위치에 정지해버리는 것은 과거로의 퇴보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한국적 상황에서 재벌 대표자들의 시장주의적 통치는 ‘경찰주의’ ‘공안 정국 조성’ ‘남북 긴장 조장’, 그리고 끝없는 ‘밑’에 대한 폭력을 의미할 것이고, 결국 과거의 폭력적 통치로의 역행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이를 저항없이 받아들인다면 나중에 탓할 데라고는 우리 자신밖에는 없다.
한 국민은 그 국민의 자직에 맞는 사회 체제와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격언이 아무리 진부하다 해도, 근대 정치학은 아직도 이 이상의 진리를 산출하지 못했다.
##가시밭길, 하지만 갈 수밖에 없는 길
#가난한 사람들이 왜 이명박을 지지하나
당장의 자금 흐름이 문제가 돼 ‘경기 회복’을 약속하는 극우파의 감언이설에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도 착취대상이란 자신과 가족, 몇 명의 아르바이트생 빼고 별로 없는 중간 규모 이하의 자영업자들은 대체로 사회·경제적으로 이중적 존재들이다. 한편으로는 ‘진정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자신들과 주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기 변동에 따른 늘 도산 위기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들이 ‘변화가 없는 호경기’를 찾다 보니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주된 지지 기반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유럽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늘 민중을 부르짖고 민중에 호소하는 좌파가, 민중의 많은 계층으로부터 고립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뱅이들이 박정희가 설계한 사회 모델을 혐오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들은 박정희 대신 ‘능력이 없어서 남처럼 잘살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하기만 했다.
물질적 삶의 개선이 기반이 되어, 수많은 이들이 애국주의부터 ‘실패자는 무능력자다’ 등의 성공주의 이데올로기까지 박정희 시절의 온갖 국가주의적·자본주의적 관념에 그대로 포섭되고 말았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반미’ ‘통일’ 등 아무런 현실적 내용도 없는 낭만적 구호들을 외쳐대는 것은 이명박류의 혹세무민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저하 경향, 대학 등록금의 폭발적 인상과 학생·학부모의 재정적 위기, 사채 피해자의 지속적 확산 등 우리들의 진짜 문제들에 대한 그 어떤 현실적 대책도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내놓지도 않고 논의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정당을 같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진정한 좌파들에게 자기모순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구호의 시대‘를 뒤로하고, 점차적 의료·교육 무상화·중소기업인을 위한 저이자·무이자 공공 금융 도입, 용역화·외주화의 법률적인 금지 등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구체성과 현실성 있는 진보로 나아간다면, 가까운 미래에 민심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백수가 되지 않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수백 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어라 ‘무한 학습 경쟁’을 벌어야 하고, 노동자가 되어 기업의 잉여 착취 대상이 될 젊은이의 양육과 교육 비용을 그 부모가 떠안고 있는데도 착취로부터 발생되는 이득은 모조리 기업인이 가져가는 이 상황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더욱더 경쟁·불안·공포의 암흑으로 떨어질 것이고 더욱더 흉악화·폭력화·범죄화될 것이다.
양육·교육·의료를 공동체가 책임지는 나라, 기업의 이윤 추구가 아닌 다수 임금 노동자들의 이익이 우선시괴는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은, ‘세력화’될 수 없다면, 2008년 초반부터 시작된 정치·사회적 퇴행을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퇴행’이 지속되면 한 명의 미네르바가 아닌 수십, 수백 명의 미네르바들이 “국가와 기업의 이익에 방해가 되었다”는 죄명(?)으로 이 위대한 ‘기업 공화국’의 감옥을 메우지 않으리나는 보장이 없다.
##공포공화국을 작동시키는 톱니바퀴들
‘건국절’ 괘변을 반대하는 이유
세상에 존경스러운 국가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고 계급적 착취 관계를 위한 제도적 틀을 제공해주는 국가라는 “무장한 군인과 경찰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단체”(레닌,『국가와 혁명』)는 필요악일지는 몰라도 ‘존경’의 대상은 못 된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예컨대 노르웨이 같은 국가가 표피적으로는 약간 ‘존경스럽게’ 보이긴 해도,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야만이 한두 가지인가?
‘존경스러운 국가’란 형용모순에 불과하다…굳이 ‘자랑’을 하자면, 벌금으로 살림이 박살나고 옥살이 경력으로 이등 시민이 될 것을 각오하면서 급진적 노동운동, 병역 거부 운동, 촛불 저항 등을 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진짜 자랑이다.
##정신의 거세에 맞서는 냉철한 시선
‘생존 투쟁’에 포획된 상태. 등록급 마련하느라고, 없는 직장을 찾느라고, 결혼해서 살 집을 마련하느라고, 직장에서 안 잘리고 버티느라고, 저항이고 뭐고 신경 쓸 틈이 없는 것이다. 그게 한국적 체제의 최강의 무기 중의 하나다.
한국적 체제란 일단 ‘딴 생각’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 체제다. 그러나 절망적 정서가 어느 정도 고착되어 대중화·보편화되면 한국도 어쩌면 그리스처럼 ‘젊은이들의 만성적인 불만이 폭발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절망적 상황을 어느 정도 깊이 인식하는가, 라는 문제가 핵심적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