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p372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또 한 가지 어려운 것은 조르바를 위해 단순한 설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참 웃기는 기적이어서 기가 막힐 지경이오….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고 했는데,…그러고는 자유라니!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 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는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그때는 내 피가 뜨거웠어요. 도무지 “왜”라든지 “어째서” 같은 걸 생각해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합니다.
“…그래요, 젊은 것들은 양도 처먹고 닭도 처먹고 돼지고 처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처먹지 않으면 배가 차지 않는다는군요…”
젠장, 계산하는데 뭣 하러 바닷가로 내려와요?…고개를 들고, 바다를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여자를 보면, 그때까지 하던 계산이나 숫자가 바람결에 날아가지 않으면 그게 우습죠.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리면 나는 또 쫓아가야 하지요.
자유를 택하시겠다? 하지만 저 청동 손 속에 갇혀 있을 때만이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을 해보시죠. ‘하느님’이란 단어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의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에게 버릇 들게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난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뜨여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만의 하나,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언어에 감금되고 언어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꼭 내게 물어봐야 하나요? 우리가 여기 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닌가요? 생각을 실천한다는 것.
오, 불쌍한 친구, 인간의 타락이 지나쳐 악마가 몽땅 먹어 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몸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주둥이만 나불거리게 된 거지요. 하지만 주둥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나는 반항합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 높이는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위대한 스승이라면 자기를 능가하는 제자를 만드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네.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디까?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돈 같은 건 악마나 물어 가라고 그래요! 그걸 가지고 뭘 합니까… 그런 건 내게도 있어요. 필요한 건 다 있다고요. 빵, 치즈, 올리브, 나이프, 장화 만들 가죽과 송곳, 그리고 병에는 물이 들어 있고. 다 있어요. 담배만 빼고…담배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무거나 다 좋아하지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건 큰 죄악입지요…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 영원을 살지요. 나머지는 길을 잃고 헤매니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종교를 내려주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오합지중도 영원을 살 수 있게 된 거지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저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필연을 극복하여 외부적 법칙을 영혼의 내부적 법칙으로 환치시키고 존재하는 것을 깡그리 부정하고 자기 정신의 법칙에 따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긍지에 찬 돈키호테적 반동이 아닐까! 이것을 결국 자연의 비인간적인 법칙을 반대하고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우수하고 도덕적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지. 그러니 알렉시스야. 조심하거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거니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못쓰느니라!”
내가 입을 열면, 추상적인 생각이 사고의 정점에 이르고 이윽고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 있다면! 그러나 위대한 시인 같은 사람이나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그런 경지에 이르는 걸 어찌하랴.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가 자기 영혼에 골을 남긴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다음으로 꼽은 사람은 조르바이다. 그러나 그가 영혼의 편력에서 니체 다음으로 만난 이는 붓다였다. 조르바와의 진정한 만남은 붓다와의 만남을 통한 ‘위대한 부정(不定)’의 경험 이후에나 가능했다. 붓다를 만나고 있을 즈음의 일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붓다의 자비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육체에서 해방되어 결국은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정복하라, 이 세상의 모든 유혹 가운데 가장 무서운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그가 생전에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