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공동체를 만드는 힘
2009년 유엔 해비타르 추산 하루에 40만 명 이상이 도시로 이주하고 있다. 유례가 없는 인구이동의 시대를 맞아 공동체의 번영이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새로운 도시계획은 수백만 혹은 수억 명의 삶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도시계획가들은 도시가 그저 고정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때론 망각한듯 보인다. 많은 수익을 쉽고 빠르게 얻기 위해 무작정 건물을 짓기 전에 명심해야 한다. 도시는 수많은 건물들을 모은 ‘집합체’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라는 점을 말이다. 또한, 도시계획가들 스스로가 마치 신이라도 된 양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대규모의 인구이동과 함께 우후죽순 확장하는 대도시들을 멈추기란 어려워 보인다.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에 대한 생각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제이콥스는 1960년대에 도시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뉴욕 곳곳을 철거하려는 계획에 ‘조밀한 도시’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기하면서 강력하게 맞서 싸웠다. 그녀는 저서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1961)‘에서 정부주도하에 만연하던 합리주의적 도시계획에 반대했다. 대신에 역사적 건물들을 보존하고 유기적인 도시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왜 오랫동안 도시들이 정교하고 복합적인 조직체로 이해되고 다뤄지지 않았는지를 물으면서 대도시의 활기를 면밀하게 관할하고 아름답게 서술하였다. 동시에, 번잡한 도시 지역들을 다리미로 주름을 펴듯 밀어 정리하고자 했던 당시 행정관료들에 용감하게 대항했다. 오히려 이 복잡하고 무질서한 지역들이 도시에 생명과 혼을 불어넣으며 고유한 특성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연구를 집대성한 저서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은 이후 도시계획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영향을 미친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또한, “더 많은 공간 유형이 한 장소나 건물, 그리고 도시에 중첩될수록 전체적으로 더 많은 활기를 얻으며, 무어라 뚜렷이 정의할 수 없는 빛을 스스로 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무질서하지만 활기찬 도시와 달리, 고도록 계획된 도시들도 있다. 호주의 캔버라와 브라질의 브라질리아를 들 수 있다. 1950년대 후반에 근대주의 건축의 이상에 따라 지어진 이 도시들은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층건물들로 채워져 지루하고 삭막한 풍경을 지닌다. 차도는 지나치게 넓고 건물은 지나치게 크고 획일적이다. 그래서 어떠한 공동체도 새롭게 자리 잡지 못한다. 이러한 도시계획을 두고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전체주의적 질서만 남길 뿐 유기적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도시조직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예기치 못한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고 평했다. 제이콥스와 알렉산더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규모 주거계획들이 실패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스위스와 같은 도시 수준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에서도 그렇다. 광대한 대지 영역들이 앞으로 그곳을 살아갈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개발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공유할 수 있는 옥외공간을 배제하거나 주거구역 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스위스 베른의 새로운 주거계획을 예로 들자면, 도시 외곽에 상당한 규모의 대지를 다섯 구역으로 나눠 개발했지만, 공유 공간이 없어 활기찬 공동체를 기회를 잃었다. 새 세대의 도시계획가들은 공공영역을 질 좋은 공간 유형들로 채워 유기적인 도시를 만들기 보다는, 지가와 부동산의 경제적 가치, 혹은 특정 인구계층에만 관심을 두는 듯 하다. 개발 논리로 인해 치솟는 집값에 기존 거주민들이 외지로 내몰리며 오랜 공동체가 사라진다. 거주민들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이동하게 되고,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공동체의 조직망을 훼손하기도 한다.
한 동네의 조직과 밀도는 거주민 사이의 교류 기회와 정도에 직접 작용한다. 계획가들은 개발제한구역까지 침범하는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전원 풍경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지역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제네바와 같이 상당히 밀집된 도시들도 도심의 건물을 한 두 층 더 올려 밀도를 높인다. 한편, 수백만 명을 수용하는 대도시는 너무 압도적인 규모라 지역 공동체를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런던과 같은 도시들은 비록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여전히 도시지역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학교나 도서관, 혹은 공원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도시 전체에 광범위한 마을 조직망을 형성한다. 영국의 건축 이론가 데얀 수딕은 “도시의 공공영역은 더 이상 교회나 시장, 혹은 광장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식당과 주점에서 가장 많이 모인다. 나아가 경기장이나 박물관 등이 사회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어 오늘날의 도시 풍경을 만들고 있다.
런던의 도시구역들이 수백 년의 역사를 거쳐왔지만,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은 수십 년 사이에 갑자기 나타났다. 고층건물과 다차선도로로 가득 찬 도시의 규모를 고려하면, 이 거대 도시들이 공동체와 지역 주민의 활동을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다. 가족과 떨어져 멀리 이주해온 거주민들은 자신이 속한 동네와 어떠한 교류도 없이 익명의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소회현상은 한국과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핸드폰이나 노트북 속 가상의 친구들과 함께 끼니를 해결하는 수백 명들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공동체와 시민 교류를 위해 도시가 계획되었더라면 이들은 소외감과 외로움 대신, 실제 공간 안에서 실제 사람들과 대면하면서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공원이나 도서관, 체육시설과 같은 공공영역에서 사람들이 마주치고 모이게끔 하는 것이 도시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다. 최근의 새로운 도시계획은 ‘광장’에 주목한다. 공공영역이 도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로버트 스텐트빌은 “도시건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가 주장하는 좋은 공공영역은 도시 곳곳에 세운 공동체 중심의 공간들로, 활기찬 보행로로 서로 연결된다. 이탈리아 몇몇 도시 광장에 가득한 관광객들만 봐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도시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지 쉽게 떠올리 수 있을 것이다.
건축재정이라는 명목하에 도서관과 같은 공공 공간에 할애하는 예산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귀중한 공공 자원을 사유화하는 현상은 공동체의 약화와도 직결된다. 공공 공간과 녹지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에 충분한 공적 자금을 확복한다면 공동체와 동시에, 사회 전반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도시 기반시설의 조직망도 사람들 간의 교류에 영향을 미친다. 훨씬 더 정교하고 안전한 대중교통 체계로 지역 중심의 상권을 육성하며 보행과 자전거 이동 중심의 도시를 만들어낸다면, 자가용에 의존한 나머지 심각한 교통체증을 겪는 번잡한 도시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 산업과 함께 밀접한 관계 맺으며 성장한 도시는 보행자보다 차량을 우선으로 하게 마련이다. 보행도로는 활기찬 도시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무시되거나 등한시되었다. 도시계획의 순위에서 뒤로 밀려난 보행도로와 함께, 건물과 차도 사이를 중재하는 공공 공간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도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주택과 도로 사이의 공유 공간이 없거나 부족하다 보니 도로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위험한 곳이 됐다. 이는 1960년대의 획일적인 고층 주거계획에서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보행자로서 도시를 경험하기보다는, 차량이나 비행기의 승객이 되어 유리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만을 감상한다. 자동차는 서로를 단절시키지만, 동네를 천천히 걷다 보면 사람들 간의 더 많은 교류가 가능해진다. 유럽이 도시들이 도심의 주요 도로를 차량으로부터 막아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만드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유럽 도시들을 찾아든다. 제이콥스는 보행도로가 공연 무대와 같으며, 보행자의 움직임은 마치 춤과 같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무용수들이 어울려 만들어낸 안무와 공간이 상호보완하며 질서 있는 전체를 구성한다고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반시설 또한 도시와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미국의 도시 이론가 캘러 이스털링은 오늘날 도시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요인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지하에 묻힌 관과 전선, 인터넷과 무선통신망, 그리고 자유무역지대와 대형 복합 백화점 등이 해당한다. 이스털링은 저서 ‘초국적 기술: 기반 시설 공간의 위력(2014)에서 기반시설을 모든 공간의 이면에 숨겨진 구성원리로 분석한다. 이를 반정치적 대응이나 모방으로 왜곡하거나 변형시킬 방법들을 모색한다. 또한 기반시설이 우리의 일상생활 공간을 관리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을 설정하며, 21세기 도시를 권력과 저항의 핵심 공간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도로 교통망이나 심지어 통신망까지도 시민들의 삶에 상당히 작용한다. 이러한 영향력을 도시계획가들이 충분히 인식한다면 차별과 불평등보다는 사회적 연대를 위해 다양한 조직망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단위에서의 미시적 요인들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 작용하는 거시적 요인들도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세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자연환경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면서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불안한 지도자들은 과격한 언행으로 국가간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무작위 테러가 자행되고, 수백에서 수천 명의 난민이 떠돌고 있다. 많은 도시에서 보안수준과 감시가 더 강화되었다. 공공 공간과 장소는 엄중한 감시 속에 놓이게 되었으며, 도시의 거의 모든 모퉁이마다 감시카메라가 우리를 내려다본다. 중무장한 경찰관들은 몇 년보다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행동이 수상하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너무 오랫동안 한곳에 머무르는 자들은 제재를 당한다. 광장이나 공용공간의 편평한 바닥은 노숙자들이 누울 수 없도록 가시들로 뒤덮였으며, 부촌의 공공 공간은 외부인들을 제한한다. 이처럼 현대의 공공 공간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묘사한 전체주의적 악몽에 처할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배타적인 공간영역은 오늘날 공공에서 주거로까지 확장된다. 남아프리카나 브라질과 같이 소득계층 간의 격차가 크고 폭력이 일상적인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때로는 교외 지역 전체가 안전지대로 격리되기도 하며, 공동체 전체가 총기로 무장한 보안요원들에게 보호받는다. 거주자와 특별히 허용되는 몇몇 사람들만이 이곳을 출입할 수 있다. 이렇게 보호된 지대가 더 많은 사람을 길거리로 나오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담장을 둘러 밀폐된 동네의 주민들은 외부와 왕래할 필요도, 기회도 없다. 이곳을 벗어나 도시 전체를 이해할 기회 또한 갖기 어렵다. 일상적인 도시 생활의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격리되는 감옥과 다름 없는 것이다. 계층 간에 그리고 지역 간에 부의 분배가 균형 있게 이루어지고 범죄와 폭력이 통제되지 않는 한, 알렉산더의 ‘활기찬 도시 공간 유형들’은 우선순위에서 안전한 거처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시에 작용하는 수많은 힘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이제는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이 향후 몇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공동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가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도시에 대한 수많은 논의는 늘 어느 정도는 공동체와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가 아아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읽고자 한다면 먼저 과거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어떤 요소들이 도시의 성패를 좌우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도시계획가와 건축가가 적재적소에서 유기적인 도시 개발을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도시를 이루는 공동체를 대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도시만의 독특한 문화를 활성화시켜야 다양한 가능성을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활기찬 동네와 견고한 지역성을 길러낸다. 공동체가 있는 곳이야말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 안나 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