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다시 살다. 숭례문학당. p274
함께 읽기로 인생을 바꾼 사람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마음상태가 아닌 존재방식이며,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행복은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가치를 줄 때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영화의 생존이 ‘만남’에 의지했듯이 영화의 죽음은 곧 ‘만남의 죽음’을 거울처럼 비춘다. 인터넷에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응시보다 ‘좋아요’를 갈구하는 욕망이 넘쳐난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작은 화면이 주는 만족감에 빠져 현실의 만남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또 한편에서는 만남에 목마른 이들이 관객과의 대화나 유명 평론가의 영화 해설에 빠진다.
하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자신과 타자가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희박하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다
#40대 가장, 책에서 용기를 발견하다
#서평 쓰는 김과장의 25시
『레 미제라블』“그 과오가 지나온 경로를 보자” ”사회는 스스로 만들어 낸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음속에 그늘이 가득 차 있으면 거기에서 죄가 범해진다. 죄인은 죄를 범함 자가 아니라, 그를 만든 자다”
”그 과로가 지나온 경오를 보자”는 이 짧은 글귀에 미리엘 주교의 삶과 인간 가치의 본질이 담겨 있다…긴 시간 책과 마주하며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지 고민한 자만이 이 문구의 참 의미를 알 수 있다. 읽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감동이고 쓰지 않았으면 잊어버릴 깨달음이다.
150년간 ‘글’로 전해진 이 위대한 고전의 가치는 ‘글’로써 읽혀지고 다시 자신의 ‘글’로 새겨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영화보다 책으로 읽어야하는 이유)
서평독토, 홀로 서평에서 함께 서평으로
#미생에서 완생으로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그 문제가 한 사람만의 것이라면 개인사라 할 수 있으나, 두 사람의 공통된 문제라면 사회과학적으로 의심해볼 필요가 있으며, 만약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이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엄기호,『단속사회』
##함께 읽기의 즐거움에 빠지다
#스마트폰 대신 책을 손에 쥔 아이들
엄마 말 잘 듣는 순둥이는 괜찮은 걸까? 내 대답은 NO. 이 아이들에겐 ‘자기 의견’이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자신의 생각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고, 옳은 길이 아닌 빠른 길을 찾으라고 종용한다. 그 종착역은 ‘사회 부조리에 적응한 인간’이거나 ‘나만 살아남으려는 인간’이다. 교육을 통해 길러야 할 인간상은 ‘더불어 사는 인간’, ‘자기 의견을 갖고 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시민’인데 말이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사유’와 ‘토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건전한 취미’다.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은 생각이 없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답’이 아닌 ‘생각’을 묻는 질문, 지적·문화적 자극은 아이들을 진지하게 만든다.
입시 터널을 통과한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경쟁이다.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아이들이 적자생존의 세계에 내몰려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적응력’이 아니라 ‘자생력’이다. 그것을 기르기 위해서는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하는 것 만한 게 없다.
#탈북 대학생과의 독서토론
#북콘서트에서 ‘사람책’을 만나다
“어머니의 늪에서 벗어나세요. 자식과 부모는 상극입니다. 밥 먹이고 학교만 보내주면 돼요. 그렇게 해도 인연이 안 끊어집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길 바라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만약 그 일을 찾았다면 그 자체로도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는 여러 가지 경험에 도전하고 부딪혀야 합니다.”
#나의 수업시대
『빌헤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대부분의 대학 교육 방식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초중고 교육이 더 치열해진 입시경쟁으로 인해 주입식, 시험대비식 공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토론식 수업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 남편. 토론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 위계적 질서를 내세우는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사회는 어른 앞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 자체를 곱게 보지 않기 때문.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고 상사나 윗사람 앞에서 그것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건 금기다.
숭례문학당은 나에게 ‘탑의 모임’ 같은 곳. 이곳 사람들은 모두 ‘공부하는 인간’이다. 공부를 통해 교양인의 길을 것고 있다. 그들은 남의 지배하려 들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뒤에 서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고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일이 언제나 뚜렷하게 자각되지는 않지만 이미 현실이 되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파우스트』
#만남을 복원하는 영화토론
생각은 나눌수록 깊어지고 넓어졌다.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스투디움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통된 느낌이라면, 푼크툼은 수용자 자신만의 느낌이다…보편적이기에 스투디움은 쉽게 인식된다. 하지만 자신만의 푼크툼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만다. 영화토론은 바로 이런 푼크툼의 순간을 눈앞으로 불러올 수 있도록 한다.
#다시 만난 독서토론
『제가 살고 싶은 집은』
건축가는 집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에게 ‘어떻게 짓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먼저 묻는다.
##책으로 나를 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