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니아 따고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는 동네이야기 하나.
요즘 고추값이 만이천원이니 만오천원이니 하는데, 칠천원에 장사꾼에 팔고서 어머니에게 혼나고, 스스로도 억울해서 울고 술먹고 토하고, 했다는 동네 젊은 농부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애써 농사지은 데 헛농사가 된 셈이니,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으니 마음이 아파오고…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공부, 도덕공부를 헛공부로 만들고 있는 「금강」의 싯구절을 위로 삼아 잠시 되새김질해본다.
해월은,
1898년 6월 2일
서울 광화문밖 형장 교수대에서
순교하던 일흔두 살,
34년간을, 탄압에 쫓기며
동학을 물고
전국 방방곡곡
농어촌 찾아
노동자를 조직,
포교했다.
상여꾼,
장돌뱅이,
거지,
엿장수
로 변장하고.
어느 여름
동학교도 서노인 집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수저를 들으려니
안방에서 들려오는
베 짜는 소리,
“저건
무슨 소립니까?”
“제 며느리애가
베 짜는가봅니다.”
“서선생,
며느리가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한울님이십니다.
어서 모셔다가
이 밥상에서
우리 함께 다순 저녁
들도록 하세요.”
서노인이, 며느리 데리고 나와
상머리에 앉을 때까지
해월은 경문 외며 정좌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해월을 전송하러
서노인 집안이 동구밖
논길까지 나왔다.
막내아이가
따라나오며 우니
서노인은 눈을 부릅떠
위협, 쫓아보내려 했다.
해월은,
주인을 가로막아
어린이의 머리 쓰다듬으며
그 자리 흙바닥에
무릎끓었다.
그리고 서노인에게
말했다,
“이 어린 분도
한울님이세요,
소중히 받드세요.”
가는 곳마다,
내일 떠날지
오늘밤 떠날지
알 수 없는 빈 집,
쓰러진 외양간에 묵으면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노끈을 꼬고
구럭을 얽고
과수나무를 심고
채소씨를 뿌렸다.
할일 없으면
꼬았던 노끈 풀어서
다시 비볐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몇날 안 가 또
딴데로 떠나셔야 할 텐데
그런 일 해
뭘 하시렵니까”
“안될 말,
한울님께서 사람을 내신 건
농사지으라고 내신 건데
농사짓지 아니하고
생산하지 아니하면
양반보다 나을 게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리가
혹 이 멍석 쓰지 못하고
이 채소와 과일 먹지 못하고
딴데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멍석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따먹게 될 게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농장은
모든 인류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