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이현우. p412
치열하게 독서하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생각하기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범의 ‘이데롤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다.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이라고 다르겠는가.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것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다. 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다…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라킨다.
세상과의 연애?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끝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히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이성복 시인
#걷어차야만 자리에서 일어난다_로쟈의 문학 노트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중요한 것는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책읽기의 괴로움?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
김규항의 ‘문장론’. 나는 중언부언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하신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힘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법은 계산 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하다
이라크 위기와 전쟁 역시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이미 이라크인이다!” 우리가 거기에 발을 넣고 빼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세계화 시대의 철학자 지젝이 보기엔 순진한 환상, 혹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그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라크전의 ‘세계적 맥락’, 전 지구적 콘텍스트다.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다.
새로운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미국의 ‘제국-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덜됨’에 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라는 게 핵심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란 자신이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행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행함’이다.
#로쟈의 철학 페이퍼_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은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면, 논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순서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 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 삶’을 넘어서는, 혹은 ‘이 삶’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그 선언에는 함축돼 있다.(“이게 다예요!”)
자연은 잔인하기보다는 단지 무자비하고 냉담할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선의도 악의도 없고, 잔인하지도 않으며,단지 냉담할 뿐인 어떤 사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사람의 뇌 속에는 목적이 가득 들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것을 만든 동기나 이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병적인 상태로 발전하면 그것을 편집증이라 부른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니체는 자신을 경계로 하여, 철학사를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로 구분했는데, 그러한 구분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철학은 아줌마 철학을 경계로, 아줌마 철학을 문턱으로 하여 양분된다고. 아줌마 철학은 무엇과 경쟁하며, 무엇을 부정하고 거부하는가? 그건 형이상한으로서의 ‘이데아 철학’이다.
동굴의 우화. 진정한 어떤 것이, 현실 너머에 있다는 관념. 진정한 삶은 지상의 삶 이후에 온다는 관념.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사유의 요체다. 모든 것은 메타, 즉 이것 ‘너머에’ 있고, 이것 ‘다음에’ 있다.
“이게 다가 아니야!” 이것이 이데아 철학의 구호다. 하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아줌마 철학은 “이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철학이다.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Eat, Survive, Reproduce(ESR)”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 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 보다 근본적인 건 언어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다.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 작용일 뿐이다.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나게 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What’s it all about?”이 그 물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고 요구다.
형이상학의 표준적인 물음은 “What is it?”(WIT)이다. 이 물음을 떠안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바로 ‘병든 인간’이다. 즉 그 물음과 함께 인간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무엇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엇을 넘어선 무엇들의 세계’에 살게 된 것이다.
호모 사피엔자의 진화 과정?
잠자는 숲 속의 벤야민
“어떤 장소를 알려면 가능한 한 많은 차원에서 경험해보아야 한다. 어떤 장소를 이해라려면 동서남북에서 다가가 보아야 하며, 동서남북으로 떠나가 보아야 한다”-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내가 지젝을 읽는 이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역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