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김수영 시선. p155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발견의 각도”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내면서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 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 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 시인의 직관은 논객의 논리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그 작품 속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 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공자의 생활난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거대한 뿌리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자유와 꿈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 그것은 그의 초기 시편에서부터 그가 죽기 직전에 발표한 시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끈질긴 탐구 대상을 이룬다. 그는 그러나 엘뤼아르처럼 자유 그것 자체로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시적·정치적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케 하는 여건들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바로 본다는 것은 대상을 사람들이 그 대상에 부여한 의미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나름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도식적이고 관습적인 대상 인식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식에 대한 반란을 뜻한다. 인식을 지칭하는 어휘이다. 그것은 때때로 작란이라는 어휘로 대치되기도 한다. 그가 작란이라는 어휘를 선택할 때 그것은 손작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식 작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의식 작란에서 그의 시의 파격성이 생겨난다.
모든 예술은 그것이 꿈, 다시 말해서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예술의 비타협적, 반도식적 성격을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그것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결부될 때 그 생명력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봉사를 강요당할 때 질식한다. 그때에 예술은 하나의 도식, 명령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의 시에 대한 주목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것은, 불가능을 추구하는 예술 본래의 역할에 대한 성찰이 점점 더 절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