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자전거 동네한바퀴. 핸들을 돌려 상오리 대신 용유2리 우복동으로.
자동차로 쌩쌩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동네 간판 비석이 눈에 쏙 들어온다. 역시나 천천히 가야 제대로 볼 수 있나 보다.
여기저기 가뭄에 아우성이지만, 쌍용계속으로 이어지는 용유천은 그래도 시원해보인다.
내친김에 페달을 밟아서 청화산자락의 화산마을로 나아가본다.
마을은 하나인데, 행정구역은 둘. 상주와 문경으로 나뉘어진 광정 마을.
당나무 아래로 보이는 용유2리가 아닌 ‘내서1리’ 동네 간판 비석.
바로 뒤 길 옆 동네 간판 비석 같은 돌탑? 뭐라도 글씨가 있을 듯 한데 글자 하나 없는 돌탑인가?
우복동 이상향의 세계로 넘어가는 다리 치곤 너무 ‘현대적인’ 우복교.
마을 입구 간판 비석에 동네이름 대신 새겨진 ‘청화산 우복지’. 청화산 바로 아래 화전민들과 세속을 떠나 무릉도원을 찾아온 ‘비결파’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깊숙한 골짜기 화산마을. 택리지 이중환이 우복동이라 일컫은 곳이 바로 화산마을일 듯 싶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찾아본 산신당(산제당).
산제당 이야기 비석에 새겨진 익숙한 우복동 이야기.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마을을 형성하고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발전하여 왔다. 이 마을의 형상은 백두대간의 지맥이 청화산에서 속리산을 거쳐 도장산으로, 다시 청화산으로 되돌아오며 원을 그리고 있다. 그 산세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회용고조형이라 하고, 그 안에 동리가 있어 우복동이라 하며, 원의 중심핵을 이루고 있는 영지산 자락에 제당을 건립하여, 질병과 재앙을 축출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려왔다. 또한 청담 이중환(청화산인)은 택리지에 이곳을 우복동이라 칭함으로 전국각지에서 감록사상을 심봉하는 자와 관직을 버린 선비들이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저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의 크기가 사백여호에 달했으며 영조시대 때 사도세자의 사부이시던 늑천 송명흠 선생께서 낙향하여 서원을 짓고 유생을 강학하며 동민과 함께 산신제를 올리니 산내 칠이의 전 주민이 참제하고 그 뒤에 각자 자기 동리에서 동활제를 올리는 제당이 있었으나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풍수해로 인하여 매몰되어 시멘트 블록으로 임시건물을 세우고 신황대신을 뫼시는 형편이었는데 녹색농촌체험마을 사업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축조하게 되었다. 이제 조상님으로부터 전수한 제례절차를 준수하며 정성을 다하여 산신제를 올릴 수 있는 제당이 마련되었다.
개운조사가 초서로 일필휘지 손가락으로 바위에 써내려갔다는 그림같은 ‘동천’이란 글씨가 선명한 동천암.
동천암은 우복동의 옛이야기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