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자본주의에서 행복을 작당하는 법. 유병선. p324
“나무들은 왜 그들의 / 뿌리의 찬란함을 숨기지?”
“그래요? 그럼 우리는 나무들에서 뿌리의 찬란함을 볼 수 없는 걸까요, 보려고 하지 않는 걸까요?”
김수영 「거대한 뿌리」
네비게이션 사회? 경제 살리기의 근본 대책이란 전문가들의 설계에 걸리적거리는 모든 삶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다. 김수영 시인이 좋다고 했던 ‘무수한 반동’, 공감과 연대와 둘러앉기의 거대한 뿌리는 하찮은 것이 된다. 그렇게 네비게이션 사회는 뿌리의 찬란함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억제한다.
세상이 어수선하다고들 한다. 네비게이션 사회의 역설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기약은 이제 ‘공갈’이라고 절망한다.
경제 성장이 행복으로 안내하리라 철석같이 믿었던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된 것이다.
‘사회적 경제’란 용어는 1830년 프랑스에서 창안. 근대의 등장과 함께 ‘사회’와 ‘경제’의 관념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던 무렵. 경제학이란 말이 생기기 한참 전. 사회적 경제는 정치경제학과 대비되는 경제 또는 경제학을 가리켰다.
‘뿌리의 찬란함’이란 물음은 가뜩이나 복잡한 사회적 경제/기업의 논의를 더 성가시게 하는 것은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계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뿌리를 천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기업·경제 논의의 치명적인 결락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기업·경제란 결국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다른 생각, 다른 실천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 이야기들이 더 많은 이야기와 얽히고,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 얽힘과 이음의 연쇄가 거대한 뿌리이고, 그 과정이 뿌리의 찬란함일 터이다.
##사회적 기업·경제는 어디서 왔는가
#공감_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벗어나는 법
내가 스스로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돌보겠는가? 그리고(그러나) 내가 나만 돌본다면(돌볼 때).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인가?
if I am not for myself, who is for me. And(But) if(when) I am only for myself, what am I. And if not now, when?
“참 잘했어요”가 없는 수업. “오늘 기분 어떠니?” 이것이 ‘공감의 뿌리” 교육의 시작.
목적과 수단은 대비된다. 목적과 결과는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자동차의 네비게이션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해야 한다.
#연대_호혜와 관용의 연결고리
열린 공감, “내 안에 너 있다”
#혁신_세상을 바꾸는 행복한 실험
사회적 기업·경제의 3대 요소? 공감, 연대, 혁신!
##사회적 기업·경제는 무엇인가
#보물찾기_사람답게 살기 위한 공생의 발견
전문가의 눈엔 모두가 비전문가. 비전문가는 알려주고, 가르치고, 고쳐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으로 꼽히는 이반 일리치는 혁파해야 할 과제로 ‘전문가의 시대’를 꼽았다. 전문가들이 현대인을 무능하고 비참한 인간, 즉 ‘호모 미세라빌리스Homo Miserabilis’로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카붐KaBOOM. 놀이터 짓기에서 놀이 문화로. 말이 쉽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이어야 하는 중매쟁이 노릇이 쉬울 리가 만무하다…”우리 프로젝트가 가진 진정한 미덕은 놀이터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둥근 네모_틀을 깨는 다른 생각의 가능성
다른 생각으로 다른 길을 찾는 이들은 세상이 동그랗지 않을 뿐더러 네모로 설명되지도 않음을 직관한다. 그래서 그들은 동그랗지도 네모나지도 않은 둥근 네모, 네모난 동그라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장자의 조삼모사? 아침에 셋과 저녁의 셋 사이에서 원숭이들의 반응이 왜 달랐는지 보라고 했다. 그 답은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 있다. 이렇게 삶은 둥근 네모로 소용돌이친다.
삶의 현장을 봐야 현실이 보인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전기혁신, 셀코의 하리시 한데.
그는 먼저 동그라미의 고정관념부터 깼다.
가난한 사람들. 한 달에 300루피는 못 쓰지만, 하루에 10루피 내고 태양광 전깃불 장치 구입 의향(조삼모사)? 좋다!
삶은 형용모순이다.
둥근 것은 둥근 것이고 네모난 것은 네모난 것이라는 게 정명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 맞는 말이다. 그런 어디까지나 논리의 세계에서만이다. 삶은 그렇게 순정하지 않다.
역설이란 모순된 표현 속에 어떠한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 방식이다. 삶은 그 자체가 형용모순일지 모른다. 삶에 대한 가장 명징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정의가 있다면 “삶을 계속된다”일 뿐이다.
#둘러앉기_공감과 연대를 회복하는 길
거대 권력에 맞선 시민의 승리. (촛불혁명)
##사회적 기업·경제는 어디로 가는가
#황금사슬_사람 대 사람의 동등한 관계맺기
로치데일 선구자들, “가장 큰 관심사는 눈부신 상업 활동이 아니라, 거래의 관계를 활기 있게 만드는 새로운 정신”이라며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서로 친구로서 만난다”고 했다.
“파는 사람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면 사는 사람도 그래야 한다…”
로치데일의 8대 원칙. 1인1표/ 조합원 개방/ 출자금 지급 제한/ 이용고 배당/ 현금 거래/ 정직한 상품 공급/ 교육 촉진/ 정치적·종교적 중립
국제협동조합연맹ACA이 정한 협동조합의 7대 원칙
원칙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기도. 그래서 원칙은 역설적 당위다.
우리는 항상 너무 많이 게획하고 항상 너무 적게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하도록 요구받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고, 또 이미 믿고 있거나 믿고 싶어할 것과 부합하지 않는 생소한 논의를 증오한다. 우리는 눈을 가린 채 전쟁에 걸어들어갔던 것처럼 미래로 걸어들어간다.-조지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황금의 끈_더 나은 이야기로 이끄는 유토피아
시적 상상력. 칼 폴라니는 합리를 가장한 자기조정 시장의 ‘신화’에서 악마의 맷돌을 보았다. 인간마저 분쇄하여 거침없이 돌아가는 악마의 맷돌을 멈추는, 그 거대한 전환의 대전제로서 경제에 짓눌린 시적 상상력. 그렇다면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의 당위만 말하고 대안 제시에 미흡하다는 비판은 제고되어야 마땅하리라.
우리는 발전 담론으로 설계된 네비게이션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 네비게이션은 먹통이 되었다. 작동하지 않는 네비게이션만 멀뚱멀뚱 쳐다볼 것인가…”사회적 기업도 어차피 기업”이라거나, “사회적 경제도 어차피 경제”라는 네비게이션 방식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적 기업 육성의 덫
‘다른 생각’을 가두는 제도. 제도란 ‘빙산의 일각’과도 같다. 물위에 드러난 제도라는 빙산은 물밑에 잠긴 90퍼센트의 얼음이라는 문화의 부력으로 지탱된다.
비영리조직에 대한 오해. 비영리조직은 돈을 벌지 않거나 돈을 못 버는 시민단체로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상업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하마드 유누스의 ‘소셜 비즈니스’. 이윤이 아닌 비용에 주목하자는 것. ‘비용 회수/충당’을 잣대로 삼아라.
#사회적 기업의 개념과 제도
기존의 틀로 정의하기 힘든 사회적 기업
작명과 호명의 차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다소 무리를 해본다면, 사회적 기업이 이 시와 같다, 다양한 ‘몸짓’이 있었고,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사회적 기업이라는 꽃이 되었다.
요컨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름이 있기 전에 다양한 몸짓이 먼저였다는 사실이고, 작명보다 호명에 방점이 있다.
사회적 기업·경제는 ‘실천을 추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