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산다. 황상호. p207
서울을 떠나 더 행복한 사람들, 14인 14색
#그들을 만나서 행복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두려움을 이겨 내고 대안을 선택한 사람들의 말 속에는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의 온갖 핑계와 잡념을 털어 낼 만한 죽비 한 자루씩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자, 과소비하지 말고 간소하게 살자, 진짜 나의 즐거움이 뭔지 알아 충분히 만끽하자 등등.
서울공화국이라는 크고도 높다란 장벽에서 빼낸 작은 벽돌 크기만큼 나도 딱 그 정도 성장한 것 같다. 어떤 취미생활보다도 고된 글쓰기가 내게 가장 큰 위로이자 즐거움이란 것도 알았다. 빛나지 않더라도 나의 길을 가야지. 떄로는 억지로라도 한 발 두 발. 나만의 ‘꾸역꾸역 저널리즘’을 위해.
#욕망의 도시를 벗어나 새 꿈을 펼친 ‘흙수저’ 아티스트_청주시 수암골의 림민 작가
청주시 수암골을 빛낸 연탄트리
유튜브를 통해 그림 독학. ‘연탄재 장난’ 시작.
2012년 5월,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림 작가는 이웃집 담벼락 아래 버려진 연탄재 두 장을 발견. 이웃집 할머니의 구들을 데우고 스러진 연탄재였다. 작가는 할머니에게 장난을 칠 요량으로 연탄재에다 눈과 입을 그리고 “간밤엔 따뜻하셨죠”라는 말풍성을 그려 뒀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 연탄재를 버리지 않고 보름 넘게 둔 것이었다. 오랫동안 천착할 아이템을 찾고 있었는데, 그때 이거다 싶었다.
#죽다 살아난 이 남자의 선택_충주시 동량면 인형극단 ‘보물’의 김종구 대표
모두가 가는 길에서 벗어나도 행복할 수 있다
“걱정들을 하시는데요. 공연 수익금으로 생활하기가 풍족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생활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텃밭에서 나는 것으로 자급자족하고 옷도 벼룩시장에서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거든요. 돈을 안 쓰면 됩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탈출하면 돼요.”
#’확 깨는’ 그의 시, 이렇게 만들어졌다_제천시 백운면 원서문학관의 오탁번 시인
#호주제 없앤 ‘꼴통 페미’가 동학에 꽂힌 이유_옥천군 청산면의 한의사 고은광순
“당시 사람들이 ‘호주제가 폐지될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되겠냐’고 물었어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옳은 일이라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한다는 각오였거든요. 중국 당나라 때는 여성들의 발을 묶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족이 천 년간 세습됐지만, 이제는 그것을 전통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호주제도 마찬가지였어요.”(동성애 찬성하냐?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성 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
40년 가까이 매번 주제를 바꾸며 싸우는 데 지치지는 않을까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내가 하는 일이 옳으니까요. 또 그렇게 해야 내가 편하잖아요.
독재가 사라져야 내가 편하고 호주제가 없어져야 내가 편하죠. 근데 그 일이 결국 (사회구성원들과) 더불어 좋으니까 그게 진짜 좋은 거죠.”
『시골 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
“1970년대는 학생운동, 1990년대는 여성운동을 했어요. 그동안의 투쟁도 어떻게 보면 모두 ‘힐링’이에요.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는 ‘사회적 힐링’이죠. 그런데 이제는 개인의 내공이 높아지지 않으면 안 돼요.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지 않죠. 결국 사람들 각자의 내공과 지혜가 높아지면 올바른 시스템이 정착될 거라 생각해요.”
“호주제폐지운동을 하면서 부딪힌 게 ‘가문’ ‘혈통’ ‘미풍양속’과 같은 것들이에요. 그런데 가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가까 족보들을 바탕으로 해요.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찌질한 남자들밖에 없나 푸념하다가 동학을 만난 거예요. ‘하늘과 땅이 모두 부모다’. 조상이 아닌 나를 위해 위패를 설치하라는 ‘향아위설’처럼 동학에는 위대한 생각들이 있죠.”
#이 책 인세로 술 마시고 저 책 인세로 쌀 사면 된다_제천시 덕산면의 만화가 이은홍
화염병보다 강했던 만화 ‘깡순이’
#우리 마을 통장님, 알고 보니 미술 작가_청주시 사직동의 653예술상회 이종현 작가
강원도 정선군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순진했던 이웃이 강원랜드 카지노에 빠져 폐인이 된 이야기를. 충남 태안군 만리포 주민들은, 바다에 살면 얼마나 낭만적이냐는 질문에, 바닷바람 짠냄새를 견디면 살아 보라고 말했다. 전라도 지리산 언저리 어느 마을사람은 공기가 좋다는 말에, 자연의 가혹함을 버티며 산에서 지내보라고 꾸짖듯 말했다. 구원을 찾아 떠났다가 귀향해 다시 전투를 벌이는 영화 『매드맥스』 속 여전사들처럼, 이 작가는 청주로 돌아왔다.
이 작가는 아이들과 ‘어린이 별동대’를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을 만나 지역의 역사에 대해 듣고 지역 문화유산을 찾아 기록했다. 그것을 벽화나 콜라주 작품 등으로 표현해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또 이 작가는 수년째 주민 자서전을 써서 이웃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고 있다. 인터뷰 대상은 공인중개사와 철물점 사장, 동네 이발사 등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소소한 개인사를 듣고 기록해 공동체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수묵 누드’ 개척한 그녀의 그림 인생_충주시 동량면의 화가 문은희
#쾌락이 있고 예술이 꽃피는 시골 만화방_괴산군 문광면의 탑골만화방 양철모 작가
호두나무 심을 시골집 찾아왔다 만화방 열어. 집주인의 증조할아버지가 심은 아름드리 호두나무에서 수확. 나무와 열매 그리고 가족의 유산. 그 호두 한 알에는 자연이 키운 ‘우주의 살’이 꽉 차 있었다.
“솔직히 건물을 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보다 고쳐 쓰는 게 더 손이 많이 가요. 그래도 재생이 더 생태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겨울에는 춥지만 더 운치 있고요. 함께 가까이 앉아 난로를 피우죠. 고구마도 구워 먹고요.
불편해도 즐겁습니다.”
“시골이 문화 소외 지역이라고들 해요. 그런데 제 생각에 삶의 문화는 시골이 더 풍부해요.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고 또 축제를 하고요. 도시에서 문화가 풍부하다는 것은 돈을 주고 소유할 수 있는 것들, 가령 영화를 보거나 세련된 갤러리에 다니는 일들이 많다는 거죠. 자신의 직접적인 삶과 개별화돼 있죠. 하지만 시골에는 공동체 문화뿐만 아니라 자연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문화가 널려 있어요.”
#예쁜 꽃밭 그리려고 한갓진 농촌에 살아요_충주시 엄정면에 사는 그림책 작가 정승각
정 작가가 맞닥뜨린 가장 큰 벽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강아지똥이 돼야 강아지똥을 그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를 그리려고 할 때 기술적으로 물감을 흘려 볼까 아니면 뿌려 볼까 고민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냥 비를 맞아요. 강아지똥이 골목길에서 비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에요…”
“서양화 데생 기술이 좋다고 우리나라 외양간이나 농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전통 색과 전통 음악의 가락을 알아야 우리 것을 그릴 수 있죠. 선을 그리는 건 이성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몸으로 그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민요도 배우고 장구도 치고 노래극도 해요. 그래야 우리만의 선이 나와요.”
‘삐뽀삐뽀’가 아니라 ‘위용…웨용….위용…웨용’. 형용사 하나 상투적으로 따라 쓰지 않는다.
“아롱다롱 표현하는 동심 천사주의가 동화책을 망쳐요. 학습된 언어가 아니라 아이들이 처음 느낀 그대로 쓰도록 해야 해요. 아이들은 그림과 문자를 접할 때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만져 보고 냄새 맡아 보며 오감을 동원해 책을 느끼거든요.”
꽃과 새를 그리기 위해 농촌에 산다
#주류 전통음악에서 뛰쳐나온 소리계의 펑크 로커_충주시 신니면의 경서도소리꾼 권재은
“소리가 별 것 있나요.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내 안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말하는 거죠.”
판소리가 소설이라면 경서도소리는 시.
경서도소리? 서울과 경기, 충청 일부 지역에서 부르는 경기민요와 평안도, 황해도 중심의 서도민요을 묶어 일컫는 말
남도소리는 뱃속에서 시작해 목과 가슴을 울리는 탁성이지만, 경서도 소리는 비성과 두성을 쓰는 날 서고 강한 소리다.
경서도소리꾼은 남도소리를 하지 않고 남도소리꾼은 경서도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가 꽹과리를 치고 나서면 망설이던 지역민들이 따라 나서서 절로 데모가 형성되고는 했다.”- 신경림의 『사람 사는 이야기』
“선생 부재에 대한 갈증은 음반이 해결해 줬어요. 전통음악만 가지고 전통음악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림, 문학, 다른 장르의 음악을 통해 소리를 배웠죠.”
제3세계 음악을 찾아서. 낯선 음악을 듣다 보면 익숙한 것도 다시 보인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저축하듯 소리 연습을 하라”
독학, 아흔이 넘어서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처럼 연습을 ‘저축’이라고 표현했다.
오늘 연습해서 오늘 당장 바뀌진 않지만 내일 달라지기 위한 저축이 된다는 것이다.
“산속에 있으니까 내면이 깊어지는 게 있어요. 뭔가 그리워하잖아요. 적당히 그리워야 상대방을 볼 수 있고.”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종이를 뜨다_청주시 문의면 공예가 이종국
그의 탁월한 손재주.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말한 원시부족의 탁월한 손재주, ‘브리콜라주(bricolage)’가 있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고 주변의 온갖 재료를 해체하고 융합하는 능력, 쓸모없고 연관 없는 것들을 모아 최상의 작품으로 만드는 자질이다.
사회적 기업으로 가 볼까 했지만 혼자서는 무리라고 느꼈다. 개인이 아닌 지역 또는 기업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1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됐다고 봐요…중국은 국가에서 종이를 관리해요. 우리나라는 표준화된 제지법이나 철학이 없어요. 숭례문 공사 과정에서 계속 오차가 난 게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축적된 기술을 기록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안 했으니까.”
#자계예술촌에서 벌어지는 ‘그믐달의 들놀음’_영동군 용화면 박창호 예술감독
“예술잔치 부제가 ‘다시 촌스러움’이에요. 촌스럽다는 말을 대개 부정적으로 쓰잖아요. 하지만 촌스럽다는 것은 농부가 나락 농사를 고집하는 것처럼 기본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것을 충실히 하고 그다음 대가를 바라는 거죠…”
글쟁이들은 글로 사회 부조리를 이야기하지만, 저희 연극인들은 고전 희곡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표현하죠.
“공연 요금을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때가 있어요. 공연을 보면서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와 가치들이 있거든요. 우리 연극인이 즐겁게 베풀 수 있는 것이고 공연이고, 농민에겐 그게 농산물이 되겠지요.”
고립에서 얻는 더 큰 자유
#비바람 속에서도 뒷마당을 묵묵히 지키던 장독처럼_청주시 오송읍 박재환 옹기장
#가난한 예술가와 활동가가 쉬어 갈 수 있는 곳_괴산군 칠성면 숲속작은책방
동화 속 장면 연상되는 가정식 서점
책으로 마을 재생하기
『유럽의 책 마을을 가다』 유럽 책 마을 스물네 곳 탐방, 시골 사람들이 헌책을 사고팔며 책으로 마을을 재생한 이야기. 영국의 ‘헤이온와이’
“책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 표지가 최대한 많이 보이도록 책 간격을 느슨하게 배치. 유럽의 책 마을을 다니며 배운 비법
지금 저희가 상상도 못했던 서점을 만든 것처럼 미리 불안해하지 않으려고요. 현재에 집중하려고요.
연탄아트작가 림민.
“10대와 20대 때 서울이란 도시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였어요. 나도 찬란히 빛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끊임없이 꿈을 갉아먹는 도시가 아닌가, 소비로 충동해서 낙오자로 전락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도시는 꿈과 욕망을 채워 주는 곳이 아니라 유혹하고 좌절하게 만들고, 채워질 수 없는 꿈 때문에 상처받고 낙오하게 만드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는 걸 알게 한 건 변방이었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쁘게 산다. 그들은 행복하게 산다. 그들은 사막에 살지 않고 숲에 산다. 그들은 현실을 도피해 사는 게 아니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며 사는 것이다. 그들은 치열하게 자기 문화를 만들고 있다. 스스로 풍부해지고 있다. 그들은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안다. 그들은 가치 있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들은 자기 입으로 “하느님,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이들이다. 그 약속 때문에 운명이 바뀐 이들이다. 아니 자기 운명을 찾은 이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공연을 보러 온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마라. 그 길에서 벗어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 할아버지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너무 행복하다. 너희들도 꼭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변방의식을 일깨우는_송재봉(충북NGO 센터장)
한 영화 속 배우의 “뭣이 중헌디?”라는 한마디가 함축하는 바와 같이, 진정한 삶의 가치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시대의 아픔과 난관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해 준다.
대의 스승 고 신영복 선생님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변방성과 변방의식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