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되는 글쓰기. 윌리엄 진서. p449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
#쓰면서 배운다
이 책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라면 갖게 되는 두 가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쓰였다. 하나는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문학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이 과학이나 수학 얘기에 질겁하듯이 과학, 수학이 적성에 맞는 학생들은 영문학, 철학, 미술처럼 숫자나 공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문학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나는 우리가 평생 짐처럼 끌고 다니는 이러한 두려움이 대개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면서 한 가지 핵심적인 사실, 즉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깨닫기 위해 글을 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하다못해 편지 쓰기 같은 가장 단순한 방식의 글쓰기조차 얼마나 자주 불분명한 생각을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던가.
마침내 나는 글쓰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배움이 동일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범교과적 글쓰기’는 단순히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학생을 쓰도록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배우기를 겁내는 학생을 배우게 만드는 기술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모르는 주제에 대해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의문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글쓰기가 가능한가’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떻게 화학이나 물리학, 지질학 같은 분야에 대해 쓸 수 있는가?
#헤르메스와 주기율표
다양한 분야에서 흥미로운 작업을 해 온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접근 불가능할 만큼 전문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것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또는 남이 그것에 대해 쓴 글을 편집하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주제는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을 문장이라는 논리적 단위로 잘게 쪼개는 작업을 통해,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씩 써 나가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W’강의. 범교과적 글쓰기. 글쓰기 교육을 국어 교사에게만 맡겨 둘 것이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필수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것
글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평생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교육제도와 관련.
우선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책임을 국어 교사에게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다.
대부분의 국어 교사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정작 글쓰기가 아니다. 국어 교사의 진짜 전공은 문학.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 즉 남이 쓴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 내는 법을 가르친다. 교사로 채용된 것도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배운 교수법도 문학을 가르치는 것. 따라서 국어 교사가 내주는 글쓰기 숙제는 대개 문학과 관련돼 있다. 학생들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있다.
명료하게 글을 쓰고, 명료하게 글을 읽는 약간의 수고를 감내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학문은 없다.
읽기, 쓰기, 추론하기. 이 세가기 요소가 한데 결합한 것이 배움이다. 우리가 배우고가 하는 학문에 대해 글을 씀으로써 그 학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추론하기는 주의지속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아진 요즘 TV세대 아이들이 잃어버린 기술이다. 글쓰기는 우리 아이들이 이 기술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읽기, 쓰기, 생각하기는 통합된 하나의 과정입니다. 아무리 가치 있는 아이디어라 해도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세상의 모든 경제학 이론을 공부한다 해도 명료한 사고와 명료한 글쓰기 없이는 그 모든 것이 헛일이다.”
애매성은 소음이다. 불필요한 중복은 소음이다. 잘못된 허위 사용은 소음이다. 모호성은 소음이다. 전문용어는 소음이다. 과장과 허세는 소음이다. 난삽함은 소음이다. 저 모든 불필요한 형용사, 불필요한 부사, 동사에 붙는 온갖 쓸모없는 전치사, 군더더기에 불과한 저 모든 어구는 소음이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고른 구체적인 어휘에서 온다. 생생한 명사, 효과적인 형용사, 강력한 동사, 군더더기는 전혀 없다. 더도 덜고 아닌, 꼭 필요한 만큼의 단어만으로 쓰인 글이다.
훌륭한 음악 글쓰기가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독자를 돕듯이, 훌륭한 미술 글쓰기는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독자를 돕는다.
많은 논문들을 접하며 얻은 교훈? 세심하게 쓰이고 편집된 훌륭한 글을 통해서라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학문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길을 잃거나 지루한 독자? 글 속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면 독자에게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즐거움을 빼앗고, 글은 순례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의 이야기처럼 낡고 진부해질 것이다.
글쓰기는 선형적이고 순차적이다.
글을 쓸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선행 지식이 아니라 정보를 서술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능력이다.
오직 쓰기, 다시 쓰기, 다듬기, 구체화하기의 힘겨운 반복 작업을 통해서만 한 편의 명확하고 간결한 글을 완성할 수 있다.
역사학자의 글쓰기. 역사적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글쓰기.
말할 것도 없이 역사학과 글쓰기는 자연스러운 동맹이다
역사학 교수들은 늘 글쓰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명료한 글쓰기는 명료한 사고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따라서 글쓰기가 배움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철학의 학문적 난해성이 어떤 철학 작품의 난해성에 대한 참작 사유는 될 수 있을지라도 비난을 면케할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불분명한 사고는 글쓰기의 가장 큰 적이다.
보고서 평가. “…결국 학생들의 문제는 글쓰기 능력이 아니라 사고 능력에 있었던 거죠.”
“읽기, 쓰기, 생각하기는 통합된 하나의 과정입니다. 아무리 가치 있는 아이디어라 해도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글쓰기의 교육적 효과가 다른 어떤 교육 수단도 닿을 수 없는 세밀한 영역에까지 미친다는 사실.
간결성은 의식의 체계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다.
잔뜩 허세 부리는 언어?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는 글의 생동감을 죽인다. 좋은 글쓰기는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글을 살리는 동사. 개념명사를 능동형 동사로 바꿔라.
능동형 동사는 작가의 가장 좋은 벗이다.
우리 책은 글쓰기가 배움의 수단이라고 전제한다. 글쓰기는 이해의 수단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원동력이다.
학생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글로 서술하게 함으로써 그 이해 수준의 깊이를 좀 더 정확하게 잴 수 있고, 학생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도 체크할 수 있다.
글쓰기는 사고력을 키우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개념을 글로 설명하려면 먼저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글을 쓰며 머릿속에서 정리된 개념들은 더 이상 교사나 교과서 저자의 것이 아니라 글쓴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자존감을 높이는 도구가 된다.
겁낼 것 없다. 단지 도구 사용법을 익히는 것뿐이다. 글쓰기는 국어 교사나 글쓰기 교사만 다룰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도구가 아니다. 생각을 종이 위에 표현하는 단순한 기법일 뿐이다. 도구의 작동 방법을 배우는 즐거움을 누려라.
악보 읽는 법을 배우는 건 아무래도 틀린 것 같으니 화음을 가르쳐 줄께. 화음의 원리만 이해하면 어떤 곡이든 듣고 따라 연주할 수 있단다.
#역자 후기
글쓰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배움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다. 명료하고 간결한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이는 주체적인 배움의 과정이다.
배움으로서의 글쓰기는 스스로 앎의 지도를 완성해 가는 지도 제작자가 되게끔 우리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