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는 보리를 먹어야. 김기원. p358
기(氣) 운영 수행기
공부에 왕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사업을 하십시오.
기적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선생은 기적 속에 있으며, 선생이 나를 만나고, 내가 선생에게 말하는 이 사실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지를 말씀하시는데, 내가 보여드린다면 그것을 요술이거나 최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공부해 스스로 체득하시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진리의 길이 도가 아닐까요.
그럼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란 것은 우주 만물, 삼라만상의 생성과 존재, 그리고 소멸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아니겠습니까?…자의 기점은 O에서부터 재야지, 다른 데서 재면 길이가 안 나온다는 말씀이외다.
궁극의 것은 무엇일까요?
쪼개어도 쪼개어도 더이상 쪼갤 수 없는 궁극의 것, 그것을 알기 위해 현대 물리학은 입자 가속기를 만들어 원자다, 분자다, 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이 궁극이 아닌가 잠시 착각을 하기도 했지만…2,500년 전 석가는 아무런 기구 없이 그 근본을 공(空)이라 했지만, 그 공이란 말 한마디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우주의 지금 모습을 설명할 수 없어서 나는 O을 우주의 궁극으로 보고 있으며, 그 O의 흐름을 읽는 것을 기(氣)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에 오른다고 가정. 함께 등산하는 일행에게 정상이 어떻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만약 길을 묻더라도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묻는 것은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야 행여 지름길도 알 수 있고, 쉬어갈 곳도 가늠할 수 있으며 정상의 사정이 어떠한지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다.
스승님께서는 잠이 든 사이에 그 옆으로 무수한 인연들이 스치고 지나간 어떤 청년의 일화를 들려주시면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라도 무심히 스쳐 지나지 말고 유심히 지켜보고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이 공부의 기초라고 하셨다.
또 당연히 그러니까 그렇다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껍질을 깨지 않으면 병아리가 되어 나올 수 없듯이 자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고정 관념이나 인습 따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현실에 급급하거나 만족하지 말고 시야를 항상 넓게 가지고 미래를 보라.
선생님은 늘 본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셨다. 사물을 무심히 보지 말고 유심히 보라고 하셨고, 과거나 현실에 얽매인 시선을 과감히 들어올려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미래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기르라고 하셨다.
상인으로 성공하고 싶으면 상품보다 먼저 양심을 파는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
인과의 폭을 좁히면, 진리가 아닌 행위를 할 때는 반드시 반응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잣대로 삼아야 된다
바보나 할 짓? 몸은 하나인데,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머리, 공부를 해서 도사가 되겠다는 머리,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갈등하는 머리, 이렇게 머리가 셋이었는데 천궁당이 쫄닥 안 망하고 그나마 적자가 그것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도(道)는 이 세상 속에 있습니다. 세상(터·틈·틀)에는 사상(死象)이 있는가 하면, 살상이 있고, 사상(四象)이 있으며 사상(思象)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상을 볼 줄 아는 것이 공부의 바탕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타고 갈 수 있는 지혜가 열릴 때 비로소 수도를 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극한 상황에 도달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보리, 그것을 땅에 묻어주지 않으면 그 속의 것이 싹터 나올 수가 없다…내 가슴 속에 내재된 깨달음의 싹을 틔워 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로구나.
단군신화. 굴이 라는 특수한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졌을 때 그들 속에 내재된 참 성품을 보라는 것이었구나. 그 극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호랑이는 호랑이로 남지만, 극한 상황에서 견성을 한 곰은 웅녀가 된다.
기(氣)는 칼과 같다. 인류의 지금 모습이 마치 위험한 칼을 들고 노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잘못 쓰면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된다는 그 말씀, 그래서 아무나 함부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던 그 말씀도…
계를 어기면 바로 결과가 드러나야 잘못된 줄 알고 바른 방향으로 잡아나갈 수 있지. 만약 아무리 잘못을 해도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흔히들 도를 공부한다 하면 현실은 무시하거나 포기해 버린 체 내세로 미루어놓고 저승에서나 보자는식으로 이상을 추구하려 하는데, 그런 환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백성들이 많은 나라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보세요.
자기가 공부한 것을 응용해서 쓸 수 있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체(體)와 용(用)이 하나가 되고, ‘말’과 ‘씀’이 일치해 ‘말씀’이 되지요. 공덕을 쌓고 덕업을 닦는 도는 구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도포자락 날리며 수염 길러 산 속에 숨어서 무릎이나 치고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자기 정보를 수정하고 개선하고 발전시켜 승화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태벽이란 수정란이 자궁 벽에 착상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거듭 태어날 수 있는 통로가 극도로 좁아지는 시대가 태벽이기 때문에 내생을 기약할 시간적 여유가 극도로 없어 현실에서 바로 자기의 설계도를 수정, 개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공부의 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수라는 싸움을 잘하는 신들. 아수라장.
약육강식? 과연 그럴까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이 논리가 맞다면 세상에는 가장 강한 것 한 개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다 존재하지 말아야 옳은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봐도 약한 것이 있는가 하면, 또 강한 것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투쟁의 장으로 보는 것은 경쟁에서 지면 도태된다는 사고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또 전체를 못 보고 부분만을 본 인간의 편협된 시각이 빚은 착각이기도 합니다.
보르네오 모기 사건? 먹이사슬 관계의 이해, 그것은 수직적인 관계, 즉 약육강식의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
환경 부메랑 현상?수직적 관계가 아닌 순환적 관계의 생태계
분석만을 해서는 궁극을 할 수 없습니다. 분석하면서 통합을 할 줄 아는 지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연이나 우주에 도전할 때 그것을 극복의 대상이라 생각하면 결코 극복을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연은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어울려 사는 모태이고 우리의 어머니와 같습니다…우주는 정복할 수도 없고 정복당할 대상도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인식해 가는 것입니다. 상대와 합일하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갈 때 신부의 몸이 열리듯 우주는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참사람을 받아줄 것입니다.
우리가 믿되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까? 뚜렷한 결과로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들리는 말이라도 결과와 하나도 일치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단순한 말장난이요, 공허한 울림이며,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신도 인간을 위해서 어떤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맞고 내일은 맞지 않는 것을 결국 틀린 것이라는 이야기. 언제나 맞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맞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날이 새롭다는 말을 좋아하면서 물질 문명은 벌써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정신 문명은 아직도 2,000년 전, 혹은 2,500년 전의 사상에 발이 묶여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문 과학과 종교는 어떤 의미로 청동기 시대와 중세 봉건적 사고의 끊임없는 답습만을 해옴으로써 이미 죽고 없는 망령들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준다면서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구원을 준다면서 절망을 주고, 해탈을 준다면서 쓸데없는 계율로 꽁꽁 얽어매고 있는 실정. 인간 영혼의 승화에 앞장서야 할 종교가 오히려 자유로워야 할 영혼을 교리라는 것으로 옭죄이고, 일부 종단은 진리라는 포장을 씌운 협잡으로 기업화,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난 날들과는 달리 내 곁을 스쳐가는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만 느껴지고 있으니 찾아보면 측은지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도 있을 거야.
꽃나무 속에는 꽃이 들어있지만 꽃나무를 아무리 잘게 쪼개어 현미경으로 살핀다 해도 그 속에는 꽃이 없다. 계란 속에 닭이 있다, 하여 당장 계란을 박살내어 거기서 병아리를 찾으려 드는 것은 어리석다…기다리고 오래 참고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속에 숨겨진 보석을 볼 수 있다.
고정 관념 중에서도 가장 껍질이 단단한 것은 자신의 지식입니다.
타인과의 질서를 깨뜨리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만 지나치게 남들을 의식해서 내가 이렇게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의 눈이 있는데…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빼앗겨 할 일을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신성은 하늘의 신전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하늘이 들어있고, 신이 존재하며, 신성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찾으려 하니까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죠.
이 하늘에는 어떤 성인을 받아줄 만한 물질적인 하늘이 없다, 승천했다는 얘기는 하나의 비유일 뿐이고 내면의 세계로 깊이 들어갔다는 말일 것입니다.
산에서 오래 수도를 하다가 환속한 사람이 산 공부 헛공부다, 라고 하듯이
사람들은 상대를 자신의 반사된 거울로 삼지 않고, 남을 자신의 잣대로 삼으니 좌절하고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량 하숙생. 하숙생과 주인 아주머니는 한 생각에 왕과 왕비로 변해 왕비는 왕의 빈 지갑을 채워주고 있었다.
나도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다. 내 뱃속에 든 것이 우주의 씨앗이리. 그것이 이제 싹을 틔워 꿈틀거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순산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기분들은 모두 어디에 뿌리를 두고 피어나는 것들인가? 마음이다.
공은 텅 빈 것이 아니고, 텅 빈 충만함.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기와 무형의 세계를 부정하고, 물질적인 것하고만 연관지어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계로의 접근은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지식이나 상식의 낡은 안경을 벗고 보아야 새 세계가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이 육안으로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는 볼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에 세계를 지나쳐 보고, 무심히 보아 넘기는 수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염주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깁니다만 보리는 밖으로 밀어주도록 하십시오. 서로 당기기만 하면 떨어지고 단절되지만, 서로 밀어주면 이어져서 함께 올라가니 결국 밀어주던 염주가 돌아와 내 속으로 돌아옵니다.
시간을 아껴쓰고 만남을 소중히.
스승님의 가끔 만남의 씨줄, 날줄이 만드는 무늬가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을 알면 내 일을 알리라.
우리가 진리와 함께하고 있을 때 파동하는 모든 현상들은 직접적인 파장뿐 아니라 의미로서 살아 계시를 해주고 있다…그 의미를 바로 읽을 수 있을 때 나를 스치는 모든 만물은 내 스승이요, 살아있는 글씨(활구)이며, 보살의 현신이라, 이것이 바로 비로자나 법신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행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흐르는 도를 보는 것이니 누구든지..물을 봐도 물이 아닌 소위 말하는 한 소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위란 산술적인 계산이나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지다.
유체이탈. 우리의 영혼은 소립자보다 더 미세한 것이 틀림없다. 육신은 통 속에 갇혀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는데 영혼은 벽을 통과하고 거리를 초월했으니 그 바탕인 기는 걸림이 없다.
우리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그때 비로소 법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수한 말들이 난분분했습니다. 이것이 진리라면 발표된 글도 엄청납니다. 만약 인류 구제나 심판이 말로써 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성현들이 남긴 말과 글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절대란 상대가 없는 것인데, 아무리 자기가 전지 전능하다 할지라도 구원해 줄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으로부터 다시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절대자는 아닙니다. 단지 구원받을 대상들의 구원자. 즉 그 상대의 상대입니다…절대라는 것은 전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라는 개념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우주 전체이면서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속에 있는 것, 그 둘의 요소를 동시에 충족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근본의 주체가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밖에서 찾게 되고, 그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내 속에 갇혀 있는 절대자는 죽어갑니다.
스승은 떠나고. 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실히 실행하는 자에겐 이미 내가 그의 속에 있고, 나의 가르침을 틀리게 이해하고 실행에 게을리하고 타자의 옳은 표가 되지 못하는 자에게 나는 그의 스승도 아니며 가르침이 없었던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두 경우 모두 내가 자리할 의미가 없으며 나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흘러간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다가올 미래의 거울이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기를 가지고 순환하기 때문. 순환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제의 잘못을 내일 또 되풀이하는 것은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