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건축. 임석재. p431
일곱 번의 위기와 일곱 개의 자연? 이 책은 이런 배경 아래 환경 위기의 본질 및 그에 대한 해법을 서양문명이 자연을 대하고 운용해온 ‘자연사상의 역사’로 바라본 책이다.(말은 생각을, 집은 삶을, 건축은 문명을 담는 그릇이다!)
생태건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전 세계적으로도 이른바 ‘녹색 사업’은 차세대 성장 동력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 ‘녹색’이라는 말과 개념속에는 성장제일주의를 버리는 혁명적 문명관이 제일 앞머리에 나와야 맞는데, 이런 녹색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겠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환경 위기는 현재의 문명 패러다임 내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새로운 문명이 등장해야만 가능하다. 새로운 문명의 첫 번째 기준은 ‘성장률 0퍼센트’의 사회이다. 성장률이 0퍼센트가 되어도 망하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되는 새로운 경제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성장률을 따지지 않는 문명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발전과 성장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적절한 풍요와 안정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기술을 이미 이익 창출이라는 경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 이런 상태로 굴러가는 ‘녹색 기술’은 절대로 현재의 환경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너무 비현실적인 기술이상주의이다. 기술제일주의가 인류의 위기마저 돈벌이로 여기며 간악하게 모습을 바꿔 전 지구적 사기를 치는 허구적 기술이상주의일 뿐이다.
남은 것은 개인의 변화. 개인과 사회가 쌍방향으로 작동하며 거대한 흐름을 형성할 때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
기독교와 환경문제. 환경문제나 생태사상을 조금이라도 연구한 사람이라면 기독교를 피해갈 수 없다..기독교의 참 정신을 잘못 받아들여 인간의 이기심을 위해 악용한 일부 잘못된 현실 기독교가 환경 위기의 주범이다. ‘일곱 번의 위기’ 가운데 여러 번은 잘못된 기독교 탓이 크다.
생태문명의 실천의 장으로서 생태건축. 생태건축은 생태문명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천의 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에는 생태건축이 전무하다. 이름만 난무하지만 녹색 산업에 종속되어 그 꽁무니를 붙잡고 질질 끌려가는 형국이다…정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채 애매한 상태에 있는 현재의 생태건축은 목적과 범위, 의미와 내용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으며 따라서 양식 사조로서의 형식도 천차만별이다. 사회 전반에 ‘생태’라는 말이 난무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생태운동의 중심 대신 자본과 기술에 종속되어 그 논리를 돕는 보조 역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_자연, 생태사상, 건축
현대의 생태 위기는 20세기 이후만의 현상, 즉 공시적 현상인 것으로 알기 쉬우나 서양 인류의 오랜 역사와 늘 함께 있어오던 통시적인 현상이다.
표피적 가치에 현혹되어 이상의 교훈을 잊을수록 인류의 생활과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불안한 정서는 난폭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낳는다. 생활 속에서 자잘할 충돌과 마음속 증오는 커져만 간다. 존재 의지를 얻기 위한 마음의 안정은 기술이 더 큰 정신적 가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본능적 교훈에 충실할 때 얻어진다. 기술이 첨단화되고 치열해질수록 이것을 포함하는 정신적 가치도 그만큼 더 커지고 치열해져야 한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일지라도 기술에 의존하는 한 자연의 순환은 회복되지 않는다. 기술이 이미 너무 많이 자연과 분리되어버렸기 때문이다…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가정 위에 성립된 전통 기술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것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현대 기술을 최대한 포기해야 한다. 기술을 얻기 위해서 기술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이런 극단적 처방만이 자연의 순환을 원래대로 복원하려는 심층 생태학을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것만이 건축에서 심층 생태학의 의미를 구현하는 유일한 길이다.
#에필로그_방황하는 인류의 정착 문제
‘집 잃은 불안감’과 방황하는 인류. 현재의 환경 위기를 건축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집 잃은 불안감’에 해당된다. 화석연료의 사용에 따른 온난화는 사실 건축적 관점에서는 작은 문제일 것이다.
존재론적 확신을 심어주는 정신적 기능. 산업화와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이 기능이 무너지고 있는 것,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도시화에 따른 정주 조건의 상실. 현대 대도시는 사방 균등성과 투명성을 물리적 특징으로 한다. 사방 균등성은 정주 조건 가운데 하나인 동서남북의 방위 사이의 조형적 차이를 없앤다. 투명성은 또다른 정주 조건 가운데 하나인 적절한 폐쇄감을 깬다…인간의 존재감을 확보해주어야 할 주거 환경의 역할이 상실되면서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고 정신적으로 방황한다. 에워쌈과 열림 사이의 절절한 비율도 중요하다. 이런 조건들이 깨지면서 인간은 광야에 벌거벗긴 채 내던져진 것 같은 심리적 불안감에 휩싸이며 방황한다.
둘째, 땅에서 멀어짐으로써 자연과의 유기적 일체감을 상실한다.
셋째, 수평선이 사리지고 수직선에 매달려 삶으로써 뿌리가 잘린 것 같은 불안감이 증폭된다. 수평선은 평온의 선이고, 수직선은 흥분의 선. 수평선은 절제의 선이고 수직선은 물욕의 선. 수평선은 모태이고 안정이며 수직선은 분리이고 전진. 근대적 대도시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수평선의 도시. 수직선으로 둘러싸인 대도시에 살면 사람들은 쉽게 흥분하며 물욕의 포로가 된다. 땅에 등을 대지 못하고 땅에 발조차 붙이지 못하는 삶은 존재감을 확보해줄 수 없다. 땅과의 신체적 접촉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 조건이 상실된 삶은 뿌리를 잘린 나무처럼 허공에서 방황한다.
자연중심주의-자연은 예수의 살과 피이다
건축은 최일선에서 자연과 접하며 부딪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자연에 대한 태도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일곱 번째 위기_환경 위기
현대 기술은 더 이상 전통 기술과 같은 기술이 아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가정 위에 성립한 전통 기술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것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현대 기술을 최대한 포기해야 한다…이런 극단적 처방만이 자연의 순환을 원래대로 복원하려는 심층 생태학을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것만이 건축에서 심층 생태학의 의미를 구현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생태건축이며 건축에서의 지속가능성의 핵심 개념이다.
심층 생태학, 유기체로서의 자연.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일지라도 기술에 의존하는 한 자연의 순환은 회복되지 않는다.
친환경 기술들, 생태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얕은 생태학의 전형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 생태학은 자연을 섬기는 새로운 종교 형태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미신이나 정령주의에 기초한 원시 자연종교와는 많이 다른 현재 자연종교이다…자연의 규범력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태도는 이제 경외, 존경, 염치의 세 가지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얕은 생태학(shallow ecology). 환경 보존을 하되, 오로지 여전히 인간 중심적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최근에 약방의 감초처럼 모든 곳에 등장하는 ‘친환경’, ‘저탄소’, ‘녹색 에너지’,’녹색’ 등은 이런 생각을 담고 있다. 이런 단어들 뒤에는 항상 ‘기술’이 따라 붙는데 이는 인간의 기술에 의존해서 해서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을 반영한다.
거꾸로 가는 진화론? 역사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몸은 자연환경에 맞춰 자연능력이 향상되어야 하는데 적어도 열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기준에서만은 아주 심하게 퇴화하고 있다. 기계의 힘에 의존하면서 인간에게 고유한 자연적 능력이 쇠약해진 탓이다…의도대로라면 기계문명이 인간의 모든 생활에 진화와 발전을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제일 근원적 요소인 자연 능력을 죽이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철학적, 사상적 배경이 받쳐줘야 한다. 생태건축은 박람회 열어서 도배지 팔아먹고 흙집이나 짓고 말 일이 아니다. 생태건축은 20세기 기계문명을 대체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폐해를 줄여 인류의 생존을 담보하려는 거대한 문명운동이다. 철학과 사상의 배경이 없는 문명운동은 없다…온 국민이 부동산 투기에 미쳐 있는 이때, 과연 생태건축이 우리의 존재 조건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갖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철학과 사상이 정립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