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집. 노은주+임형남. p263
우리는 집에서 삽니다…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집의 그 본연의 가치는 어디론가 증발되고 엉뚱한 가치가 마치 주인인양 그 가운데 들어앉아 있습니다. 모두들 바라마지 않는 경제적 가치라든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손님들, 각종 매체를 통해 유행이라 일컬어지는 스타일과 그림들, 그런 것들이 집의 중요한 인자로 들어앉아 있어 정작 주인들은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 모든 일들은 바로 나부터, 나를 살리는 집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 필요하고 실천이 필요한지 고민해보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주택에 대한 높아진 관심 속에서 저는 다양한 집 설계 의뢰를 받고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집의 외연적인 부분에 치우쳤던 예전에 비해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집은 확실히 다르지만,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합니다. 특히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질문과 해답들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저는 집이라는 공간의 근원적인 의미를 되찾기 위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을 꺼내 보았습니다.
주위를 살피고 의식하다보니 정작 집에서 빠져 있는 ‘나’라는 존재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들을 1부에서, 2부에서는 안방, 거실, 빛과 바람 등 집의 요소들의 의미를, 3부에서는 아파트와 친환경건축 등 오해하기 쉬운 삶의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 4부에서는 ‘살리는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풀어보았습니다.
집을 그리고 짓는 데 있어서는 수학문제 풀이처럼 해답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다르고, 땅이 다르고, 그 안에 담길 삶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치 기성복 사이즈에 내 몸을 맞추듯 집에 내 몸을 맞추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몸에 맞는 집, 나에게 행복을 주는 집을 고민해야 하고, 구해야 합니다.
집이란 늘 저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아직 저도 살고 싶은 집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여기서 행복한가
행복이란. 참 막연합니다…교과서적인 이야기만 배웠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재산을 모읍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주 기본적인 사회생활의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여름을 즐기는 베짱이보다는 겨울을 생각하며 땀 흘리는 개미가 되라고 무척 집요하게 강요합니다.
그런데 과련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혹은 우리가 쌓아놓은 여러가지 유형과 무형의 재산만큼 행복을 줄까요. 마치 평생에 걸쳐 파랑새를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우리는 모두 앞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의 어려움은 견디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나은 일자리를 가져야 하고…, 우리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는 다음을, 여기보다는 저기를 그리워하며 삽니다.
#나는 나를 지키며 살고 있는가
강조점의 이동.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무척 많은 강조점의 이동이 일어납니다. 가령 결혼은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평생을 같이 살기 위한 것인데, 결혼 준비에 들어가는 순간 강조점은 이동합니다. 혼수와 예단으로 집안 간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구름같이 하객을 모을 준비를 하고, 아무도 듣지 않는 주례사를 들려줄 주례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재능이나 노력의 문제라기보다, 그림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개성이 있는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에게는 뭐랄까 천진함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처음 그림을 배울 때는 그런 어눌한 그림을 부끄러워했고 개성을 죽이기 위해 무척 노력했습니다. 무뚝뚝한 석고상, 그것도 국적을 알 수 없고 성격도 알 수 없는 머리만 보이는 얼굴을 며칠씩 뚫어지게 쳐다보고 종이에 옮기며 데생을 할 때, 연필 선이 종이 위에서 자꾸 숯가루처럼 뭉개져서 좌절하곤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늘 우리는 이런 의문에 부딪힙니다. 내가 잘 하고 있는가, 남들처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참 쉽게 하고, 쉽게 진단해주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한 믿음은 늘 뒷전입니다.
‘나를 살리는 일’은 다른 사람의 취향과 판단에 좌우되지 않고 내 마음 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믿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나를 위한 삶의 출발점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
집은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러자면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고, 어디선가 고장 난 레코드판이 끊임없이 되도는 것처럼 이상한 구호들이 멈추지 않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고 정신을 잃은 채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요.
처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저는 보통 그들이 예전에 살았거나 살고 싶었던 집 이야기를 물어봅니다.
#나는 어디서 살고 싶은가
집은 아파트여야 하고, 동네는 가격이 오를 만한 교통이 편리한 곳이어야 하고,…정작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주거의 형식이나 동네의 풍경에 대한 기호 같은 것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한 곳에 정주하는 개념이었던 집의 의미가, 필요에 의해서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마치 유목민의 천막 같은 의미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동네라는 곳이 지금처럼 이렇게 각박해진 가장 큰 이유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집이라는 곳, 동네라는 곳이 잠시 있다가 금세 옮기는 임시 거처라는 의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와서 생산 수단과 사회 환경의 변화로 ‘공동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로 붕괴되면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게 되었습니다.
살인적인 도시의 땅값으로 이익을 보는 것을 결국 개인들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들입니다. 그들에 의해 주택정책이 좌우되면서, 사람들은 살고 싶은 장소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아 불편한 마음으로 늘 떠돌아 다닙니다. 동네를 없애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모순적인 ‘주택사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싶은 장소에 자연스럽게 모여서 살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집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주택정책이 펼쳐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람들 살리고 도시를 살리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집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저는 집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가치는 느티나무의 그 너른 품같은 ‘안락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편한 직장도, 아무리 화려한 자리도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아무렇게나 누워 쉴 수 있는 집이 주는 든든함과 편안함과 안온함에 비견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의 집은 누구를 위한 집인가
궁극적으로는 가족이 시작이며 끝이지요. 그러나 요즘의 집에는 가족이 없습니다.
그냥 집만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밤이나 12시 넘어 가족들이 자신의 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집을 비워두고 아이들을 닦달하는 이상한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냥 다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위안하며, 혹시 모를 자식의 성공적인 대학 입시를 위해 참아야 하는 걸까요. 집을 다시 가족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건 그냥 우리가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는 대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의 최후의 보루는 가족입니다.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집입니다.
우리 집은 나를 위한 집이자, 나와 함께 살아갈 누군가를 위한 집. 화려하진 않아도 불편함은 없고, 비싸지 않아도 함께 나누는 삶이 가능한 그런 집을 꿈꾸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집에 머무는가
#내 몸에 맞는 크기의 집은
퇴계는 도산서당을, 남명은 산천재를, 우암은 남간정사를 남겨놓았습니다.
그 집들의 크기를 대충 계산해보았더니 대략 열 평 내외, 정말 작은 집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로 머무르던 방의 크기도 두 평 남짓이었습니다. 그런 큰 스승들이 지어낸 작은 집은 좀 다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규모가 작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인생에 대한 암시를 주는 것만 같습니다.
20평 내외의 아주 작고 단순한 집 한 채. ‘금산주택’. 방 두 칸과 마루 두 칸, 그리고 화장실과 부엌을 넣은 집.
경향하우징페어 건축박람회, ‘3x3x3 퍼펙트 하우스’. 약 2.7평의 작은 공간으로 거주를 위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설계 실험.
자신 만의 공간으로서 작은 집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의식의 전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집이란 단순히 규모가 작은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이며, 자기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더욱 깊이 배어 있습니다. 집을 통해 자기가 완성됩니다.
##나를 살리는 집
#고독과 사색의 공간
고독은 사색을 불러오고 사색은 필연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불러옵니다.
철학적인 은유라기보다는 누구나 겪는, 환경에 따른 인간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 우리는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집을 지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살아갑니다. 한쪽에서는 음식이 남아서 버리며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한쪽에서는 음식이 부족해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과잉은 필연적으로 반대의 결핍을 느끼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글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정작 그 안의 개인은 누구와도 진심어린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고, 과잉의 영양 속에서도 사람들은 헛헛한 속을 메우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나 인터넷 연결이 전혀 안 되는 일본의 어떤 료칸은 바깥과의 연결을 잠시 끊고 혼자 조용히 휴식하고 싶은 사람들이 밀려오는 덕에 늘 6개월 이상 예약이 밀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햇빛이 가득한 남쪽 창
#바람이 향기로운 화장실
결국 돌고 돌아 지금의 화장실보다 예전의 화장실이 얼마나 친환경적이고 훨씬 생각이 깊었나 하고 아무리 추어올려도, 화장실을 이제 예전처럼 다시 바꾸기는 힘이 들 것입니다.
#어른도 필요한 놀이의 공간
#푸른 휴식의 발코니와 옥상정원
##우리는 살리는 집
#진정한 친환경 건축이란
단열과 기밀성을 너무 중심에 가져다 놓고 보면 공기의 쾌적성을 유지하기는 힘들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패시브 하우스라는 개념은 무척 좋은데 물 좋고 산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전원에 가서, 냉기와 바람을 잡고 에너지를 절약하겠다고 꽁꽁 막아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환경친화는 자연과의 조화입니다.
#단열과 환기에 대한 오해
창호지 창은 겨울에 덜 춥고 여름에 덜 더운 훌륭한 단열벽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중외피(double skin). 말 그대로 외벽을 이중으로 만들어 환기가 가능한 완충공간을 두는 것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 시인의 ‘섬’
마치 효율이 시대의 최고 가치이던 시절이 얼마나 사람을 짓밟았는지에 대한 반성처럼, 우리는 이제 좀 ‘쓸데없음’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기재배를 하듯이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 그러나 주변에서 보기에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감행하는 무모한 도전을 보는 듯 위태로운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오히려 제가 그 사람들에게 할 이야기입니다. 마치 최고의 속도로 날아갈 수 있도록 거의 끊어지기 전까지 당기는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걱정이 이만저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라면 저런 긴장 속에서 일주일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육이란 사람을 모두 똑같이 만들기 위해 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각기 다른 개성을 실린 인격체로서 완성시키기 위해 하는 것.
어려운 설계 수업? 각자의 생각을 전개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 밑도 끝도 없는 방식의 수업은 너무나 어렵고 당황스러운 모양. 그 이유가 동네도 사라지고 골목길도 사라지고, 평생을 아파트처럼 이사해도 늘 구조가 같은 집에서 살아온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에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똑같은 내용을 배우고 익히게 하는 학교와 학원을 다닌 아이들이 공간에 대해, 도시에 대해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얻을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정작 아이들이 자라며 마땅히 누려야 할 즐거움과 창조적 경험들을 아이들로부터 빼앗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학교의 눈물
저는 근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교육이라는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리는 집을 그리고 짓다
#자연에 대한 예의
전통 매사냥 법. 매를 ‘잡는’ 것이 아니라 매를 하늘에서 ‘받는’다고 합니다.
#좋은 땅을 고르는 방법
‘풍경무상’. 경치는 늘 변하는 것이고 경치가 변하지 않더라도 내 경관을 가리는 다양한 장애물들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내가 온전히 경치를 소유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런 정신은 풍경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풍경을 소유하기 위해 행해지는 여러 가지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땅에 대한 이야기? 지리학자 최창조 교수의 아버지 묏자리는 그 집 자식이 골라야 한다는 요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아버지에게서 피를 받고 몸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를테면 분신이기도 한 자식이야말로 아버지에게 맞는 땅을 알 수 있다는 것.
생전 돌아가신 분의 얼굴도 모르고 습관도 모르고 목소리도 모르는 지관이 갑자기 땅에 와서 그 자리를 봐주는 게 어떤 신빙성이 있냐는 말. “자식이 아버지의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가서 한나절 앉아 있어봐아. 그럼 안다” 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자꾸 가고 싶어진다면 나에게 맞는 땅입니다. 땅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감각기관을 열고 마을을 열고 그냥 땅을 느끼면 됩니다. 그것이 좋은 땅을 고르는 방법입니다.
#한옥처럼 누마루를 둔 집
기능적이 분리이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안방 영역만을 사용함으로써 난방비 절약을 하자는 의미. 구석방은 바닥에 구들장을 놓아 재래식 온돌방으로 꾸미기로.
#층층나무 옆, 삼대가 사는 집
행복은 내 마음에 있고, 내가 마음대로 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주변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행복한 집, 나를 위해 짓는 집 이야기,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사람의 꿈을 들어보고 나서 집을 지을 땅에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땅이 꾸는 꿈을 들어봅니다. 왜냐하면 결국 집을 짓는다는 것은 사람의 꿈과 땅의 꿈을 겹쳐놓는 일이기 때문이죠. 저희는 전문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늘 귀를 열어놓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