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티재 하늘 1. 권정생. p283
한국 근현대사 민중들의 삶을 가장 잘 그려낸 책
“한티재 하늘”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들풀처럼 밟히고 밟혀도 스러지지 않는 민중들의 삶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려 나간다. 이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가 일을 하면서 그에게 조용조용 들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이렇듯 “한티재 하늘”은 지난 1백여년 동안 우리 겨레가 헤쳐온 가시덤불을 뜨거운 사랑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뚫고 온, 하늘을 이고 나름대로 예쁘게 살다 죽어간 이름없는 민중들의 삶을, 오색실로 한 땀 한땀 비단에 수를 놓듯, 빛나는 서정으로 민족의 대서사시를 엮어내고 있다
정생(正生), 권정생 선생, 강아지 똥, 몽실언니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한티재 하늘’을 쓴 권정생은 생전에 어른들 욕심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파했다. 이 책은 열 권쯤 쓰려고 했는데 두 권을 썼다. 늘 오줌주머니를 차고 다닐 만큼 아파서 글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두 권만 읽어도 백성들이 어떻게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며 올곧은 세상을 찾아가는지 알 수 있다.
천지가 뒤흔들리고 난리가 나도 세상에는 아기가 끊임없이 태어났다. 조선의 골짝골짝마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기 때문에 모질게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아배요, 아배요, 나는 아배 얼굴이 어떻게 생깄는지도 모르니더. 할배로 뛰따라 그렇게 세상 뜨시고 어매하고 내하고 여지껏 고생고생 살았니더, 우리 어매 혼자 고생하면서 날 이만치나 키워줬니더. 그런데 아배요, 나는 인지부터 어옜으마 좋을리껴. 인생살이 아무 뜻도 없이 이릏기 그저 살아도 되는지, 아니마 나도 아배처럼 뭔가 할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괴로우이더. 아배요 아배요…”
“이건?”
“드나생이.”
“요건?”
“장깨나물.”
들나물 이름도 갖가지였다. 나랑마물, 사랑나물, 칼나물, 콧따데기, 돌쪼구, 씀바구, 달랭이, 고들빼기….참취, 곰취, 참뚝깔이, 개뚝깔이, 개미취, 미역취, 가지취, 바디취, 꿩졸라기, 꼬치대, 고수대, 민마늘, 기름나물, 삼나물, 칫동아리, 종발나물, 젓가락나물, 등어리나물, 잔대나물, 산미니리….
수동댁을 목이 쉬어 소리가 안 나도록 울었다. 그리고는 길을 걷고 걸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동쪽으로 동쪽으로 갔다. 짚신이 닳아 떨어지면 뉘 집이든 들어가 짚을 한 단 얻어 앉은 자리에서 물에 축여 손수 삼아 신었다. 허드렛일을 거들어 주고 한 끼씩 요기를 하고 밤이면 구석자리 방을 빌어 잠을 잤다. 청송, 진보, 영덕을 지나 울진 바닷가까지 갔다. 한 보름 나다니다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좋은 세상 만든다고 그랬제. 무단히 죽었나? 너어 아밴 사람노릇한 거지 어디 허투로 그리 했겠나?”
“누가 그걸 모리나. 아베는 목심까지 바쳐 죽었는데도 세상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는걸.”
두 소년은 벌써 세상과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할 만큼 자란 것일까?
떠도는 소문에는 신(돌석) 장군님은 도끼로 목을 벴는데도 그 목이 공중 높이 솟아올랐다가 도로 제자리에 내려와 감쪽같이 붙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신 장군은 자기 목을 자른 사촌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 장군은 사람이 아니라 영험을 지닌 도인이기 때문에 절대 죽지 않고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민심이다.
일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가장 큰 보약이다. 분들네도 그 일에 휩쓸리면서 죽은 깨끔이를 조금씩 잊어갔다.
올가을은 전에 없이 낟알들이 튼실하게 영글고 있었다. 가을이 있기에 여름의 고된 일도 그만큼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