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이 노자. 송기원. p275
우리시대 새로운 도덕경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이 뭔지 알아?”
“개천에서 난 용이야.”
“개천에서 난 용이 애오라지 찾는 게 뭔지 알아?”
“일등이야. 일등만 찾아. 그 용한테는 이 세상에 오로지 일등만 존재해. 이등도 안돼. 공부고 얼굴이고 무조건 일등이라야 해…”
“깔깔, 그렇게 개천에서 난 용이 바로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야.”
못난이 노자. 노자는 공부를 잘 하거나 힘이 세거나 마음이 착하거나 얼굴이 잘생겼거나 하는 잘난 ‘짱’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런 잘난 짱들은 절대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 노자입니다.
‘좋아, 아버지가 그렇다면, 인생 종친 주제에 까짓껏, 감히 노자나 한번 되어보지 뭐.’
그러나 바로 내 옆에 은정이가 있어서, 아니 살아있는 노자가 있어서, 나 또한 분명한 자각 아래 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못난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뒤집어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신 보물이 있는가를 은정이가 나에게 실제로 보여준 것입니다.
잘난 사람들보다 못난 사람들이 훨씬더 아름답고 눈부실 수 있다는 노자의 이 뒤집기가 정말 궁금하지요? 나 같은 못난이에게 노자란 바로 이 뒤집기에 다름 아닙니다.
못난이들의 이 눈부신 뒤집기는 어쩌면 노자할아버지가 쓴 『도덕경』이라는 글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난세를 이겨낼 수 있는 천하무적에 대한 노자할아버지의 주장은 뜻밖에도 매우 쉽고 간단합니다.
다름 아닌 도(道)입니다. 도가 무엇인가만 안다면 천하무적인 것입니다…우선 간단하게나마 도를 풀이한다면, 그 내용은 무위자연이라도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무위자연. 무위와 자연.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
결코 어렵지 않지요? 못난이 노자나 은정이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더 쉽습니다.
“생긴 대로 살자!”
무위자연이란 바로 ‘생긴 대로 살자’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대뜸 실망하는 사람도 없이 않을 것입니다. “에이,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천하무적이 된다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면 전혀 엉터리처럼 여겨지지요? 그런 그렇게 엉터리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생긴 대로 산다는 것은 억지로 뭘 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왜 일부러 하기 싫은 것들을 억지로 할까요? 그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이지요.
선생님에게, 친구들에게,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이지요.
못낭이 노자도 한때는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시절이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들에게 잘 보이려 들면 들수록 점점더 못난이가 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식으로 못난이가 되는 것에 거의 절망한 나머지 더이상 남들에게 잘 보이려 드는 것을 포기할 무렵에, 나는 우연하게도 노자할아버지를 만나 자신의 못난이야말로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부디 그대는 어짊과 올바름 때문에 세상사람들의 순박한 본성을 잃게 하지 마오. 어디 세상사람들뿐이겠소, 그대 또한 마찬가지요. 그대도 더 이상 어짊이나 올바름 따위는 따지지 말고, 꾸밈이 없는 그대 본래의 바탕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시오.”
“그대가 예로써 우러러 받드는 사람들은 이미 죽어 뼈조차 썩어 없어졌으며, 이제 그들의 흔적이라고는 오직 쓸데없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길에 오르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시골에 숨어 살아야 하오.
좋은 상인이란 어떠하오? 자신이 지닌 재산의 어느 하나 자랑하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숨기는 이가 좋은 상인이오. 군자도 마찬가지요. 설혹 속에 많은 덕을 지니고 있더라도 밖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바보처럼 어리석게 보여야 하오. 그런데 그대는 어떠하오? 만일 그대가 진정한 군자가 되려면, 당장에 잘난 척 뽐내는 짓과 욕심과 남에게 잘 보이려고 얌전떠는 표정과 가슴에 품고 있는 포부까지도 다 버리시오. 그 모든 것들은 그대에게 하등 이로울 것이 없소. 그대가 나에게 물은 예에 대해서 내가 해줄 말은 이게 다요.”
노자할아버지의 도나 혹은 안을 보는 눈으로 자신의 안을 바라보기 위하여, 좀 엉뚱하지만, 여기에서 몇해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뇌내혁명』이라는 책을 잠깐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진공묘유란 ‘태어나서부터 받아들이 모든 좌뇌 정보들인 알음알이를 없애고 명상의 상태에 들며, 참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 속에서 우뇌 정보들만이 가득하게 되는 아주 묘한 상태’입니다. 이 묘한 상태에서 바로 자긴의 안에 깃들어 있는 보물인 ‘신비한 방향성‘을 만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진보적인 뇌 연구가들이 최첨단 과학의 힘을 빌려 발견해낸 우뇌의 유전자정보와 그 정보의 신비한 방향성을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이며, 그 경지에 들어서면 동시에 누구나 부처님이 되는 길이라고 밝혀내다니요.
거듭 주장하지만, 못난이 노자에게 있어서 명상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좌뇌의 활동이 완전히 멈추고 우뇌만이 활동하는 상태에서 우뇌의 유전자정보에 깃들어 있는 신비한 방향성을 만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힌두어로는 ‘삼마디’라고 하고 한자로는 ‘삼매(三昧)’라고 읽는 삼매경이나 참선의 선정 또한 마지막 단계는 마찬가지로 좌뇌의 활동을 멈춘 채 우뇌의 순수한 상태에 들어 마침내 신비한 방향성을 만다는 것입니다.
#도를 도라고 말해버리면 이미 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런 신비한 방향성에 대해서 이것이다 하고 명쾌하게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그것을 해석하여 언어로 전달해줄 수 있는 좌뇌의 정보는 단 한톨도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좌뇌인 의식은 사라져버리고, 해석이 불가능한 우뇌의 무의식들만이 유전자정보들과 함께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의 천재도 우뇌의 신비한 방향성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뭐라고 생각해?”
“상처가 아닐까?”
“바보, 상처야말로 나를 성장시키니까.”
“상처라는 것은 남들과 부딪칠 때 오는 고통이야…그렇게 부딪쳐서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바로 그 상처 때문에 나는 성장하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상처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 나는 과감히 집을 뛰쳐 나올 수 있었지. 만일 내가 아빠와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고통이나 상처도 두려워한다면, 나는 아빠에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거야…”
한마디로 어느 모로 보나 못난이일 뿐인 자신을 믿는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남들의 눈이 아닌 바로 나의 눈으로 못난 자신을 보는 것이 바로 도를 닦는 것입니다.
“제발 바깥을 보는 눈으로 안까지 보려 하지 말아라, 안을 보는 데에는 안을 보는 눈이 따로 있다. 안을 보는 눈으로 도를 보면 도이지만, 바깥을 보는 눈으로 도를 보면 더이상 도가 아니다.”
좌뇌적인 사람과 우뇌적인 사람의 차이. 바깥을 보는 눈으로 도는 보는 사람이 좌뇌적인 사람, 안을 보는 눈으로 도를 보는 사람이 우뇌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 것입니다.
없고 있음에 매달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 읽으면 드디어 노자할아버지가 밝히는 ‘묘한 것들이 들고 나는 문’이라는 뜻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됩니다…부처님의 “참된 허공 속에 들면 묘한 어떤 것이 있다”는 말과 너무 닮아있지 않습니까?
상상력. 그런데 이 상상력이야말로 우리 같은 못난이가 가장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보물인 셈입니다. 왜냐구요? 원래 상상력이란 현실에서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것들을 메우기 위해서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우뇌가 발동하여 만들어내는 못난이들만의 비밀공간이거든요. 어른들의 어려운 말로 무슨 결핍감이니 상대적 빈곤이니 하는 것들이야말로 이 비밀공간을 만드는 가장 훌륭한 재료이며 또한 상상력의 원천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소위 범생이나 짱들은 상상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요. 그들은 주로 좌뇌만을 사용하는데, 좌뇌에는 어차피 상상력을 만들 수 있는 기능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 바깥만 보기 좋아하는 죄뇌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무기로, 상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그런 사람은 당연하게 좌뇌적인데, 사람들이 옳다고 하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만 여기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는 식입니다.
알음알이야말로 다른 말로는 분별지라고 한다고 합니다…못난이 노자식으로 말한다면, 이 알음알이란 다름 아닌, ‘태어나서 지금까지 배운 좌뇌 정보’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좌뇌 정보인 알음알이만 없애면, 아직 태어나기 전의 우뇌 정보들의 순수한 상태인 어떤 신비한 방향성에 도달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이지요.
“악마의 밥이나 되라- 내 책에는 그 말밖에는 없어요”
조르바는 내 팔을 잡았다.
“주인님, 한가지 내 생각을 말하지요. 내 말을 듣고 화를 내지는 마시구려. 당신 책일랑 몽땅 한곳에 쌓아서 불을 질러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비로소 바보를 면하고 제대로 올바른 사람이 될지. 그래야 저 돌맹이며 비며 갖가지 들꽃들이 당신을 아예 딴 사람으로 만들거외다.”
따라서 있고 없음은 서로 원인이 되어 있고 없으며/ 쉽고 어려움은 서로 원인이 되어 쉽고 어려우며….
불교용어에 ‘무이(無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낮과 밤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참과 거짓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깨달은 부처님과 깨닫지 못해 마냥 어리석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일 터입니다.
이 ‘무이’의 가르침을 못난이 노자식으로 쉽게 풀이한다면, 상식이며 알음알이를 혹은 분별지를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내공이란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하여 단전호흡 같은 수련으로 우주에 가득한 기를 받아들여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기르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것이다.
해탈. 결국 부처님의 해탈이란 생물학적인 삶의 편협한 눈에서 벗어나 우리 안에서 저 넓고 가없는 우주적인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 또한 마찬가지. 자신이 삶이 생물적인 1백년 따위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계속되는 우주적인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바로 그 순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상선약수.
에오라지, 남과 다투지 않으니 허물이 없다.
큰 도가 가지려면/ 어짊이나 올바름 같은 것이 생겨난다
지혜를 받들다 보면/ 큰 거짓이 생겨난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면/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며 인자함이 생겨난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난다
어차피 본성에 불과한 어짊이나 올바름 따위를 사람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시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도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지요.
이를테면 못난이 노자식으로는 지혜를 높이 받드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좌뇌적인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가족이 화목한 가정일수록 효도나 자애로움을 무슨 가훈으로 삼지 않습니다. 만약 가훈으로 삼는다면, 그 집은 화목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습니다…이렇듯 효도나 자애를 강요하는 가정이란, 노자할아버지가 보기에는 이미 큰 도가 가려져버리고 큰 거짓이 생겨난 가정일 수밖에 없지요.
#배우기를 그만두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f(x)+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랑크톤의 세포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는가…왜 협력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는가….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핀란드 대안학교? 학교에서 하는 일이 모름지기 즐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보다 더 자신의 적성에 맞는 놀이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수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역할이란, 오로지 학생들이 놀다가 방법을 몰라서 헤맬 때, 슬그머니 나타나 노는 방법을 일러주는 것뿐입니다.
그런 학교에서는 물론 ‘예’라는 대답과 ‘응’이라는 대답 사이의 차이도 없으며, 또한 ‘착함’과 ‘나쁨’의 사이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노자할아버지의 근심이나 걱정도 없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학생들 사이에 더이상 경쟁도 없으며 시험도 없습니다. 0교시도 없으며 야자도 없으며 우열반도 없습니다.
#발꿈치를 들고서는 오래 서있지 못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 자기자신을 아는 사람은 도에 밝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을 뿐이지만/ 자기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참으로 강하다
스스로 만족할 줄 하는 사람이 참다운 부자며/ 힘써 도를 좇는 사람이 참다운 뜻이 있다
자기가 있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고/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 권정생 할아버지! 삶 자체만으로도 노자할아버지가 우리시대에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니, 권정생 할아버지야말로 노자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우리시대의 성인이며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많은 똥덩이를 지닌 분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이라는 똥덩이, 질병이라는 똥덩이, 최종학력이 초등학교밖에 안되는 똥덩이, 그런데 기이하게도 못난이 노자에게는 바로 그런 똥덩이들이 있어서 권정생 할아버지가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마치 은정이에게 상처가 보물이 되듯이요.
“…슬로우푸드란 게 사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게 기본구조야. 재료부터 음식을 만들어내는 순간까지 내가 직접 준비한다. 그렇게 음식을 준비해서 그 음식을 먹는 순간까지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사람 모두 다 함께 사람냄새를 맡게 한다. 바로 그렇게 서로가 사람이라는 것을 즐기면서 만들고 또 먹자는 것이 슬로푸드인 거야.”
#도를 깨달은 사람은 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도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도를 모른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입을 막고, 눈과 귀를 닫으며,
자신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얼클어진 것을 풀며,
자신의 눈부신 빛을 감추어 기꺼이 티끌과 하나가 된다.
이를 일러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도와 깊이 하나를 이루었다고 한다.
싯타르타와 고빈다
“그대는 끝까지 나를 희롱하려 드는구려.”
“희롱하는 게 아니오. 나는 다만 내가 애써 찾은 나만의 지혜에 대하여 말할 뿐이오. 지식은 남에게 전할 수 있지만, 지혜는 결코 전할 수가 없는 거요. 사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지혜를 찾아낼 수 있소, 또 지혜롭게 살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 지혜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소. 그러나 지혜를 말로 전해주거나 가르쳐줄 수는 없소. 나는 이런 것을 청년시절에 이미 느끼었소. 그리고 내가 여러 스승들을 떠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소.”
변산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같은 하례객들과 함께, 결혼식에서 은정이와 나는 손을 잡고 외칠 것입니다.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
또 외칠 것입니다.
“생긴대로 살자!”
또 외칠 것입니다.
“못난이가 힘이다!”
내용이 엄청 좋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