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훌훌 뿌리는 직파 벼 자연재배. 김광화·장영란. p320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51
#생명, 그 근본에 대한 관심과 사랑
사실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먹는 쌀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겠나. 그나마 돈 주고 사 먹으면 간단한 일을. 하지만 돈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쓰려고 한다. 결국 우리 사회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사회가 되었다. 이 흐름에 휩쓸리다 보니 적정한 생산과 소비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안 해도 되는 생산을 하고, 안 해도 되는 소비를 하느라 또 다시 적지 않게 어네지를 쓴다. 그러다보니 쓰레기에 치여 살고, 삶을 건강하게 이어나가는 일이 쉽지 않은 게 또 하나의 현실이다. 겉보기에는 번지르르 잘 사는 것 같은데 알맹이가 없는 삶.
삶의 근본이란 생명이 충만한 삶일 테다. ‘겉볼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씨앗을 보면 겉보기가 좋은 녀석들이 알맹이도 좋다. 생명이 충만한 삶이란 바로 이런 씨앗 같은 삶이 아닐까.
내가 벼농사를 짓는 또 다른 이유는 단순히 쌀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쌀을 자급할 때 자족할 수 있는 범위 역시 상당히 넓다는 걸 깨닫는다. 삶의 근본으로 다가갈수록 모든 건 서로 연결되지 않은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근본이 되는 먹을거리는 건강, 자녀교육, 문화, 예술과도 뗄 수 없는 관계다.
직파 재배가 지닌 매력
삶은 크고 작은 선택의 이어짐이다. 귀농이나 귀촌도 선택이듯 벼농사도 마찬가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선택. 농사를 선택했지만, 농사에도 무수히 많은 선택이 따른다. 한두 작목으로 집중할 것인지, 여러 작물을 골고루 짓는 자급을 중심에 둘 것인지, 규모 역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 게다가 어떤 기계를 얼마나 쓰는가도 선택이다.
직파를 하자면 알아야 할 게 많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다고. 벼를 알고, 풀을 알며, 물을 알고, 땅을 알아야 한다.
모내기에 따르는 뿌리 다침이 없어 자연에 가깝다. 또한 제 본성대로 마음껏 가지치기를 하면서 줄기가 부챗살처럼 옆으로 퍼진다.
내가 소중하다면 밥도, 쌀도, 벼도
사실 오늘날 농사를 짓는 건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거나 다름없다. 돈 중심으로 세상이 굴러가다 보니 ‘돈 안되는 게 농사’라는 푸념을 곧잘 듣곤 한다.
그나마 농사 가운데서도 벼농사는 단위 면적당 소득이 낮다. 우리 일상에서 날마다 밥이 되어 우리 몸속을 지켜주는 소중한 쌀이 푸대접을 받는 세상.
그럼에도 굳이 왜 벼농사인가? 그 근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사랑이지 싶다. 내가 먹는 밥이 소중하다면 그 밥이 되는 쌀을 얻는 과정 역시 가능하면 사랑으로 어루만져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게 벼농사는 나와 우리 식구 목숨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기서도 힘이 남는다면 이웃과 나눌 정도로 규모를 늘릴 수는 있겠다.
풀 관리 비법? 그 비결은 논 관리에 있다. 논 수평을 잘 맞추고, 왕우렁이를 잘 이용하면 어렵지 않다.
겨울 이야기? ‘벼농사 인문학’
#봄_보고 또 보고
삽으로 논두렁 깍기
농사를 많이 그리고 빨리 하려고 하니 힘이 들고, 남성이나 기계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생명살이에 충실하면 나이와 성별, 장애조차 크게 걸림이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 이웃은 잘 보여준다.
논 갈기, 보 메기 그리고 논두렁 바르기
힘든 일 역시 자꾸 하다 보면 자신의 자세를 돌아보게 된다. 얼른 일을 끝내는 걸 목표로 삼기보다 자세를 바꾸어가면서 꼼꼼하고 차근차근하는 것이 좋다.
정성스러운 볍씨 준비
오늘날 볍씨는 저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는 힘을 많이 잃어버렸다.
직파에 대한 경험이 우리 사회에서 아주 드무니 꼭 기록하라. 기록을 남겨 두지 않다 보니 농사철이 다가오면 우선 나부터 헷갈린다. 지난해 볍씨를 얼마나 했더라?
사람과 벼가 서로 처지가 다르다…볍씨를 뿌릴 때도 하루 만에 뿌리지만 특히나 가을에 나락을 거두는 콤바인 작업은 기계 값이 워낙 비싸기에 넓은 면적을 한 번에 하려 하다.
벼 직파의 핵심은 싹을 틔운 다음에는 다른 잡초와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해야 한다는 것. 잡초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으면 직파 재배는 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섬세한 낫 갈기
이장님 낫은 한눈에 봐도 몇 년을 썼는지 모를 정도로 반달 모양으로 잘 닳아 있었다. 그야말로 삶으로 보여주는 예술품이다 싶을 만큼. 도대체 얼마나 내공을 쌓아야 저런 경지가 될까?
논두렁 풀베기와 야생 꽃밭
이렇게 풀을 알면 색다른 즐거움도 발견하게 된다…그분은 논두렁을 꽃밭으로 가꾼단다. 삶의 여유다…무엇이든 그렇지 않나.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다 예쁘다. 씀바귀도, 수영도,..개망초도 그렇다.
로타리와 써레질에 이어 곧바로 볍씨 뿌리기
못자리를 하고 모내기를 하는 농사에 견주면 직파는 거저먹기 같다. 대신 사전에 벼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농사법을 알다 보면 어느 농법이 더 나은가 하는 질문은 큰 뜻이 없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농법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는 점점 더 자신이 처한 환경, 자신이 가진 철학,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에 따른 맞춤형 농사로 나가리라고 나는 믿는다.
흙탕물 흩뿌림 직파
아무튼 흩뿌림은 처음 해보는 사람들한테는 쉽지 않는 일이다.
사람이 새를 당할 수가 없다.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논을 지킬 수는 없지 않는가.
벼 직파는 자연에 가까운 농사다. 변수가 얼마나 많나. 그 많은 변수가 두려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자연을 이해하고 생명살이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해준다. 조금 넉넉히 하면 자연은 그리 박하게 굴지 않는 거 같다.
직파 뒤 물 빼기와 논 지도 그리기
뿌리를 잘 내리게 눈그누기
직파 일주째, 논고랑(배수로) 내기
물과 물꼬를 나와 한 몸처럼
무논에서 자라는 풀, 그 기세를 미리 꺾어두자
#여름_벼한테 말 걸기
직파, 문제는 풀 잡기. 농촌진흥청 자료집에도 제초제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자연에 가까운 삶과 풀약을 거리가 멀다
가지치기(분얼)에 대한 이해와 공부
기울어도 다시 일어서는 직파 벼
논 지킴이: 거미, 청개구리, 사마귀, 잠자리
#가을_땅 한 번, 하늘 한 번
볍씨 거두기와 갈무리
최근에 육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 또 경쟁력 위주로 변하면서 볍씨를 직접 거두는 농가가 드물어졌다.
콤바인에서 홀태까지, 거꾸로 가는 시간여행
볏짚을 썰어넣는 작두질
쌀겨 거름 뿌리기와 논 갈아엎기
자연재배로 나아가는 무투입 농법
자연재배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설렌다. 하지만 그 내용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정확한 정의를 갖고 쓴다기보다 사람들마다 자기 형편껏 쓰는 편이다. 사실 자연과 재배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재배라는 말에는 이미 자연을 벗어나,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무투입 농사로 나아가려면 논 생명들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기적의 논』 겨울철 논에 물을 채워두고 논을 갈지 말라)
사실 자연재배의 역사가 길지만 이를 엄격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 사상적 뿌리는 노자라 하겠다. 그 핵심은 한마디로 무위자연. 그렇다고 그저 내버려두고 자연에 맡기는 게 아니다. 자연을 아는 만큼 무위의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겨울_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
돌아보면 몸과 마음을 농사에다가 맞추기 위한 자기 ‘정화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 몇 해는 시골 빈 집을 빌려 살다가 우리 집을 짓게 되었다. 농사지어 곳간에 쌀 있겠다. 내 집 있으니 삶의 안정감이 높아졌다. 무한경쟁의 제도권 교육 대신 자연주의 교육을 하기로 한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자급자족의 범위가 부쩍 넓어졌다. 부부가 함께 글을 쓰며 책을 몇 권 내게 되었다. 손수 자급하는 힘에 눈을 뜨면서 우리는 되도록 건강도 스스로 챙겼고, 문화나 예술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가능성을 알게 되고, 어느 정도 자족적인 삶을 꾸리게 되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볍씨 한 알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벼농사 하나에도 먹을거리, 건강, 자녀교육, 문화, 예술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밥을 짓자면?
사람은 의외로 무디다. 아니, 삶이 복잡해지고 바빠지면서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근본이 되는 것들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가 없다.
돈 주고 사 먹는 쌀보다 손수 농사지은 쌀이 더 맛나다. 남이 지은 밥보다 손수 지은 밥이 더 맛나다. 아마도 짓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성과 에너지가 들어가서 그렇지 싶다. 그렇지만 날마다 새로운 밥상을 차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밥상안식년’. 그동안 고생한 아내한테 한 해 동안 밥상 휴가를.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이 손수 밥상을 차려 보니 주부들이 새삼 위대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도 제대로 차려지면 그게 어디인다!
‘날마다 새로운 밥!’ 말 그대로 365일 다른 밥. 그러자 잡곡밥이 먼저 떠오른다. 잡곡이 일곱일 경우 127가지. 아홉일 경우는 511가지. 와 드디어 내가 얻고자 하는 답이 나왔다.
아내(?)를 위한 ‘밥상 안식년’. 솔직히 말하자면 밥상 안식년은 아내보다 먼저 나를 위한 것이다. 한 해 동안 밥상을 책임 있게 꾸려 본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독립된 인격으로 거듭나리라.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또한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으로서. 그동안 하루에 한 가지 반찬만 하다가 한 끼 밥상을 온전히 차려낸다면 나로서는 엄청난 발전이 아닌가.
밥상은 OO이다. 밥상은 생명이다. 밥상은 사랑이다. 밥상은 건강이다. 밥상은 식구다. 밥상은 아내다….중년 여성의 답? ‘밥상은 올가미’다. 이 답은 절규다.
논두렁에서 자라는 약초. 벼농사를 짓다 보면 아무래도 벼한테 집중하게 된다. 그 외에 풀이나 여러 생명들은 관심 밖이 되곤 한다….하지만 자연스러운 삶이란 여러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때로는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농사는 이런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놓았다.
음식으로 치면 우리와 가깝고 흔한 것들을 무시할 때도 몸에 탈이 날 밖에. 잡초가 약초…만일 건강을 자급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삶에서 이루어낼 영역 역시 엄청 넓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벼농사와 자식농사, 닮은 점과 다른 점
벼는 말이 없지만 아이들을 말을 한다. 벼가 병에 걸리면 농부는 벼한테 무릎을 꿇고 빈다. 벼는 말이 없기에 벼를 잘 관찰하고 또 공부를 하면서 그 답을 찾는 수밖에…이렇게 말을 하니 벼농사보다 쉬운 게 자식농사라 하겠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곡식한테 영감을 얻고 또 자녀교육에 대해 나름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게 되었다.(『아이들은 자연이다』)
논, 벼, 쌀, 밥,….쉽고도 근본이 되는 한 글자 우리말
내게는 이래저래 책이 좋았다…시골 어른들에게 물어보기..할아버지들은 몸으로 보여주는 건 잘하지만 말로 앞뒤를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서투른 편이다.
분얼? 글자만으로는 전혀 느낌이 안 온다. 아예 뇌가 멈춘다. 우리말로 ‘가지치기’라면 될 텐데. 어려운 말이 한두 자가 아니다.
그런데 직접 농사를 짓다 보면 우리말이 참 아름답고, 쉽고, 맛깔스럽다는 걸 깨닫는다. 그 가운데서도 한 글자로 된 우리말이 더 그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하게 보거나 듣거나 만들거나 먹는 것이 대부분 한 글자로 된 우리말이라는 사실. 몸, 쌀, 밥, 집, 옷, 물,…..이런 나누기는 내가 형편껏 해본 것이며 현실에서는 서로 연결된다. ‘몸’을 이어가자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하자면 ‘쌀’이 있어야 하며 쌀을 얻자면 ‘벼’를 키워야 한다.
가능하다면 한자로 바꾸어놓은 어려운 농사 말을 우리말로 다시 바꾸어보자. 자주 쓰는 말일수록 쉽고도 간단하니 이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삶의 근본이 되는 한 글자 우리말. 소리내어 찬찬히 읽어본다. 모, 벼, 몸, 쌀, 해, 물, 논, 흙, 들, 풀….
소비보다 창조하는 문화를
남에게 보여주거나 팔기 이전에 스스로가 먼저 필요해서 만드는 물건들…이런 물건들은 손으로 만들었기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런 삶과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고 지난날의 추억을 되씹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예전 삶 가운데 오늘과 만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를 잘 살려야 하리라. 돈 주고 시장에서 사서 쓰는 편리함 대신 손수 만들어 쓰면 그 나름 가치가 있다. 솜씨가 부족하면 어떠리. 제멋에 산다고도 하지 않는가.
나는 이런 내 모습을 두고 ‘현대판 머슴’이라 부른다. 돈 주고 사면 간간한 것들을 손수 하니 말이다. 아내가 해달라고도 하지 않은데 저 알아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내가 마님이 되어 자신을 칭찬해주길 은근히 바라면서.
남편이 상머슴이 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시간이 필요하다. 안 해보던 시골살이, 뭐든 손수 만들어 자급을 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남편이 꼴머슴 수준의 실력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도 자꾸 해보다 보면 실력이 는다…세월의 강을 넘어,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정성이 들어간 생활 공예가 주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야 마님 자격이 생긴다.
우리는 많은 걸 돈을 주고 사고, 또 소유한다. 더 나은 게 나오면 먼저 산 것들이 초라해진다. 형편이 허락하면 쉽게 버린다. 소비에는 상대적 박탈감이 항상 있다. 하지만 손수 만드는 것들은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 몸과 마음이 함께했기에 그 에너지가 고스란히 물건에 스민다.
상대적 박탈감 대신에 절대적 만족감을 느낀다. 누구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걸 내가 쓰는 내내 그야말로 소비가 아니라 아름다운 소유가 된다. 쓸수록 더 빛나는 물건들. 쓰다가 버릴 때는 쓰레기가 아니라 거름이나 땔감이 되는 것들. 소비하는 문화가 아닌, 생명의 문화는 거창한 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누리느 이러저런 창조 행위가 아닐까.
#얼마나 지어야 자급자족이 가능할까?
자급자족에 대한 개념? 사람마다 달랐다. 그럴 수밖에. 먹을거리에 중심을 두는 사람이 있고, 돈을 중심에 놓는 사람이 있어 사람마다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많이 달랐다. 비록 자급하는 정도가 비슷하더라도 자족을 하는지, 불만인지는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도 알았다…비록 자급은 안 되지만 자족하는 길이 다양하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점차 자급보다 자족에 무게 중심이 쏠린다.
귀농이 선택이듯, 자급자족농도 선택이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선택. 먹고 사는 그 근본에서 시작하지만 그 끝은 없는 거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 마음소득. 이 ‘마음 소득’은 참 다양하다. 고마움, 자신감, 충만함, 경이로움…해마다 농사를 지을수록 나와 함께하는 모든 생명들한테 고마운 마음이 더 깊이 든다. 벼한테, 실지렁이한테, 올챙이한테, 물한테, 흙한테, 하늘한테…농사는 하늘과 자연이 짓고, 사람이 조금 거들 뿐이라는 말을 언제 들어도 진리다.
글 잘보고 갑니다.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것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