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오덕. p339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
#억누르는 틀
나는 정말 무식한 사람…사실 나는 무식한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유식한 사람은 싫다. 우리 사회에 유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유식한 사람들이 세상을 망쳤다고 본다.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도 모두 유식한 사람들이었다. 이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유식한 사람들 아니고 누구인가?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가 참으로 견디기 힘들고 고치기 어려운 억압의 구조, 억누르고 억눌려 있는 틀로 꼼짝 못 하게 꽉 짜여 있다는 것이다. 지난날에 대면 요즘은 민주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아주 크게 달라졌다고 하고, 사실 언뜻 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겉모양만 보지 않고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사회 속속 가는 곳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은 심성의 바탕마다 어찌할 수 없는 억압의 장치가 꽉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또 사람들은 모두 모르고 있다…그것이 습관이라거나 전통이라거나 예의범절 같은 꼴로 나타나게 되면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거리라고까지 아주 잘못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모두 우리가 유식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버스 운전사와 대학 교수의 월급이 비슷하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손발을 움직여 일하는 사람은 어디서고 천덕꾸러기가 되고, 책이나 읽고 글이나 파는 사람은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이런 사회 질서가 당연하다고 모두가 알고 있다. 이런 역사를 우리는 몇백 년, 아니 천 년이 넘도록 이어왔다.
교육은 그 옛날의 서당 교육이고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고 언제나 한결같이 철저하게, 이런 사람 신분의 위아래를 구분짓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문학이고 예술이라는 것도 이런 억압구조의 질서를 포장하고 분장하는 노릇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참으로 절망스럽다.
그러나 길을 있다. 오직 한 곳에 길은 있다. 그 길은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있다.
벌써 길이 들어져 몸과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 억압의 틀 속에서 그 틀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세대들은 어쩔 수 없지만,…그렇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오직 하나 우리의 희망이다…여기서 교육의 문제를 말하게 되었는데, 이 교육이 또 기가 막힌 것이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해온 교육은 철저하게 이 괴상한 계층사회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주는 일.-『우리 말 큰사전』
우리가 하고 있는 학교의 교육은 절름발이 교육. 잡동사니 지식만을 머리에 쑤셔넣는 아주 형편없는 절름발이 교육이요,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교육이라고 할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상을 정직하게 바로 보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돈에 미쳐 있다.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까닭이 또 내가 보기로 아주 훤하다.
교육 때문이다.
끊임없이 머릿속에 잡동사니 지식만 쑤셔넣고, 서로 남 위에 올라서려고 죽을판 살판 다투도록 하는 인간성 죽이는 교육만 받아왔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모두 미쳐 버리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 평생 바느질 해서 모은 전 재산을 어느 대학에 바쳤다는 할머니 이야기. 얼마나 학교 공부가 소원이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학교 교육이라는 것을 얼마나 좋은 것으로 보았기에 그랬을까?..하지만…그 끔직한, 서로 잡아먹기 싸움판을 더 크게 벌이는 일에 그 귀한 돈이 쓰인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수백 년, 천 년을 내려온 억압의 질서에 길들여진 슬프디슬픈 종살이의 모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학교의 등급
우리나라는 교육의 목표며 중심이 죄다 대학에 가 있다.
한국 대학은 지성의 공간이 아니며 대다수 대학생들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지식인이 아니다. 대학생들은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마케팅 대상일 뿐이다.(취업학원)
‘학벌타파’ 국무회의 격론.
한완상 교육부 총리의 학벌 폐지 주장. 채용서류에 적는 학력란을 없애자.
그러나 그렇게 이뤄질 수 없게 되어 있다. 한 장관말고는 그 일을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장관들 가운데 아무도 그런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이런 일은 누구든지 다 옳다고 할 것이고, 또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훤한 이치로 쉽게 할 것 같은 일이 안 되는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억누르고 있는 사람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돈과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회초리 5대 이상 못 때린다? 참으로 기절초풍할 노릇. 이것이 이 나라의 교육 행정. 말 그대로 우수한 인력을 경쟁을 시켜 양성해서 뽑아낸 최고 지식집단의 사람들이 바로 그 교육행정을 관리하는 지혜를 한껏 나타낸 알맹이다!
#교사의 말과 학생의 말
#한문 글자와 한자말
#생명을 해방하는 표현교육
표현은 생명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생명은 표현을 하면서 자라난다. 사람에게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가. 교육에서 아이들이 표현을 자유롭게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한편 표현을 잘못하게 하거나 할 수 없게 막아버린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고 무서운 일이 터져나오게 되는가 하는 사실도 아무리 힘주어 말해도 지니치지 않을 것이다.
자살은 단 하나 마지막 남은 표현의 수단이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르치려고 하는 바로 그 아이들을 아는 일이다…가장 좋은 방법으로 아이들이 써놓은 글이다.
말을 못 하게 하는 교실. 오늘날의 학교가 얼마나 아이들을 벙어리로, 병신으로 만들어 놓는가…아이들이 하는 말이 도무지 아이의 말이 아니고 선생님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버릇으로 굳어진 형식교육의 말,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관료교육의 말이다. 무슨 ‘실천사항’을 정해서 ‘철저히’ 지키도록 ‘단속’하자는 것이 ‘복장단정’이니 ‘규율 엄수’니 하는 따위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왜 글쓰기를 싫어하는가? 아이들이 왜 글을 못 쓰는가? 그 까닭을 아이들 편에서 말하면 아주 간단하다. 쓰고 싶은 것을 못 쓰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자기의 이야기를 써서는 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에서 출발한다. 학 국가와 사회가 그런 것처럼, 학교와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숨통을 막는 것
나는 지금까지 거의 한평생을 아이들이 쓰는 글을 읽으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60내나 70년대까지는 우리 나라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그대로 쓰려고 하지 않고 남의 삶을 흉내내고, 어른들이 쓴 글을 흉내내는 짓을 글짓기라고 하였다. 학교에서 그런 교육만을 하였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말재주와 말장난을 가르쳐서 거짓스런 표현을 하게 하는 이런 글짓기와 동시짓기는 그 뒤 오늘날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히딩크가 한 일
그래 정말 이것이다!, 하고 탄복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한 대로 학벌이라는 것을 아주 무시해버린 것, 또 선후배의 층계에 따라 위아래를 구분하는 질서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것이다. 선수들을 기용하는 것부터 어떤 유력한 사람의 추천 따위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순전히 사람 위주로 실력만 보고 하였다니, 이것은 우리 쳬육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
#폭력으로 유지되는 학교의 질서
“지금의 학교구조는 교사들 스스로가 토론을 해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아니다”
“우리 학교의 경우 아침에 10분 정도 담임회의를 하지만 학생들의 생활 지도나 학급 운영 등의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공납금을 언제까지 내라든지, 언제까지 보고사항을 보고하라든지 하는 행정적인 사항이 회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폭력을 없애려면 먼저 학교의 의사소통구조가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교사들은 말한다.
#위대한 무식꾼들
그 옛날 한문학자들이 글을 쓰면서 풀 이름, 나무 이름, 제 입에 들어가는 곡식 이름 하나 우리 것으로 적어두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런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백성들의 피를 더럽혀놓았는지, 사실은 지금도 교육으로 아이들을 그렇게 병들게 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 꼴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우리 글로 쓴다고 하는데도 그렇다.
우선 시장에 가보라. 비닐봉지나 포대에 쌀을 쌀이라고 적어놓은 경우는 드물고 죄다 ‘백미’다. 콩은 ‘대두’, 검정콩은 ‘흑두’, 검은깨는 ‘흑임자’, 밀가루는 ‘소맥분’이다. ‘대두’ ‘흑임자’ 이런 말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어째서 쉬운 말로 적지 않고 장사한다는 사람들이 이러는가? 그러나 장사꾼들이 사람들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외국 것, 어려운 말로 적힌 것, 모르는 말로 적힌 물건을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농사꾼이라는 말도 거의 안 쓴다. 웬만하면 농장주다. 논밭이라 하지 않고 농장이라 하니 농장주가 되었다. 곡식은 ‘작물’이고 나물은 ‘야채’다. 신문에서 죄다 그렇게 쓰는 일본말이 그만 우리 농사말이 되었다. 김맨다거나 풀 뽑는다는 말은 간 곳 없고 제초한다고 하고, 풀 깍는 기계를 ‘풀깍개’라 하지 않고 ‘예취기’라 하는 일본말을 쓰는 것을 보면 이 기계가 일본에서 왔구나 싶지만, 일본에서 들여왔더라도 일본 한문글자말을 되지도 않는 한문 글자 소리로 읽는 ‘예취기’가 뭔가? 모를 심는 기계도 ‘모심개’라 하면 얼마나 좋은가, 이걸 또 ‘이앙기’라 하니 참 어이가 없다, 소만 치는 것도 농사라 하고 꽃만 가꾸는 것도 농사라고 해서 이것도 ‘(젖소)농사’ ‘꽃농사’하면 될 터인데, 요새는 ‘낙농업’ ‘화훼농업’한다. 꽃을 꽃이라 하면 값이 안 나가고 ‘화훼’라 해야 값이 나가는 모양이지. 농약은 뿌리는 게 아니고 샆오하는 것이고, 물도 뿌린다도 하지 않고 ‘살수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한자말을 관청에서 앞장서 쓰고 퍼뜨린다.
‘신토불이’라는 말도 농민들이 먼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어느 학자가 일본 책을 보고 유식함을 자랑하려고 썼을 것인데, 이것이 또 유행이 되어 장사꾼이고 농사꾼이고 다투어 쓰고 있다. ‘몸과 땅은 하나’라는 말이겠는데, 굳이 이런 뜻을 알리고 싶다면 우리 말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쉬운 우리 말로 써는 권위가 서지 않거든. 남들이 쳐다 보지 않거든. 그래서 ‘신토불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 그것도 한문 글자로 쓰게 된다.
한문 글자를 모르고 그 옛날부터 일만 하면서 살아온 우리 백성들이 우리 말을 얼마나 아름답고 참되게, 올바르고 재미있게, 넉넉하고 쓰기 좋게 가꾸어왔는가 하는 것은 한 가지 보기를 들어 말해보겠다.
어떤 물건이나 수효나 분량이나 넓이나 깊이를 말할 때, 단위를 가리키는 말 앞에 보통으로는 한·두·세·네·다섯….이런 수를 나타내는 매김씨(관형사)를 쓰는데, 단위를 나타내는 말의 첫소리가 어떻게 나는가에 따라 ‘네’는 ‘넉’이나 ‘너’가 된다…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누가 이렇게 정해놓았는가? 이것은 어떤 문법학자가 정한 것도 아니고 말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말을 저절로 그렇게 써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세 장-네 장, 세 말-네 말이라는 말소리가 자칫하면 다른 뜻을 가진 말소리처럼 느낄 수가 있다. 우리가 지금 글자로 이렇게 써서 눈으로 보고 하니까 그런 느낌이 안 들 것 같지만, 글을 떠나서 말로만 살아가던 사람들은 조금만 다른 말과 비슷해도 그것을 아주 날카롭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세’와 ‘네’에 와서는 ‘석’ 이나 ‘서’가 되든지, ‘서’나 ‘너’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말을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모두가 말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 글에 나타난 아이의 생각이 무척이나 순진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티없는 어린이 마음이야말로 우리 어른들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이란 사람들이 무슨 할 짓이 그렇게도 없어서 아이들 머리 자르는 일까지 이렇게 강제로 하려 할까? 이것도 분명히 폭력이다.
한 여중생의 글, 「스스로 일하는 즐거움」.
청소고 설거지고 빨래고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하는데 공부인들 얼마나 재미있게 하게 되겠는가? 가정생활이고 학교생활이 그럴 수 없이 행복할 것이다.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놀이처럼 되면 굳이 다른 어떤 놀이가 없어도 될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스스로 이렇게 삶을 즐거워하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닦달할 필요가 없고 무슨 꾸중을 할 핑계도 찾을 수 없다. 과외공부도 시킬 필요가 아주 없어진다. 쓰레기 문제, 청소 문제, 환경오염 문제도 이런 아이들이라면 스스로 잘 풀어갈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생활이고 가정생활을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삶’으로 보내게 된다면 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살아갈 것이니, 정치고 경제고 산업이고 사회의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문학과 예술도 비로소 삶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람을 짓누르고 아이들을 괴롭히던 글도 살아 있는 말을 적는 글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래서 이 땅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나라가 된다.
아이들을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는 일, 이것이 우리 겨레가 스스로 해방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