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다시 읽기. 노명식 역음. p670
#머리말
위대한 인물은 여러 모로 오해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큰그릇에 담긴 물을 옮겨 받으려면 옮겨 받는 그릇 역시 그만큼 커야 하듯이, 위대한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사상, 인격, 정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지적 정신적인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더구나 그 위대한 인물이 그가 살던 시대와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경우 그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조무래기들이 그 발언을 이해관계에 비추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못마땅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거기서 그 시대 지배자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 탓으로 화를 당하기도 하고….인류역사가 의로운 식자들과 예언자들의 수난의 자국으로 얼룩진 식자우환의 역사이기도 한 까닭이 거기 있다.
식자우환이 가장 심한 시대는 악이 횡행하고 선이 숨을 죽이는 시대인데, 지난 한 세기의 한국 역사가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그 여러 의로운 식자 중 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그는 지난 한 세기의 고난의 한국 역사가 낳은 의인이였으며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가 20세기 한국의 고난의 역사 위에 남긴 발자국은 남달리 특이하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20세기 한국의 세례 요한과 같은 존재였다.
함석헌은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야기….그 글들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성격의 글들이지만, 요새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글 잘 쓰는 사람의 손을 빌려쓴 그따위 흔해빠진 자서전 같은 데서 보는 글이 아니다. 그의 글 하나 하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의 인격과 사상이 그때그때 어떠한 역사적 사회적 어려움에 부대끼면서 성장의 상처와 아픔을 겼었던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 한 권의 책으로 한데 묶은 글들은 자서전적인 성격의 글들이기는 하지만, 어느 하나도 자기의 전기를 스스로 서술하려는 의도에서 씌여진 것은 없다…
함석헌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이 이 책이다.
함 선생은 “사람이란 결국 자기가 남긴 것으로써 그가 어떤 이었던가를 말해준다”
“아무 놈이면 제 소리 아닌 것 있나?….세상에 제 소리 이상도 못하고 제 소리 이하도 못하는 것이 사람이요, 나라요, 역사요, 맘이다…그저 다들 제 소리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모든 것이 다 결국 그의 인격이며 정신이며 그의 자서전이다.
이 책은 좀 별난 책이이기는 하나, 이 책을 역은 뜻은 조금도 별나지 않다! 오직 함 선생의 고난의 생애와 그 위대한 정신이 20세기 한국의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가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이들이 널리 알고 깨달아서,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면서 그를 거울삼아, 날마다 해마다 정신적 도덕적으로 부식해가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데 있다.
요새 돌아가는 세상 꼴. 그 개념조차 애매모호한 세계화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말들이 세상을 압도하는 가운데, 정부도 사회단체도, 심지어 교육까지도 자기들의 존재이유 자체가 마치 국가경쟁력의 강화에 있고 국가경쟁력은 경제력이 그 전부인 것처럼 국민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젊은이들의 귀와 눈이 오톤 돈에 몰려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함석헌을 연구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돈키호테 같은 시대착오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돈을 버는 것도 경제를 일으키는 것도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은 사람은 제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결국 실패한다…사람답지 않은 것들은 그 재주가 좋으면 좋을수록 그 학문과 기술이 높으면 높을수록 오히려 더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잔꾀로 나라와 사회를 망쳐 버린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국민의 정신의 양식은 책이다. 국민이 어떤 책을 많이 읽느냐는 그 국민의 정신이 어떤가를 가늠하게 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100년간 가장 많이 팔린 책?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신앙 책과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작품. 이 두 책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국민의 정신에 가장 많은 영양을 공급, 그 힘으로 근대 일본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100년 뒤 이 나라가 어떤 꼴의 나라일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매달 베스트셀러? 보다 100년 간의 베스트 셀러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함 선생의 저작물이 100년 후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100년간의 베스트 셀러의 하나가 되느냐 못 되느냐가 100년 후의 이 나라가 어떤 꼴의 나라일 것인가를 가늠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서론
예수, 선지자는 제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 겉모습은 쉽게 보여도 그 속알의 참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고 장기려 박사는 함 선생의 사상은 5백년 뒤에나 바로 이해될 것이라고 했다
위대한 예언자는 고대의 유대민족이나 현대의 인도, 한국과 같은 고난의 역사에서만 나온다. 지배자의 역사에서는 다른 분야의 위인은 나올지 몰라도 예언자는 못 나온다. 왜냐? 지배자의 역사는 지배자에게 고난의 참뜻을 가르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배자를 지배자가 되게 하는 것은 결국 그 물질적 군사적 힘이다. 무기를 궁극적인 것으로 믿는 삶의 태도를 가리켜 군국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군국주의는 폭력숭배 사상이고,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한다…억압과 채찍의 고통을 몸소 경험한 자만이 고난이 무엇인지 그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
토비를 거분한 킨타 쿤테. 이름을 지배자의 꼴대로 고친다는 것은 곧 지배자의 문화에 동화를 의미하고, 자기 정체성의 포기를 의미한다.
창씨개명. 그때 토비를 거부하고 킨타 쿤테를 고수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노예가 노예인 까닭은 그 정체성,그 자유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삶은 노예생활이었다? 토비만 있었고, 쿤테는 없었기 때문이다.
쿤테는 정신 이외의 모든 소유와 자유를 빼앗긴 완전 무소유의 인간이다. 쿤테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나는 토비가 아니다”고 울부짖는 그 정신뿐이었다. 물질적 형태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완전한 무소유의 자리, 오직 남은 것이란 정신밖에 없는 자리! 그런데 그 자리야말로 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예언자가 잉태되는 태반이다. 예언자는 정신밖에 없는 완전 무소유의 쿤테들 사이에서만 탄생한다. 20세기 한국에서 예언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그는 정신밖에 소유한 것이 없는 한국의 쿤테에서만 탄생한다.
함 선생은 일제시대에도 해방 후에도 한국의 쿤테였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만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런데 꽃이 열매를 맺으려면 그 화사한 아름다움을 접고 초라하게 시들어 떨어져야 한다. 함석헌사상도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제3기의 개화기를 접고 고독과 우수 속에서 농사와 연구, 사색과 기도의 구도자적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사람은 씨를 땅에 뿌리기는 하나, 그 씨앗이 새 생명을 낳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자기가 하는 일의 현실적 성과에 괘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초조하지도 않고 또 교만하지도 않다.
“도둑이야!” 5·16군사쿠테타 이후 그의 활동 영역은 종교적 사상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차원으로 더 크게 넓혀졌는데, 그것 또한 그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강도가 들었을 때 “도둑이야!” 소리지느는 것은 본능적 자연발생적인 행위이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한참 생각한 후에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하는 것도 아니다. “도둑이야!” 소리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둑을 방조하는 공범이다. 강도의 총칼이 무서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그만이 “도둑이야!” 소리질렀는데, 그 소리는 어떤 세속적 명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면 당연히 질러야 하는 소리였던 것뿐이다.
그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도 5·16 직후에 쓴 『5·16을 어떻게 볼까』와 그 이태 뒤에 쓴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는 두 글이었을 것이다.
함석헌을 정치운동가 혹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으로밖에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맨사람 함석헌을 보지 못한다. 맨사람 함석헌의 모든 활동은 함석헌사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무르익은 열매의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새 생명을 준비하는 생명운동이었다. 다만 그 씨앗이 정치의 밭에 뿌려지면 정치활동의 꼴로 보였고, 종교의 밭에 뿌려지면 종교의 꼴로, 사회의 밭에 뿌려지면 사회운동의 꼴로 보였을 뿐이다.
「5·16을 어떻게 볼까」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
「나는 왜 『씨알의 소리』는 내나」
#나의 인생 노트
남을 구속하거나 강제하는…나는 정치에 반대합니다. 정치가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너나 예로부터 있는 어떤 정치도 긍정할 것은 없습니다. 나는 권위와 싸워서면 내 정치적 의무를 다할 수 있습니다. 내 양심을 건드리지 마라, 나 또한 누구의 양심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이뿐입니다.
#한 동발목의 이야기
참 바쁜 살림입니다. 그러나 거기 내 살림이 있던가? 내 일을 한 것이 어딘가?
사람은 원대한 정신에 살아야 합니다. 성공은 못 하더라도 무한한 이상에 살다 거기 죽는 것이 참 삶입니다.
#나의 어머니
#나라는 망하고
#물 아래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남강 도산 고당
#이단자가 되기까지
#내가 맞은 8·15
#내가 겪은 신의주학생사건
#조선에 기됵교는 필요하냐
#무교회신앙과 조선
#무교회신앙에 대하여
#성저적 입장에서 본 조선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한 배움
#씨알의 설움
#옷을 팔아 칼을 사라
#말씀 모임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1958.8)
역사의 뜻. 나라를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었던 6·25 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뜻을 깨달은 국민이라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역사적 사전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법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매고 맷돌질하는 당나귀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왜 허리 꼬부린 새우가 됐던가?…원인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서민, 곧 백성이란 것이, 이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우리나라 시대의 정치업자놈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그저 짜먹으려만 들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줄곧 말라들기만 했다…우리나라의 씨알이 양반이라는 이리떼보다 더한 짜먹는 놈들의 등쌀에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였기 때문이다…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에게서 시작이 됐다. 압록강, 두만강에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는 중국 만주의 이리·호랑이에게 꼬리를 치며 미끼를 바치는 대신, 이 파리한 염소를 사정없이 악착스럽게 더럽게 짜먹기 시작하던 이조 500년에 이 나라는 결딴이 나고 말았다….6·25 싸움 때 부산 부두에 몰려 있어 말라가는 논귀에서 송사리의 살림을 하면서도 놓지 못한 것은 당파싸움, 오늘날까지도 그것인데, 당초에 시작은 전주 이씨네의 정치에 있다.
그러므로 6·25의 남북 싸움의 속원인은 스탈린, 김일성, 루스벨트에게 있지 않고, 이성계에게 있다. 이북을 상놈의 땅으로 금을 긋던 날 38선은 시작됐다. 거기서 더 올라간다. 고려 중엽에 김부식이 묘청의 혁명운동을 꺽어버리던 날, 평양 이북을 적국처럼 보기 시작하던 날 벌써 일은 글렀다.
6·25의 뜻은 눈앞의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저 먼 역사의 흐름에서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뜻을 깨닫는 것은 본래, 세 점을 한 곧은 줄로 맞추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상에 놓여 이 끝에서 저 끝이 내다뵈는 것이 뜻을 앎이다. 그것을 하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곧은 길을 닦아라! 과거·현재·미래의 세 점이 일직선으로 놓여 내다보여야만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은 곡절, 파란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의 숙제는 세 마디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 정신이요, 하나는 독립정신이요, 하나는 신앙정신이다.
그 뜻은 작은 생각 버리고 크게 하나(大同) 돼봐라 하는 하나님의 교휸으로, 역사의 명력으로 알아야만 우리는 역사적 민족이 될 수 있다. 하나 되지 못한 원인을 찾으면, 독립하지 못하는 데, 제 노릇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 됨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서고야 될 일이다…인격은 곧 자존이다. 스스로 높임이 스스로 있음이다.
독립정신은 어디서 나오나?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종교 없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백 가지 폐가 간난에 있다. 하지만 간난 중에도 심한 간난은 생각의 간난이다. 철학의 간난, 종교의 간난.
그러면 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 점에 맺힌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 그러면 6·25의 뜻도 어쩔 수 없이 여기 있을 것이다.
6·25의 중심 되는 뜻은 하나 되는 세계로 달리는 한 걸음이란 데에 있다. 국민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한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 말고(그것은 연극이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한다.
#5·16을 어떻게 볼까(1961.6)
소리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병혁이다. 병이 혁하면 그 다음은 죽는다.
그런데 내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도 없는 것이다….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선의의 독재란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내용 없는 빈말이다. 선의인데 독재가 어떻게 있으며, 독재거든 어떻게 선일 수 있을까? 강간이 사랑일까? 정말 정치가는 민중을 맘대로 말을 시키는 사람이다. 그래야만 정말 민중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1963.6)
박정희 님에게! 남은 길은 공약 준수뿐
정치인들에게! 민중은 다 알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모두 진정을 말하라
지성인의 할 일은 첫째, 분간하는 데 있습니다. 긴 듯 아닌 듯한 것을 갈라놓아야 합니다…둘째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시비를 알았거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시를 주장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 없는 것은 사람 아닙니다. 셋째는, 결단을 했으면 행동을 해야 합니다. 지성인은 늘 회색이라 기회주의자라 비난 듣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특권계급에 붙으렵니까? 민중에 붙으렵니까?
군인들에게! 정치가 혼란할수록 밖을 지켜주오
반공이 국시란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무식해서 한 소리입니다. 국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공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없어지는 날 나라도 없어질 것….국시야 첨부터 환한 데모크라시가 국시지, 반공은 그 영원한 진리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망상은 자기만을 예외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입니다. 교만입니다. 무책임입니다.
학생들에게! 역사의 대국(大局) 내다보라
민중에게! 잠을 깨고 힘차게 삶을 외치자
문제는 여러 가지여도, 우리 하는 일의 뜻은 하나로 성격 건설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생각합시다!
그럼 꿈틀거립시다!
그럼 겁을 내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를 외칩시다!
자, 이젠 일어섭시다! 일어섰습니다!
#나는 왜 『씨알의 소리』는 내나(1970)
나라의 주인 씨알은 영원합니다….집권자에게 꼬리치지 않는 나도 살아갑니다.
사상의 게릴라전.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상의 유격전은 더욱 필요합니다.
달라지긴 무엇이 달라집니까? 못사는 씨알의 못사는 정도가 더 심해졌으면 졌지, 씨알 짜먹는 사람들의 심술머리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어째 기술이 달라진 말만 하고 이때까지의 일이 잘못된 것을 반성은 아니합니까?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아니하는 놈은 도둑의 한패 아닙니까?
지혜는 결코 천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전체 씨알에게서 나옵니다…숲이 커야 큰 재목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모든 특성은 전체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