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윤형/최태섭/김정근. p258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궁핍한 소크라테스를 위하여
“네가 원한 일이잖아”
꿈은 자본주의가 청춘에 깔아 놓은 가장 잔인한 덫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도 ‘노동자’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로 사는 것을 꿈꾸지도 않는다는 것이다…’너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마. 곧 너는 사장이 될 거야.’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이름인 ‘노동자’를 거부하고 부정한다. 그것은 노동자로 살게 되면 생존은 할 수 있을지언정 자아실현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고프더라고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강요하고 그 삶을 갈망하는 사회…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코제브는 인간의 미래를 미국의 대중 소비 사회에서 만났다. 노동자들은 주말이면 대형 마트로 차를 몰고 나가, 식품과 가전제품을 ‘산더미’처럼 사고 ‘미친 듯이’ 소비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은 꿈꾸지 않았고, 자기 앞에 있는 상품, 오로지 ‘상품’을 소비하며 만족하는 ‘동물’이 되었다.
그래서 코제브가 만난 인간의 미래는 바로 ‘동물’이었다.
68혁명의 교과서,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
“우리는 ‘굶어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서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 집단 생존의 문명은 개인 삶의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만 했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모든 욕망을 해방시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소비 사회는 소비와 스펙타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불만에 대한 자본의 대답이었다.
노동의 미학화, “자, 이제 우리 모두 장인이 되자.”
배고픈 소크라테스, “네가 원한 일이잖아.”
그러나 이 책은 고발한다. 배고픈 돼지이기를 거부한 소크라테스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배고픈 돼지의 삶’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유토피아라고 아름답게 약속한 그 미학적인 세상은 배고픈 돼지들이 울부짖는 지옥이었다. 도토리가 아니라 고기반찬을 달라고 노래했던 달빛 요정처럼, 악덕 기업주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진보 정당과 시민 단체의 현실처럼, 밤새 야근을 하고 코피를 쏟더라도 탓해야 할 것을 노동 구조가 아니라 약해 빠진 자신의 ‘간’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다.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 구조이다.
이 깨달음이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돼지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이 청년들의 미래가 적어도 ‘배는 고프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굴러다니고, 널브러지고, 발에 차이는 것들.
하루 10시간 넘는 연습, 열악한 생활환경, 불투명한 미래, 브로커 개입과 극단적인 피라미드 구조에서 일하고 있는 프로 게이머.
‘열정 노동’? 이 사회가 얼마나 사람들의 열정을 당연하다는 듯이 착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네가 원해서)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틀어막고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열정’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열정’의 원래 의미? 진정한 꿈이 사라진 사회? 이 시대의 꿈은 오로지 ‘돈 잘버는 직장’, 예전처럼 꿈꾸던 몽상가는 사라졌다.
#열정의 도덕_당신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라
박카스 권하는 사회.
광고의 음흉한 정치학?
열정을 길들이다. ‘국토대장정’, 이 행사의 모토는 ‘젊음, 열정, 도전’ 같은 것들이었다. 박카스의 광고에는 까맣게 그을린 참가자들의 얼굴, 힘든 일정에도 불구하고최선을 다짐하는 사람들의 모습, 마지막 날 부모님과의 만남에 터뜨리는 그들의 눈물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행사에 청년들이 참가하는 이유는 미스터리이다. 대체 왜 청년들은 이렇게 위험한 행사에 모였을까?
그것은 이 행사가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주최하는 유명한 것이기 때문. 아마도 참가자들은 훗날 면접장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극기, 인내, 리더십, 팀워크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을 입증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것은 경험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 앞에 붙는 이름이다. 어떤 이의 목숨까지 앗아간 수십 일간의 대장정은 결국 이렇게 한 줄의 ‘경력’과 교환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열정’, ‘젊음’, ‘도전’과 같은 이 행사를 수식하는 단어들의 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행사를 통해 얌전히 ‘길들여’진다. 열정은 넘치지 않아야 하고, 도전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젊음은 무모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열정의 대상으로 허락되는 것은 더 이상 세계나, 사회, 혹은 타인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심화되는 ‘자기 혹사’의 몸짓들은 ‘치열하게 살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개인들을 양산한다…그런데 정말 이것이 ‘진정한 나와의 싸움’일까. 그리고 왜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일까.
꿈과 열정의 구조 조정
꿈꿔라 청춘아! “박지성은 평발이었다”, “강수진은 연습 벌레였다”,”안철수는 평범한 의대생이었다”라는 문장이 지나가고, 강렬한 사운드와 함께 비보이들이 등장한다. 잠시후 다양한 분야에서 일에 열중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등장….”꿈꿔라 청춘아, 힘내라 청춘아, 너의 큰 꿈을 활짝 펼쳐라!”…”공익광고협의회”
(아마 우리 세금으로 만들어졌을) 이 광고는 청년 실업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다…꿈을 펼치지 못하는 청년들…그리고 그 해답으로 ‘젊음의 5기(용기,패기,혈기,호기,끈기 즉 개인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국가가 실업의 문제를 청년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특기할 점은 또 하나 있다. 우리는 이 광고를 통해 ‘꿈’이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 시대의 사용법을 알 수 있다. 이 광고에서 말하는 ‘꿈’은 결국 ‘일을 하는 것’, ‘직업을 갖는 것’ 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꿈’을 그런 것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이제 ‘꿈’은 매우 현실적이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서 그 가치가 판별된다. 지난 시대의 ‘몽상가'(말 그래도 ‘이상’을 꿈꾸었던)들이 현대를 방문한다면 ‘꿈’이라는 말이 이토록 많이 쓰여지고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때보다 초라한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꿈’이다.
등록금 걱정 말고 취업 준비에 힘쓰세요
학자금 대출, 연이율 5.2~7.7%. 이런 대출은 그야말로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자식의 대학 학자금을 고스란히 댈 수 있는 가정은 그다지 많지 않다.
국가는 나에게 아무 걱정 말고 ‘스펙’을 쌓으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대학이 사실 학문이라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야기쯤으 되새겨 주어도 좋으련만, 대학 생활과 취업 준비가 국가적 차원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이 프로세스의 축약은 이 시대 청년들의 곤궁함을 얄궂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대학생들이여 취업 준비에 힘쓰라! 그리고 취직하여 얼른 대출금을 갚아라!’
구조 조정의 문맥
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봉착한 위기를 “예전에도 그랬듯이 오늘날고 ‘무에서’ 창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즉 침략하고 정복하고 착취할 수 있는 ‘외부 세계’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외부’를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착취할 외부가 없을 때 자본주의는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구조 조정’은 이렇게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위한 자본주의의 해법이다. 자본주의가 성숙한 사회에서는 ‘고용’이 아니라 ‘인원 감축’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쮜어짤 것이 남아 있는 한, 자본가는 절대로 ‘(슘페터의) 혁신적 기업가’가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기업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자본가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에게 고용되지 못할 것이다. 구직자들은 제각기 특별한 존재임을 주장해야 한다. 말하자면 ‘영웅’이나 ‘초인’이 되어야 한다. ‘평범한 노동자’로 살기 위해 ‘비범한 존재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자본주의가 새롭게 발견한 열정의 ‘쓸모’이다.
면접관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스펙 이상을 요구하다.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학점관리, 자원봉사, 활발한 교내활동…선배들을 만나 재롱도…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만의 ‘필살기’도 준비해야 한다.
열정이 부족한 당신, 유죄!
열정을 측정하는 것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당신의 열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덕분에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할 면접장은 졸지에 ‘슈퍼스타K‘ 오디션 장으로 변한다.
‘당신을 계발하라’는 명령
노동자는 어디에? “자부심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이명박 대선 후보
‘1인 기업’? ‘나는 결코 노동자가 아니다. 내가 지금 노동자처럼 일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속물 혹은 ‘잉여 인간’
사회학자 김홍종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스노보크라시(snobcracy) 다시 말해 속물의 체제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것의 불가능.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지루하게 반복된다.
오늘날 ‘잉여’란 말은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해 낸 ‘잉여 가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력을, 즉 일시적인 실업이 아니라 영원히 고용될 수 없는 이들을 의미한다. 가치를 생산하는 건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다.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은 모든 사람을 입히고 먹일 만큼 성장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고용되지 못하고 낙오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들은 ‘잉여’가 된다.
박카스, 그리고 새마을 운동
1961년은 박카스가 탄생한 해…’기적의’ 의약품 박카스는 수많은 라이벌의 등장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까지 시장 점유율 1위를 지켜왔다….공교롭게도 1961년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해이기도 하다. 조국 근대화를 외치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벌였고, 중공업화의 길을 주창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한국의 경제를 급속도록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 성장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단군 이래 민족의 최대 공사’ 경부 고속 도로 건설 현장, 짧은 공기를 맞추기 위한 살인적인 노동 강도로 7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1961년에 등장한 두 개의 ‘박’은 ‘박카스’와 ‘박정희 시대’이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말이 ‘피로‘이다. 당시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던 근대화로 사람들은 지쳐 갔다. 그리고 그 피로를 회복시켜 주겠다며 박카스가 등장했다.
#대한민국 열정 노동 백서: 열정의 현장
청소년, 꿈에 사로잡히다_프로 게이머와 연예인
“스타들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치솟아 날아가다가 창공에서 사라진다.”-지그문트 바우만,『새로운 빈곤』
어른들의 배를 채우는 청소년의 열정. 그들이-인터뷰와 조사를 통해-알아 낸 프로 게이머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합숙소 월40~60만원 입주비, 10~15명 함께 생활, 밥, 물, 김치와 연습용 컴퓨터 제공.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게임 연습, 하루 4시간밖에 못 자고 연습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 게이머 연봉은 1군의 경우, 적으면 500만원, 평균적으로 1000~2000만 원. 일주일 경기가 끝날 때마다 하루 반 정도의 휴식이 주어질 뿐. 일 년 중 리그가 없는 기간은 단 한달에 불과. 게임단 내 경쟁은 매우 치열, 코치들의 감시 속에서 하루 12~16시간 게임을 한다.
누구를 위해 땀을 흘리는가
1)”하고 싶은 거 하고살면 됐지 뭘 더 바라?” -> 이런 반응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한다
2)”문제가 있단 건 알겠는데 그래도 파이를 키워야 그 친구들의 환경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 몇몇 스타 배우들의 출연료만 높아졌을 뿐 제작 환경의 개선은 없었던 것과 흡사한 상황이다
3)”아니, 왜 새로 생긴 e스포츠가 다른 스포츠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거야?” -> 무엇보다 이 반응에 주목해야 한다. 프로 게이머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단순히 특정 업종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잖아”_영화와 문화 산업
만고불변의 법칙: 인건비가 제일 만만해
뜨거운 열정, 반갑지 않아? 영상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지망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거 실화예요. 회사 분위기 안 좋고, 펀딩 안 되고, 뭐 그런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가방 하나 맨 애가 문을 열더니 사무실에 들어왔어요.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영화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돈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라고 외치더라고요. 근데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일에 감동받지 않아요. 그 애를 쳐다보는 스태프들의 심경은, ‘저런 녀석들 때문에 내가 돈도 못 받고…’였죠. 영화판에 애들은 자꾸 들어와요. 정작 끝까지 가는 사람은 잘 없는데, 계속 유입이 돼요.”
문화 강국의 꿈? 외주화와 어시시턴트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꿈꾸다_IT업계, 달콤한 자기 계발 담론과 씁쓸한 현실
COLA in, CODE out
너, 퇴근하지 마!
“양쪽에서 다 말이 들려와요. 직원들은 야근 때문에 쓰러질 지경이라고 말하고, 회사는 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한다고 투덜거리죠. 전 노사 양쪽의 입장에 다 동의합니다. 양쪽을 다 경험해 보았거든요…”
자기 계발 담론의 실체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 한국에서는 IMF 외환 위기로 테일러주의가 붕괴한 자본주의 세계엔, 그리고 노동자의 열정을 착취하려는 ‘펌프질’만 남았다. ‘열심히’로는 부족했다. 그건 미적지근한 단어였다. 한 TV 광고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 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열정을 갖지 않는 당신은 죄인이다.
‘고시 공화국’을 들여다보다_언론사 입사 전형을 ‘언론 고시’라고 부르는 까닭
공무원 준비 합격생의 생활 수기? …딴 생각 하지 마라(‘공무원’ 하나에 포커스),… 아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시간이 든다)
김삼순은 왜 빵을 구웠을까?_서비스 직종
열정, 단 하나의 이유
하늘에서 ‘사장님’들이 비처럼 내려오다_창업과 영업, 다단계 판매
창업을 유도하는 사회. 청년 실업 문제의 해결책은 창업이다?
“…창업자는요,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우산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능력과 성품을 갖춘 사람이 흔치 않아요. 근데 앞뒤 안 가리고 창업하라고 몰아넣죠. 솔직히 말하면, 창업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간섭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해요. 저는 창업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창업은 정말 고생길이에요. 본인이 사용자라면 고용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해야 합니다…그냥 취직해서 일하는 것보다 100배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요. 회사 잘못 만들면 인생을 말아먹을 수 있거든요.”
사장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좀 다른 의미의 ‘사장님’들도 있다. 바로 각종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영업은 노동의 현장에서 도태된 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_시민 단체와 노조, 정당의 상근자들
여기를 돈 버는 직장으로 만들자는 얘기냐!
민주노동당.2004년에서 2007년까지 민주노동당 내에서 벌어진 상근 노조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활동가의 열정을 착취해서 간신히 돌아가는-사회 개혁 운동의 초라하고 앙상한 물적 토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온 동네에 노조를 만들라고 간섭하는 이 정당이 자기 당의 ‘노동자’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었을까?
#오렌지족, 그리고 ‘신지식인’의 열정_열정의 역사
네가 하는 건 노동이 아니야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말했는가. 자본은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노동’의 개념 자체도 바꾸었다.
사장이 된다, ‘열정 노동’이 등장하다
열정 노동의 세 가지 본질, 1)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2)그러므로 나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다 3) 고로 나에겐 노동자의 권리가 필요 없다
소비 사회의논리를 뒤집다, 워커홀릭
그러다가 대량 생산 시대가 되자, 상황은 한 번 더 바뀌었다. 노동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으로 선전’되었다. 바우만은 ‘잉여 중 더 많은 몫을 차지하는 능력이, 장인이 공장 노동자로 바뀌면서 사라진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이제 노동은 도덕의 외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유’를 찾았다.
이렇게 돈이 노동의 목적으로 명시되면서 사회는 ‘소비 사회’로 전환되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_열정의 미래
노동의 죽음
즐거운 일은 노동이 아니다. 너희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잖아.
이제 열정 노동의 범위는 노동 운동가들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범위가 넓어졌다. 열정 노동이란 현상을 품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고민이 절실해진 것이다. 열정 노동의 현장엔 ‘미래의 창작자’가 되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말하자면 하루 종일 애니메이션 생각을 하던 젊은이가 하루 종일 애니메이션에 관한 일을 한다고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열정 노동’의 진정한 함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열정 노동의 이념은 이제 모든 종류의 노동을 ‘열정 노동처럼’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열정은 불안정성과 무의미함을 감내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워킹 푸어의 증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노동자 없는 자본주의’가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노동자’란 존재를 남김없이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라면, ‘열정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언술이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평범한 노동자다’라는 진술만이 해체의 위기에 몰린 노동 계급을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시민들은 이렇게 말했다_나는 계급 투쟁을 한다
정작 국내의 ‘계급 투쟁’에는 별 관심이 없던 많은 한국 사람들.
프랑스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한국 학생들과는 달리 사회의식이 투철하다
“나는 계급 투쟁을 한다” 2010년의 프랑스 시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계급 투쟁의 주체인 ‘노동 계급’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유효한 얘기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사장님들의 나라
박노자가 성공적으로 논박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다른 좌파 지식인 홍세화가 한국의 서민층에 대해서 말할 때 언급하는 ‘존재와 의식의 괴리‘인 것 같다. 홍세화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망각하고 자본자 정당을 지지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높은 지지율은 유물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한국 사호의 문제가 헤게모니 차원이 아니라 유물론의 차원에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엔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질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돌파 전략이 필요하다.
사회 변혁을 말하는 이들이 점점 더 노동이란 단어를 기피하고 ‘소비자 운동’과 ‘생산자 운동’을 주장하게 된 사연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소비자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의 속도는 바우만의 생각의 속도보다 결코 느리지 않았다.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지 이전에도 식당에 가면 서로를 ‘사장님’, ‘부장님’, ‘교수님’으로 호칭하던 것이 한국의 노동 계급이다. 노동자를 일종의 숨겨야 할 신분으로 인지하던 전근대적 사회의식은 생산 관계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지우려는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만나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제 유물론의 차원에서도 헤게모니의 차원에서도 노동은 무력한 단어가 되었다.
‘열정 노동의 전도사’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열정의 반복이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 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우리는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를 비판한다. 하지만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는 따르려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모순이, 혹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정치, 그 어려운 숙제
변화는 정말 가능한가. 정치를 통한 변혁은 지금의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혼자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상황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국면, 한순간의 선택이다…우리는 정치가 불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세상을 맞이하는 중이다. 옛 속담을 비관적으로 비틀자면, 호랑이에게 물려 갈 때 정신을 차린다고 산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두 번의 기회는 더 주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열정, 그 불온한 이름
오랫동안 피지배자들의 열정은 지배자들에게 불길한 것이었다. 지배자들은 당대의 질서를 수호해야만 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때문에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다수의 피지배자들이 열정에 휩싸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지배자들은 반체제적인 것들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집단적 열정들마저도 심심치 않게 봉기나 반란처럼 체제를 위협하는 사건의 도화선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열정은 쉽게 조절하거나, 한계 짓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힘이다. 열정은 흘러넘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68혁명 당시 학생들이 연호했던 “체”(체게바라)와 “호”(호치민)는 각각 쿠바 혁명과 베트남 전쟁의 승리를 상징했다.
이 흘러넘침과 예측의 불가능성 때문에 열정은 억압받는 자들, 불만을 가진 자들, 변화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좀 더 친숙한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열정을 폭발시킬 이유와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들의 폭발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가능하게 했던 원인이었다.
MTV는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이렇게 바꾸었다
하지만 열정이 언제나 체제에 반하는 힘으로만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자본주의는 비록 표면적일지라도 열정의 체제로 거듭났다…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사이클이 ‘자본의 투입->상품의 생산->소비->재투자’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열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본주의가 열정에 대하여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인 20세기 중반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식민지 획득이 금지되고, 대량 생산·대량 소비의 포디즘 체제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혁신할 에너지를 그 외부에서 찾기 시작한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 사회의 조직 방식, 동기 부여의 수단 등을 그 외부에 있던 ‘열정’에서 찾기 시작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68혁명, 신 사회운동, 히피 운동 등의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펼쳐졌던 온갖 실험들을 그 내부로 포획하고자 했다.
이러한 자본의 ‘발상 전환’은 많은 단어들의 용법을 바꿔 놓았다. 대표적으로 ‘혁명’은 더이상 그 누구도 이것을 정치적인 개념으로 사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다. 우리에게 ‘혁명’이란 최신형 자동차이거나, 전자 기기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맛의 맥주다.
법과 폭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착취부터, 열정이라는 매개를 통한 자발적 착취의 메커니즘까지.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파업, 사보타주, 계급혁명은 물론이고 소비에트와의 체제 경쟁에서까지 살아남으며 자신의 뜻을 노동자들에게 관철시켰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상황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왜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부자가 될 수 없는가? 이런 질문이 이어질수록 열정은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는 것만은 안 되고, 창조적이야 하고, 역량을 가져야 하고,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하고, 문제가 생겨도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하고, 무언가에 미쳐야 하고…이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뼈저릴 만큼 공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책한권 후딱 읽고 가네요.
함께 새로운 멋진 세상에 대한 열정(!)을 키워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