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시민 불복종. 앤드류 커크. p167
Civil Disobedience
세계를 뒤흔든 선언3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은 아마 미국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단편일 것이다.
『시민 불복종』이 처음 발표될 당시에는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제목이었다.
지금부터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소로를 살펴보고, 21세기가 직면한 문제들과 가능성이라는 맥락에서 소로의 저술과 사유의 가치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등장배경과 지은이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 유니테리언 교회 목사직을 그만 두었는데…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통찰력이 협소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 에머슨은 자신의 종교적 배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결국 훗날 초월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세속적인 사제가 되었다.
에머슨은 혁명의 시대라 할 수 있는 당대에 학자가 해야 할 역할을 제시했다?
사람이 태어나고 싶은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혁명의 시대가 아닐까? 낡은 것과 새 것이 나란히 존재하면서 비교되는 시대이자… 새 시대의 풍부한 가능성으로 옛 시대의 역사적 영광을 보상할 수 있는 시대말이다.
책, 경험, 자연에 의한 학자의 교육이 언급되는데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자연이다?
시간적으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이다.
에머슨의 감옥에 있는 소로 면회 일화. “자네 왜 여기 있는가?” “당신은 왜 여기 있지 않습니까?”
소로가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 들어간 것은 세상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단순하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에머슨은 소로가 세상과 단절하려 한다고 비판했지만, 소로가 찾으려고 애쓴 것은 원칙을 가지고 느긋하게 사는 방법이었다. 에머슨이 보는 것과는 달리, 소로는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당신의 표를 모조리 던져라. 종이쪽지 한 장이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시민 불복종』 원문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이다”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루 빨리 조직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노자의 소국과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멕시코전쟁을 보라.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사실상 정부를 자신들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 국민들은 애초에 이런 처사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권력이 일단 국민의 손에 들어왔을 때 다수의 지배가 허용되고 오랜 기간 계속되는 실질적인 이유는 다수가 옳을 가능성이 크거나 소수에게 가장 공정해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물리적으로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다수가 지배하는 정부는 정의에 토대를 둘 수는 없는 바, 사람들이 이해하는 한에서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다수가 아니라 양심이 옳고 그름을 실제로 결정하는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다수는 단지 편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결정하는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시민이 한순간만이라도, 혹은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맡겨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에게 양심은 왜 있는 것인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는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군인들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저주받을 짓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존재인가? 도대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어떤 사악한 자가 부리는 움직이는 작은 요새나 탄약고인가?
이 나라 국민은 노예 소유와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설령 그렇게 하여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마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지겠지만, 옳은 쪽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목숨을 걸지나 하지는 않는다. 옳은 쪽에 투표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내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힘을 통해 승리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며 그 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당신의 표를 모조리 던져라. 종이쪽지 한 장이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다수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는 한 소수는 무력하다. 아니 소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다. 그러나 소수가 온 힘을 다해 가로막으면 그 힘은 불가항력이 된다. 정의로운 사람을 감옥에 가두든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정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당대에 미친 영향
소로의 글이 당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아마도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에머슨보다 더 심하게 배신하기는 힘들 것이다…에머슨은 19세기 미국 문화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고, 따라서 그의 견해는 어느 정도 무게를 갖기 때문이다. 소로는 자기를 변호할 기회가 없었다. 에머슨의 글이 소로에 대한 당대의 평판에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 그리고 재능을 헛되이 낭비해버린 이류 문인이라는 소로에 관한 신화가 어떻게 하여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안목 있는 독자들이 그의 글을 발견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치사상가로서 소로의 중요성을 처음 알아본 곳은 그가 에머슨과 겪은 불화를 생각한다면 소로로서는 실망할 수밖에는 없는 지역이었다. 바로 영국이다!
#『시민 불복종』의 유산
영국 사회주의
『살기 좋은 잉글랜드』. 이 책에서 블래치퍼드는 독자들에게 『월든』을 읽어보라고 추천했으니, 결과적으로 영국의 폭넓은 대중들에게 소로를 소개한 셈이 되었다.
소로의 진실을 알아본 헨리 솔트의 깨달음?
우리가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는 장식품 가운데 대부분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사실, 상류사회에서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소로와 간디
설령 이 책이 역사의 책장 구석에 처박힌 채 망각되었다 하더라도, 1907년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변호사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날 소로의 명성을 필연적인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변호사의 이름은 모한다스 K. 간디이다.
‘진리의 힘’이라는 뜻의 사티아그라하는 적극적 행동이었다.
간디는 ‘수동적’ 저항의 개념을 끔찍이 혐오했다. 그것은 저항하는 쪽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로는 억압적 국가에 맞서는 개인의 힘을 강조했고, 여기서 간디는 든든한 사상적 버팀목을 발견한 것이다.
간디와 소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가 또 있다. 소로는 스물 네살에 『다르마샤스트라』을 읽었고, 1845년 월든 호숫가에서 『바가바드기타』을 읽었다.
“신약성서가 순수한 도덕성으로 유명하다면, 베다 문헌의 정수는 순수한 지성이라 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타』 만큼 독자를 더 크고 순수한 진기한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한 동안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책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킹의 꿈과 소로
소로에게 노예제가 그랬던 것처럼 정당한 법 절차를 기다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법적인 치료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며,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일생이 다할 것이다.”
소로 자신이 “설령 이웃 사람들의 잠을 깨우는 결과밖에 얻지 못할지언정….아침의 수탉처럼 호기 있게 울어보기”를 원했듯이, 오늘날 인터넷에는 이웃에게 말을 걸고 또 자신들의 대의에 소로를 참여시키는 데 열심인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당신의 표를 모조리 던져라
전문적인 정치가 점점 더 조직화되고 중앙집권화되고 파벌화될수록, 그 정치가 섬기는 대상인 시민들의 참여는 점점 줄어든다. 서구 정당의 당원 수는 하락하는 추세다. 정당의 자금은 점점 더 기업 후원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니 이 후원자들이 자신의 투자에 대한 수익을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치적메시지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되며 여기에는 언제나 홍보용 인터뷰가 빠지지 않는다. 4년마다 한 번씩 표를 던질 기회를 제외하고는, 시민들은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며 어느 정도는 실제로 무기력하다.
이러한 무력감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수동적 태도와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시민들은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요즘 벌어지는 일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소로는 이러한 무저항주의를 통렬히 비난한다.
이 사람들은 기껏해야 값싼 표 하나를 던져주고, 정의가 자기들 옆을 지나갈 때 희미한 지지를 보내며 성공을 기원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보다는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가 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다운 의미의 영웅, 애국자, 순교자, 개혁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들의 양심을 가지고 국가에 이바지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필연적으로 국가에 저항하게 되고 따라서 보통 국가로부터 적으로 취급받는다.
#해제_오늘날의 『시민 불복종』_홍세화
시간이 흘러도 세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은 150년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빛난다. 아니, 오늘날 더욱 빛난다. 시간과 함께 더욱 교활해진 것은 정부이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긴장을 상실한 것은 시민들이다. 소로의 『시민 불복종』은 성난 얼굴로 되돌아와 우리의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그렇다면 『시민 불복종』은 오늘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무엇보다 ‘시민 불복종’은 사회에 긴장을 주면서 참된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눈앞의 현실에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우선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이 사라지고 있다. ‘시민 불복종’은 시민의식을 전제하며, 그 출발점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누군가 대신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인식’, ‘따라서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인식’에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정부와 자본이 ‘제공한’ 사회 현실에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스스로 시민인 양 믿고 있을 뿐이다.
‘시민 불복종’은 소로가 말한 ‘효모’다. 이 책을 읽고 그대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분발하라. 그대의 자유의지와 상관없는, 강요된 의식화에 의해 억압된 그대의 정서를 해방시켜야 한다. 만약 그대 영혼이 움직인다면 그 영혼이 손짓하는 데로 움직이라. 그대의 삶은 절대로 썰렁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