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위대한 소리들 Listening to the land. 데릭 젠슨. p293
미국 사회의 주류 밖에서 대안적인 삶을 모색해온 여러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지혜를 구하는 ‘듣기’에 관한 책. 그는 여기에 소개된 현인들의 ‘이야기’를 다름 아닌 ‘땅’, 즉 ‘만물’의 소리이자 이야기로 들으려 한다.
“그게 바로 미국 기업들이 녹색에 대해 기본적으로 갖는 사고방식이죠. 환경문제에 관한 이미지를 다른 속셈으로 이용하여 우리를 흡수해버리는 것이지요. 그게 우리 소비사회의 천재적인 능력입니다. 소비사회는 로큰롤을, 민권을, 노동운동을 다 그런 식으로 흡수하여 맥주를 팔아먹기 위한 수단으로 바꿔버렸어요.” 내가 북극곰과 코카콜라를 떠올린 게 바로 이 대목이었다.(『북극의 위기』 다큐멘터리 상영 후 이어지는 코카콜라 광고 영상!)
#우리는 장소다_데이브 포먼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죠. 완전히 동물로서 존재할 때, 이를테면 급류 한가운데 있으면서 강의 흐름에 반응해야 할 때죠.
순간을 완전히 있는 그대로 경험할 때가 제일 행복하지요.
새를 구경할 때, 야생의 땅을 걷다가 내면의 대화가 완전히 멈춰버릴 때가 행복하지요.
예를 들어 늑대나 곰, 대형 악어나 하피 독수리 같은 대형 포식동물이 살 자리가 없다면 인류는 지역별로 모두 적재량을 초과한 겁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진화론을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갖는 사회적 힘의, 즉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어요. 애덤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을 받아들이건 말건 우파나 좌파는 얼마든지 있는데, 그들은 물질적 한계나 적재량의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하기를 거부하지요. ‘와일드랜즈 프로젝트’는 그런 사실과 화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대형 포식동물의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개체 수를 보존할 수 있다면 전체 생물다양성의 90퍼센트를 보호할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성장 없는 경제를 발전시킨다면,…비슷한 성과를 얻을 수 있겠지요.
물론 재미가 있고 낙이 있어야 운동도 잘 할 수 있지요. 땅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걷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즐거워서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땅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뿐히 걷게 되어 있습니다.
기업에 대한 모든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대기업들은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해 보다 깊이, 자기네 주주를 위해 이윤을 내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요즘 책임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으면서 재산권이니 어쩌니 하면 쓸데없이 떠드는, 이른바 보수파들을 보면 넌더리가 납니다. 권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지요…태평양 연안 북서부의 지역사회와 땅을 파괴한 해리 멜로 등의 목재회사 제왕들의 책임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용기지요!
…지금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으로 100년이 아니라 10억 년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닌까요. 우리가 자연계의 다양성이라는 나무의 커다란 가지 하나를 잘라낸다면, 그 생명의 가지가 이룰 수 있는 진화적 잠재성을 영원히 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진보는 신화일 뿐이다_크리스토퍼 메인즈
“산업사회는 그 기반이 되는 생태계를 계속해서 갉아먹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해롭고 지속 가능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일 것이다.”
저는 기술과 공예(craft)를 뚜렷이 구분합니다.
기술은 세상에 군림하면서 세상이 자연적으로 하지 않은 일을 강요하지요. 공예는 자연과의 보다 겸손하고 전통적인 관계에 속하는, 달리 말해 자연과 함께 흘러가는 활동입니다. 땅이 우리에게 진흙과 불을 주면 우리는 그 선물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땅과 그 땅 위의 인간 아닌 것들은 공예 때문에 축소되거나 사라지지 않아요. 공예는 인간의 요구를 기존의 경관에 맞추지요. 그에 비해 기술은 자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경관을 바꾸고 부정하려고 하죠.
애니미즘의 문화는 자연세계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문화에서 새들은 무언가 할 말이 있죠. 그건 벌레도, 늑대도, 폭포도 마찬가집니다.
애니미즘 문화는 확실히 옳았어요. 한발 비켜서서 가만 들어보세요. 도시의 교통과 소음 속에서도 새와 곤충의 소리가, 온 세상이 독특한 소리를 내며 웅성거리는 게 들리지요. 사람 목소리만이 아니라 온갖 연사들의 소리가요.
최근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는 문자가 발명됐을 때 세상과 우리의 관계는 심대하게 변했습니다.
느닷없이 우리는 의미가 자연 아닌 문자 속에, 세상의 언어가 아닌 사람의 말 속에 깃들어 있다고 믿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한 때 온 세상에 충만하던 애니미즘이 이제는 책장 속의 협소한 영역으로 축소되어버린 것이지요.
저는 생태과학이 자연의 소리를 듣는 우리의 능력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환각에 가까운 이상한 관념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듀공에서부터 플라밍고나 떨리는 사시나무까지 저마다 말하는 것들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복잡한 속내와 욕구를 드러내면 생물권을 이루지요(소리풍경?soundscape)
인간만이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관념이어서 그런 걸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데 정말 나쁜 언어철학의 공세가 천년이나 필요했지요. 그럼에도 새들은 앉아서 자기 지식과 감정과 관심을 전달하며 서로 얘기를 나눠요. 저는 새소리와 언어학 담론의 실질적인 차리를 모르겠어요. 새의 말이 더 이해하기 쉬울 때가 많다는 것 말고는요.
진보는 신화.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회는 진보하지 않으며 단지 변할 뿐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지요. 실제로 저보다 공부를 훨씬 많이 한 분들이 그런 주장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진보를 말할 때 거론하는 것들이 대개 어떤 것들일까요?
의료나 여가? 지금 사람들이 옛날보다 야토병에 걸리는 경우가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지요. 끔찍한 질병이 많이 뿌리 뽑히긴 했지만 많은 ‘문명국’들이 몇 차례에 걸쳐 싸운 세계대전으로 5천만 명이 몰살된 바 있고요…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젊은이들은 상상력과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상상력이야말로 우리를 구할 수 있어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비전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어찌 보면 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의 환경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것이에요.
#생존의 다른 원리_존 A. 리빙스턴
야생생물 보존은 내 체험을 지키는 정도에 불과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존재’ 자체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 체험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을 떠올리고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점이지요. 그건 보다 큰 전체와, 바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이지요. 그래서 야생동물이 보존되지 않고 파괴되면 그와 함께 내 존재도 파괴되는 것이죠.
이런 파괴를 가장 아프게 느끼는 사람들은 어릴 때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경험이 있어서일 거예요…사람이 어릴 때 하나가 되어봤던 자연의 어떤 요소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건 단순히 그 경험을 기억하거나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도약의 기쁨과 더없는 아름다움을 되찾는다는 것이지요. 어떤 새나 두꺼비한테서 자기존재를 발견하는 환희 말이에요. 그런 유대감은 어느 정도 영양을 계속 공급받는다면 평생을 간다는 거예요.
선생님께선 교실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키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십니까?
나는 학생들이 최대한 자기 힘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내가 아는 것들을 알려줄 뿐이에요. 내가 가르치는 방식은 언제나 질문의 과정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자극하고, 스스로 질문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지요. 단, 문제를 정의하는 데 대해서는 강조를 했어요.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니까요.
#우주는 우호적인 곳인가?_매튜 폭스
#기술은 선인가, 악인가_제리 멘더
기술은 중립적인 것으로 보고, 지난 세기 우리가 목격한 여러 끔찍한 일들을-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히로시마 원폭,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 사고, 오존층 파괴 등-기술을 악용한 탓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런 끔찍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부적절한 사람들이 기술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명쾌한 기술 비판론자인 제리 멘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기술이 중립적인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그런 생각이 기술의 진화에 대해 우리의 역할을 수동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를 겹겹이 둘러싼 기술의 어마어마한 그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어요.
이를테면 기술은 선인가, 악인가, 기술이 끼치는 영향의 전면적인 차원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없어요…보다 나은 삶을 위해 기술이 있는 게 나을까 없는 게 나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질 필요가 있어요. 지금 우리에겐 어떤 기술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기술의 기본적인 형식이나 효과에 대해서는 국민투표도, 국민토론도, 방송토론도 없어요. 모든 기술이 중립적이라는 가정 때문이지요. 그래서 목표는 우리가 기술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누가 어떤 기술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할 것인가를 겨루는 미친 경쟁이 되어버리지요. 이 경쟁에서는 대개 개발을 확대하려는 세력과 우익이 승리합니다. 그들의 목적이 기술에 가장 적합한데다가 그들이 그런 기계를 활용할 경제적 자원을 쥐고 있으니까요. 그러다 기술의 역효과가 나타나는 건 몇 년 뒤인데, 그 무렵이면 그 기술에 완전히 포위되어 그것을 제거하기가 훨씬 어려워지지요.
우리는 기술에 대해 보다 중요한 질문을 놓치기 십상이에요. 그것은 기술이 우리에게 유익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기술은 언제나 유익한 측면을 갖고 있어요-누구한테 가장 유익하느냐의 문제이지요. 누가 이익을 보느냐가 아니라 누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느냐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떤 기술의 효과와 영향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어떤 계열의 기술이 너무 지나치게 진화한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가 모든 기술적 진화를 선이자 진보라 선언하는 기본 패러다임에 매몰되어…그게 사실상 서구사회의 종교가 되어버렸지요.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지금 우리 모두가 거의 주변을 의식할 수 없게 만드는 기술적 구현물들 속에 너무 깊숙이 묻혀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주는 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삶을 살았던 게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지요. 만물의 자연적 설계 속에서 장소에 대한 알맞은 느낌을 갖고서 제정신으로 살게 해주던 땅으로부터 떨어져 살게 된 건 최근의 일입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볼 때 편집이 많이 되고 속도를 아주 높인 버전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것도 서로 많이 뒤섞인 것을요. 소위 뉴스란 걸 보는데, 그건 사실이라곤 하지만 진작에 찍어둔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볼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것들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실제와는 사실상 다른 무엇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적으로 앞뒤로 조종하며 시간을 압축하기도 하는 허구의 프로그램을 보게도 됩니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감각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존하던 방식 중 하나는 하늘을 보면 이렇게 말하던 것이었어요. “새들이구나.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네. 음, 그렇구나.”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미디어 때문에 완전히 개조된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감각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 훈련은 받지 않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광고주니, 대통령이니, 기업이니 하는 존재들에게 코뚜레를 꿰어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얻은 정보을 구체적인 사실이나 실제 그대로의 방식으로 신뢰할 수 없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지각체계가 너무 빨라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때 그 경험은 자연의 유기적인 시간을 느끼는 것처럼 차분한 게 절대 아니에요. 지나치게 활발한 지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너무나 빠른 정보의 장의 들여다보게 되는 겁니다…산들바람은 슬슬 불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기만 하지요. 자연에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고 조용해질 필요가 있어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기술이 주입하는 생활의 속도 때문에 일어나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너무 속도를 낸 나머지 느린 시스템에는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적 무감각_로버트 제이 리프튼
기술이 정신적 무감각을 심화시킬까요?
기술은 모든 걸 심화시킵니다. 기술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닥쳐와 혁명적인 변화와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고 확대해나갔지요. 그리고 이제는 통제 불능의 것이 되었어요.
이중인격화에 관한 중요한 사항 하나는 그것이 적응기제라는 점. 그것은 나치 의사들이 아우슈비츠의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으며, 핵무기 설계자들과 전략가들이 직업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이었어요.
타협을 모르는 도덕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편합니다. 일관성이 언제나 위협받으니까요.
#지배문화와 자연의 전쟁_와드 처칠
#야생지 없는 미래_맥스 욀슐레거
동물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현재 야생지라 불리는 곳에서 진화해온 인류가 갈수록 길들이고 부자연스러워지는 환경 속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자연에 가하는 치명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은 우리가 ‘경제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자연은 단지 우리가 경제적으로 개념화하고 기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대상 같은 게 되어버렸어요.
‘경제적 인간’의 대안이 있을까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지식이 아니라 지성에 대한 교감이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지성이란 우리를 둘러싼 유기적인 자연 질서에 뿌리를 묻고 있는 무엇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것은 창조된 지성이긴 하되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이론과 범주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부터 확실히 붙잡는 게 우리의 임무예요. 그런 길을 찾고 나면 자연의 지성에 대한 교감을 얻는 게 그다음 임무지요. 달리 말해 우리 자신을 열어젖힘으로써 그것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봉에 대해서는 당신이 읽은 온갖 책보다 벌이 더 많이 당신에게 가르쳐줬을 거예요.
소로우가 본 생존가능한 문화란…겸손할 줄 아는 문화라야 지성에 대한 교감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그가 이상적으로 본, 그리고 저도 이상적으로 보는 사회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와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지 않고 오만하며,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으니까요.
‘신성한 것’이란? 자신이 전체와 이어져 있다는 한 점의 빛 같은 감각을 되찾는 것이라 할까요.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일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종교 전통에서 수없이 언급된 말 같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_폴 셰퍼드
제인 구달과 그 후속 연구자들이 보여준 바도 침팬지에게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먹을거리가 생길 경우 갈등과 경쟁이 생겨난다는 점이었어요. 압제자가 나타나서 다른 침팬지들을 위협하고 다치게 한다는 거예요.
이런 사실은 농경의 경우 누군가가 지키고 통제하고 비축해야 하는 저장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과 맥이 닿아 있어요. 자연이 저장고 노릇을 더 못 해줄 경우 권력이 집중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죽음을 추구하는 사회_아르노 그루엔
우리가 남을 인식하는 능력은 참으로 부조리해졌어요.우리는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라고 배운 대로 남들을 인식하고 있지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줄 모르게 되었어요. 그런 아주 어릴 때부터 공감하는 인식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는 우리가 지금의 방식을 진정으로 바꾸고 싶다면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난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것들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의심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질문을 하는 힘이 되는 친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의심이 진정한 힘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투과성 있는 자아_캐서린 켈러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엘리트가 그렇게 공감하는 능력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대단히 중요해요. 로버트 제이 리프튼이 “정신적 무감각(psychic numbing)”이라 부르는 그런 무감각이 있어야 엘리트 구성원들이 지배를 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고문과 학살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무감각해질 줄 모르면, 또는 그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지배체제는 무너지게 되지요.
#이제 우리는 물처럼 땅으로 흘러간다_테리 템피스트 윌리엄스
정말 훌륭한 글이네요… 인터스텔라의 `우리는 늘 답을 찾을 것이다’ 처럼 답을 찾지 않을까요? 늘 그랬듯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