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 김진송. p343
#나무는 목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거칠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꿈꿀 수 있을 때는 아직 뭘 모르는 때. 이것저것 챙겨 따지고 들면 구조는 단단해지고 마감은 더 정교해지며 그러다 보면 목물들은 어느새 낯선 사물이 되어 자신을 드러낸다. 애써 만든 물건이 흡족한 경우는 잠시뿐. 세월에 따라 나무는 뒤틀리고 갈라지고 색조차 변한다. 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가늠하고 배려해도 나무는 목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연의 나무는 저절로 자연으로 돌아가 본성은 한껏 드러댄다.
#나무는 다 다르다#
처음 다루어보는 나무는 여러 가지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무에 관한 책은 많지만 목리에 대해 기록한 책은 드물다. 그마저 흔한 나무들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쓰러진 후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는 몇 달, 몇 년을 기다려 챙겨보아야 하니 그 많은 나무의 품성을 모두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죽으면 어디서부터 썩어들어가는지, 어떤 벌레가 어떤 모양으로 파먹는지, 비를 맞아도 되는 나무인지 아닌지, 바람과 온도와 햇빛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나무는 그 품종이 다른 만큼이나 목리의 변화도 다양하다.
#썩은 버드나무
나를 따라나선 방문객들도 대개 잠깐의 육체노동을 할 기회를 갖게 된다. 어김없이 눈에 띄는 나무토막을 그냥 지나칠리도 없고 혼자가기보다는 둘이나 서넛이서 둘고 오면 더 많은 나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눈치를 보면 대부분 그런 일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때때로 발견하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엉뚱하게 노동의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야말로 순수한 노동, 단순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자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노동에 대한 충동이 나타날 때 그들은 대부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일하자고 막무가내다.
#가래나무 아니면 가중나무
예전 같으면 서울에 사는 사람은 서울에서, 시골에 사는 사람은 시골에서 차례를 지냈을 터인데, 서울로 시골로 왕복 백여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차를 몰고 갔다 와 다시 이산 저산 흩어져 있는 산소를 찾는 게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명절이라는 전통의 관습에 자동차라는 현대적 이기가 교묘히 더해져 예전보다 고달파진 것이다.
#미친 대추나무
대추나무가 이상하다. 잘 자라던 나무가 갑자기 이상한 짓을….미친 대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 게 아니다. 정상인 나무는 마르고 단단한 가지에 한두 개의 새로운 가지와 잎새가 나오고 거기서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미친 나무는 가지 끝에서 무수히 많은 새 잎새와 가지가 나와버린다.
멀쩡한 대추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이 떨어지고 때로는 잎을 단 가지도 떨어지지만, 미친 나무는 수많은 잔가지가 떨어지지 않고 게다가 이파리도 말라붙은 채 엉겨붙어 있다.
#엄나무
높은 가지 끝의 순을 도저히 딸 수 없자 그 큰 나무를 몽땅 잘라 횡재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나물꾼은 아마 그것으로 한 짐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지게를 만들 때 생각할 것들
지게를 만드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구조도 단순하거니와 한번 보아둔 눈짐작으로도 능히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지게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어머니가 퉁박을 주었다. 가지에 무거운 돌을 달아 휘어지게 만들어야 제대로 각이 나오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아버지는 아랫부분이 너무 뾰족하다고 했다. 검불이 많은 부드러운 흙에서는 지게가 땅에 박혀버려 일어서지도 못할 것이란다…
참담한 기분이 들어 지게를 다시 작업실로 가져왔다. 다시 만들기도 뭣하고 더 다듬고 다시 깍고 했지만,
원시적인 지게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게 바로 야만스러움이라는 자괴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툰 목수의 연장 탓#
#목수가 되는 네 가지 조건
가방끈이 왠만하여 펜대 굴려 먹고사는 사람들을 ‘먹물’이라고도 하지만, 먹물이 되기는 쉬워도 지식인이 되기는어렵다. 남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식인이 되기에 자격 미달인 것을 차츰 깨닫는 순간 어느새 그걸 슬그머니 포기하게 되었다.
지식인이라면 첫째, 누구나 받아들이듯 자신의 전공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을 바라보는 데 사회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행동과 실천에 정당성을 부여한다…체계적인 사회과학적 인식의 틀 없이 이루어지는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현상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가공할 상투적 폭력을 낳는다.
세 번째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풍부한 교양이 전제되어야 한다…문화적 현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예술에 대한 몰이해는 세상을 보는 한쪽의 창문을 닫는 결과를 가져온다.
네 번째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논리와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첫 번째가 부족하면 잘난 척할 수 없고, 두 번째가 부족하면 답답한 사람이 되며, 세 번째가 부족하면 몰상식한 사람이 되고, 네 번째가 부족하면 무식한 사람이 된다.
첫 번째를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면 약삭빠른 사람이 되고, 두 번째를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면 극단적인 태도를 갖게 되며, 세 번째만을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하게 되면 자폐적이거나 퇴행적인 상태가 쉽게 노출된다. 네 번째만 있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게 되면 무능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먹물을 빼고 남은 것으로 할 수 있는 목수일을 만만히 보았던 것인데, 그게 그런 게 아닌 줄을 진작 알아보았어야 했다.
목수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연장을 능숙히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들은 풍월이건 경험이건 나무와 목재에 대한 지식이 없이 목수일을 한다는 것은 마치 눈을 감고 연장을 다루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물건의 기능과 꼴에 대한 미학적 기준과 판단이 있어야 한다. 기능을 따지는 것은 사람이 쓰는 물건임을 잊지 않는다는 말이며, 모양을 중시하는 것은 만져보고 보이는 물거이라는 점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네 번째는 아마 힘과 끈기여야 할 것이다. 목수일을 하는 데 필요한 끈기는 힘에서 비롯되며, 결과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과 판단은 끈기 있게 달라붙어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첫 번째를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면 단순한 노동이 되지 쉽고, 두 번째를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면 입으로만 많이 아는 수다쟁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세 번째를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면 예술가연하는 작태를 벌일 수 있다. 네 번째만을 중시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면 자신만을 생각하는 고집스러움만 남을 것이다.
이런 기준을 나에게 들이대면 또 한심해지니 목수가 되기도 그른 것일까? 누가 살아가면서 이상을 높게 잡으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멋진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쉽게 도달할 수 없어 지레 겁먹고 포기할 것이라면 사다리는 낮을수록 좋다.
#목수 생각#
…야산에 흔한 우리 나무들은 향나무나 주목, 은행나무 등속의 고급제가 아니면 좀처럼 정교한 물건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매우 단순한 구조가 아니면 목질이 무너지고 갈라지기 십상이다…모르던 바는 아니지만 예전에 집안에서 쓰이던 목물들이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모양새를 가지게 된 이유는 서민들의 질박한 품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들이 그런 모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게 생긴 까닭이 더 컸을 것이다. 단순하고 투박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목물들이 후대에 와서 소박한 자연의 미학으로 치장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
자연을 닮은 모양새는 원시적인 가공기술과 목재 가공 산업이 미흡한 환경에서 발생한,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형태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이다. 단단하고 다듬어진 목재가 옛사람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에도 그런 모양새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나무들을 일상의 용도로 끌어들이기에는 삶의 모습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또한 삶의 공간에서 그런 나무들을 쓰임새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진 것도 너무 오래 전의 일이다. 골동을 흉내 내고 예술로 치장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들이는 물건이나 산업화되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물건 말고는 도무지 다른 방식으로 쓸모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삶이다.
#선과 형태
나무로 무얼 만들 때 유독 망설여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나무를 보고 무엇을 만들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이도저도 다 그럴듯하게 보일 때이다. 선택할 게 많은 것은 선택할 게 없는 것과 같다. 대부분 그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다 괜찮겠다 싶을 때이며,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포기된 다른 쪽이 혹시 더 좋으면 어찌하나 하는 욕심에서 오는 갈등이다.
나무토막 하나를 깍으면서도 그런 순간은 매번 온다. 그럴 때, 즉 마음의 갈등으로 일이 진척되지 않을 때는 그저 손에 맡겨둔다. 그러면 둥근듯이 똑바르고, 처진 듯싶게 치켜 올라간 그런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게 바로 마음이 원했던 방향이란 것을 깨닫는다. 하지잠 이건 매우 비과학적인, 비합리적인 만들기 과정이다. 이른바 주먹구구식인 셈인데 생각해보면 한심한 것이기도 하다…자연적인 선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들은 무성하지만 그건 설명이 아니라 느낌일 뿐이다…매순간마다 찾아오는 선과 향태를 분명 머리로만 결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목리를 쫓아가는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디자인 비켜가기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면 곤혹스러운 대답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학생이라면 더욱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 대개 남에게 뭘 얻어듣는 걸 훌륭한 공부라고 생각하는,…
왜 목수가 되셨어요? 음, 그런 건 물어보지 말지 그래요. 그럼 목수일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글쎄, 배운 적은 없는데.
여기까지가 보통 하는 이유기 수순인데, 자신이 잔뜩 기대했던 답변이 나오지 않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어요? 자네들은 어떻게 만드는데? 그냥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하죠, 뭐. 어떻게 배우지? 한 학기에 주제를 정해서 하나를 만들어요…거의 한 달 동안 스케치를 하면 디자인을 하죠. 그러고 나서는? 디자인을 교수님께 검사를 맡은 다음 나무를 정하지요. 보통은 제일 좋은 수입목을 쓰는데 값이 만만치가 않아요…어려운 건 목공소에 가서 만들어 오기도 하고요…조금만 흠집이 있어도 한 되고…그렇게 하나를 가지고 몇 개월을 만들면 지겹지 않아? 글쎄요. 어떤 때는 좀 지겹기도 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만드시는데요? 글쎄, 자네가 배운 걸 몽땅 반대로 하는 식으로 한다면 어떨까? 어떻게요?
첫째 주제를 정하지 않아야 하지. 주제를 정하기보다는 용도를 생각해야지. 같은 거 아닌가요? 같을 수도 있지만 쓰임이 먼저이지, 형태가 먼저일 수는 없다는 말일세. 그다음에는요? 그 다음이 아니라 그전에 나무를 보고 쓰임을 정하지. 용도를 정하고 나무를 구하다보면 거기에 맞는 걸 구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힘을 덜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하니까. 그럼 나무는 안 사세요? 영 안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개는 줍거나 얻어다 만들지. 그럼 돈은 안 들겠네요? 구하는 품이 사는 품보다 더 들 수는 있지. 디자인은 안 하세요? 필요하면 더러 만드는 도중에 스케치는 하기도 해. 주로 만들다가 막힐 때지만. 디자인도 안 하고 만드는 게 가능해요? 디자인을 끝내놓으면 더 만들 필요가 뭐가 있지? 이미 다 된 것인데.
여기부터 그들은 약간 머뭇거린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디자인이란 만들기 전단계다 아니라는 말이지. 물건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디자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일세. 그런가요? 교수님은 과정을 엄격히 구분하셨는데? 그거야 가르치기 위한 절차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럼 이런 작품은…작품이 아니라 물건이라고 해야지. 그럼 이런 물건들은 어떤 디자인을 배워서 만들게 되는 건가요?
이제부터는 피차에 답답함을 느끼며 말이 오가야 한다. 디자인을 배우면 물건이 만들어지나?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 교수님도 이탈리아에서 디자인을 공부하셨는데…
내 생각에는 디자인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단지 재료와 용도를 연결해주는 데 필요한 절차이기는 한데, 이미 재료가 결정되고 용도가 분명해지면 그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단순한 통로를 찾아내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은 스타일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지. 스타일을 배워야 거기에 맞는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내가 보기에는 그걸 완전히 거꾸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이에요?…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구먼.
쉽게 말하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일세.
말하자면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거나 세련되게 보여야 한다는 의도를 디자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게 우선되어서는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이지. 물론 그게 예술가와 목수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목수 지식
하지만 나무에 대해 경험한 사실들이나 들어서 알게 된 사실들, 그리고 나무의 쓰임새와 관련된 생각을 머리에 이고 지내다보니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식의 형태 혹은 체계가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지식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역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지식과 정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지식은 어디에서도 하찮거나 쓸모없이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아마 사회적으로 공유되기 위한 체계나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어느 범주에 딱부러지게 속하지 못하는 그런 잡스런 정보들이 나무 다루기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지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식이란 대개 매우 국부적이거나 혹은 미세한 상황에 따라 변동되는 주관적인 정보들인데, 말하자면 어느 날 동풍에 실려오는 바람의 냄새로 씨 뿌릴 시기를 가늠하는 농부의 몸에 밴 지식과 비슷한 것들이다.
또 이런 지식이란 이른바 현대사회가 보여주는 구획되고 단절된 수많은 구조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이다. 따라서 그 본말은 두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제까지 먹물 마시듯 취해온 책 속의 지식 체계가 아닌 다른 형태의 체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적어도 기존의 지식 형태에 대한 의문 몇 가지가 풀어질 조짐을 엉뚱하게도 나무일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어쩌면 지식이란 체계와 구조에 의해 축적된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도서관에 쌓여 있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살아가는 주체에 의해 선택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의 그물망에서 단 하나의 그물코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라고.
집에 두고 온 새 그물보다 배에 가져온 엉성한 그물을 백 번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어부의 심정이 그렇듯이.
#기술의 척도
미장일뿐 아니라 매우 간단한 기술과 정보가 지식이나 비법으로 포장되는 경우는 흔하다. 오히려 복잡하고 과학적인 정교한 일에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체계적이지 않은 노동과 기술일 경우가 더 그렇다.
목수일도 그런 일 중 하나이다. 제대로 된 목수의 작업은 놀라운 정도로 치밀하고 정교하지만, 대부분 일의 내용은 있는 그대로보다 과장되어 있다.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하는 데 터무니없이 인색한 경우가 없지 않다. 어쩌면 축적된 정보나 지식의 내용이 빈약한 일일수록 그런 경우가 더욱 많다.
만일 자신의 노하우를 드러내기를 몹시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대개는 그 사람이 지닌 정보가 매우 단순하고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빈약한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기술과 예술로 포장되면 여러 가지가 편하다. 갑자기 물질과 과학과 지식은 정신과 영혼이 되어버리며, 나머지 부분, 즉 기술과 정보의 문을 쉽게 닫아버려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비로소 그만의 오랜 외길 인생을 통해 얻어진 ‘비법’을 숨긴 채 신비적인 분위기가 그를 둘러싸고, 그의 추종자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정보를 흘리면 된다. 드디어 지식을 가진 자들의 사회적 헤게모니가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지식 권력은 그렇게 완성되는지 모른다. 아마 인간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실제적인 지식과 정보의 가치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경험과 지식은 그 내용을 아무리 내어주어도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게 불안하다면 그는 더 이상 전문가가 아니다. 경험과 지식의 내용을 폭넓게 공유하는 사회가 아마 더 열린사회일 것이다.
#상상력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상력이 이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말하는 것은 아닐 듯하다…나의 작업이 생산적이라면 모르되 창의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의 기발한 상상력에 관한 한 반쯤은 맞는 말? 대부분 아이들의 상상력은 매우 일면적이고 단편적이다. 예를 들면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른을 뛰어넘은 수준까지 도달한 예는 거의 없다.
상상력이란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이 없이 상상력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니 어른들보다 경험이 적은 아이가 어른을 능가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아이들의 수준에 항상 머물 뿐이다.
아이들이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개 아이들의 빈약한 경험에서 비롯된 연상 능력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결과이기 쉽다. 경험과 사고의 부족이 오히려 기발하고 엉뚱한 연상을 하게 되고 그게 어른들의 눈에는 뛰어난 상상력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가? 어른들은 경험이 풍부하다. 따라서 어른들이야말로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그런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은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의 일상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설명이 가능한 영역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어른들은 많은 경험을 통하여 현실의 원리가 작동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그걸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상상력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상상력을 엉뚱하고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상상력은 사라진다.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상상력 자체는 아니다.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허구를 지어내거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상품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이라면 혹시 그런 상상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상상의 세계가 엉뚱하고 기발하며 터무니없어 보이는 까닭은 상상의 세계 반대편인 일상의 공간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이성과 합리성은 이 사회가 지향하는 하나의 가치이자 원리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이성과 합리성은 교묘히 은폐되어 있다. 이성으로 포장된 폭력, 합리성으로 위장된 불합리가 실제의 현실공간에서는 더 현실적이다.
그럴 때 상상의 공간은 비이성과 비합리를 통해서 현실 속에 은폐된 억압, 폭력, 불합리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상상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또 다른 원리나 엉뚱한 법칙들은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거나 의심해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말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고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상투적인 시각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구체적인 물질이나 아이디어의 영역에서 발휘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상상력은 사고의 유연성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으로 열린 세계를 향한 태도를 제시한다…아이들이 그렇다면 그럴 때의 아이들의 상상력은 소중한 것이다.
상상의 영역은 현실에서 벗어난 일탈의 공간은 아니다. 상상과 현실은 구분되어 있거나 단절된 서로 다른 공간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 동일한 공간이다. 상상은 일상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있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영역에서 작용하는 세계이다.
상상은 무수히 많은 경험과 사고의 틈에 존재하며 그 틈 속에서 인간의 인식을 무한히 넓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바로 현실적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했으며 또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기보다 어른들이다. 상상의 세계가 제공하는 시각의 균열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일상의 경험 속에 매몰되어 상투성의 늪에 빠져 있을 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다
나무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서 물건을 만든다고 자연스러운 물건이 될 리는 없다. 자연은 자연 속에 있을 때에만 자연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은 오건만
처음부터 자연은 없었다. 자연이란 우리에게 언제든 개발과 도시가 되기 위해 남겨진 지역의 다른 말이다.
오늘도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슬프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도시의 촉수에 여지없이 걸려들어 붉은 흙을 토해내는 숲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날들이 계속된다.
매번 봄은 오지만 매번 어제의 봄이 아니다.
#천재天災는 없다
모두들 천재지변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 처음부터 천재는 없었다. 자연은 늘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자연은 늘 그렇듯 번개를 내리고 비를 뿌리고 그 물이 넘쳐흘렸을 뿐이다. 하늘의 재앙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이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물길을 돌려세워 둑을 쌓고 산허리를 잘라내 길을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밭을 만들고 물이 넘쳐야 할 곳에 흙을 메워 집을 지었던 것은 사람들이다.
자연의 자리에 억지고 비집고 들어선 인간들이 새삼스레 천재지변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천재지변의 고통을 떠안는 것은 늘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자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게 들이닥친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높고 튼튼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천재가 빈번한 까닭은 자연조차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은 자연의 탓이 아니라 천재지변을 말하는 인간의 탓이다.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파헤친 자연의 피해를 늘 없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야만의 문명일 뿐이다.
#도시의 기억
도시의 풍경이 점점 늘어날 때마다 변방의 주민들은 환호한다.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풍요의 잠재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토목과 건설 공화국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그렇다. 여백이 해체되면서 들어선 도시는 물질과 자본으로 점유된 장소이다. 도시는 경제적 부가가치라는 유전인자를 지니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시골과 자연의 우성인자로 군림한다. 도시의 DNA는 수많은 유전자를 복제해 변방에 퍼뜨린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도시가 아니다. 도시가 늘어갈수록 우리의 또 다른 풍경은 사라진다. 그곳은 과거의 기억이 머무는 곳이다. 과거의 기억이 싹을 틔울 수 있는 곳은 어디나 잘려나간다. 오직 현재와 미래만 존재하는 곳. 땅이 뒤집히고 건물이 들어설 때마다 풍경이 송두리째 뒤바뀌고 그럴 때마다 기억의 한 자락이 뭉텅이로 뜯겨져나간다. 짧은 현대의 역사에서 유사 이래 벌어졌던 어떤 전쟁보다 철저하게 파괴적인 개발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적어도 나의 기억 속에서 도시의 역사는 추방과 폐허의 역사였다. 개발의 폐허 속에서 사람들은 저개발의 낙오와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즈음 발터 벤야민의 글을 보게 되었다. 아마 건축과 도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벤야민의 파리 아케이드에 대한 글을 읽어보았을 것이다…파리에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 그것은 장소의 연속성이다. 옛날의 파리가 모두 사라졌다면 벤야민의 글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소는 기억의 보고이다...기억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간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듯이 과거의 공간을 상실한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개인의 과거는 사회의 역사이며 기억은 사회적으로는 문화다. 과거와 기억을 상실한 역사와 문화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우리의 도시에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단지 개발과 발전 혹은 역동성이란 수사학적으로 말해지는 현상만 존재할 뿐이다. 과거의 풍경을 끊임없이 해체하려는 현재의 욕망을 보여줄 뿐이다. 역사적 건물의 보존과 문화재의 복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공간의 숨가뿐 변화가 더 치명적이다. 개인의 기억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시작된다면 일상적 공간의 끊임없는 파괴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올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최근 집값 광풍으로 미쳐 날뛰는 현상이 그 징후의 단편일 것이다. 대안으로 앞다투어 내놓는 정책이 끊임없는 개발을 통한 주택공급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비극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집, 아파트 혹은 건물은 아직 장소성을 가지고 있는 일상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물질적인 공간일 뿐 말 그대로 부동산, 들고 다닐 수 없는 재산에 불과하다. 과거의 기억을 담고 있는 일상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팔아넘길 수 있는 자본의 공간이다. 여기에 대고 나의 기억과 사회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장광설에 불과할 것이다. 그게 또 슬프다.
#목수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대장장이는 쇠를 다룬다. 대장장이는 연금술사와 끈이 닿아 있다. 목수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나무꾼에 이를 뿐이다. 돌의 시대를 넘어 철의 시대를 거친 문명은 대장장이를 연금술사에서 기술자와 과학자로 뒤바꿔놓았다. 그러나 목수는 건축가와 예술가로 모습을 바꿀 수는 있었지만 나무를 다루는 한 목수는 목수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나무꾼은 현재에 삶의 뿌리를 박고 있지만, 연금술사는 미래의 이상을 꿈꾼다…목수는 물질의 존재를 생각할 뿐 연금술사처럼 비의적인 세계를 갈망하지 않는다.
목수는 물질의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다만 물질의 변형이 주는 이로움을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로움은 다른 존재에 대한 해로움과 다르지 않다. 나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목수는 자연에 근접해 있지만 자연을 말하지 않는다. 숲을 빌미로 살아가는 많은 동물과 곤충과 벌레들처럼 나무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주의자들의 찬미나 자연주의자들의 근심은 목수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아니다. 그들의 말이 목수의 행위를 뒤바꿀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찬양되거나 비난받을 일이 없다.
목수는 목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