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를 위한 주거. 사카구치 교헤 외. p177
더 나은 건축을 위한 상상과 제언
#들어가며_박성태, 정림건축문화재단 사무국장
우리의 현대사는 도시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를 찾아, 돈을 쫓아 많은 사람들이 주저없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었다
…산술적으로만 본다면 오 년 마다 전체 국민이 한번씩 집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정 붙일 시간적 여유도 없이 우리는 끊임없이 공간을 이동중이다…그것이 욕망이건,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내몰림이건 말이다. 그리고 스 사이 예전 집들은 개발로 형체조차 찾기 힘들어져서 고향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는 하나둘씩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집과 충분한 정서적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현재 60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대표적으로 ‘소유권’이 절대적 권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사용권’은 언제나 쉽게 폐기할 수 있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됐다. 집과 땅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익은 철저히 보호받았지만, 그 지역을 일군 사람들의 시간과 땀은 너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시각틀 안에서 우리의 도시 개발은 대부분 민간 기업의 주도-정부의 적극적 지원-로 빠르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오 년 안에 도시 하나를 만들어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는데, 그 지역의 기억을 모두 삭제시킨 수평수직의 ‘민짜 도시’였다.
포스트 성장 시대, 건조하고 살벌한 직교 좌표의 사회에서 25페센트 정도는 반겨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혼자만의 방으로, 그 가운데 십만 정도는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고시원으로 돌아간다…
친척도 이웃도 가족도 없이 자기 한 몬 건사하기 바쁜 ‘무연無緣’의 개인들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공간의 집합이 오늘날의 도시인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작으나마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져 망각되지 않는 기억의 공간은 희미해지고, 더불어 지식은 늘어나지만 지혜는 쇠약해지고 있다. 낱개화되고 고립된 생활공간 속에서는 지혜와 조언의 공동체가 숨 쉬기 벅차다.
#인간의 손에 짓기를 되돌리기_사카구치 교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건축가’가 되지 않은 이유?
저는 건축가입니다. 단 한 번도 제 자신이 건축가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다른 ‘건축가’들처럼 건물을 짓지 않을 뿐이죠.
“건축가란 건물을 짓은 사람이 아니라, 건축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사람”-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움직이는 집] 프로젝트, 스스로 집을 짓게 합니다
‘움직이는 집’ 짓기에 참가한 사라들이 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집보다 면적이 좁은데, 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며 이유를 물어보더군요. 상품화되어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이 지어진 공간을 체험하는 것과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생각해가며 지은 공간을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도의 공간’, 참가자 자신의 손으로 짓는 집? 공간 경험의 차이는 디자인이 아니라 그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참가자들이 알아차리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은 ‘태도의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할 때, 그것에 무한히 가까워지려고 하는 노력, 즉 자신이 원하는 공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행동 그 자체가 ‘태도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나에게 정말 맞는 공간은 어느 정도의 넓이를 갖는지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부동산 중개소에 가서 공간을 간단히 빌리는 행위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공간을 빌리는 이들에게는 ‘더 넓은 집이 더 좋다’는 사고방식만 있죠.
『짓다, 살다, 생각하다』-하이데거
저는 그 강연의 제목을 보고 ‘자기가 살 공간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철학’이라는 메시지를 떠올렸습니다…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짓기’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불을 피우는 것조차 하지 않으니 ‘살기’도 점점 상실하고 있죠…철학은 짓기와 살기로부터 소외된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러니 도시화가 가속화될수록 철학이 필요하게 됩니다.
어릴 때 놀던 작아진 공원. 단지 몸집이 커졌기 때문에 공간이 작게 느껴지는 것일까요?…저는 야생의 사고방식이 남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러한 마법과 모험의 공간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의 집이 넓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천 만엔이 있어야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집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과 같은 생각은 집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지어낸 환상일 뿐입니다. 노숙자들처럼 돈 없이도 집을 지을 수 있고, 26만 엔 정조의 돈이면 ‘움직이는 집’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지 말고 세상을 늘려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이 쳐놓은 한계 안에서 어슬렁대는 것을 그만두고 야생의 사고를 되찾으라고요.
저는 안도 다다오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건축 철학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돈과 권력,탑-다운의 사고방식이 한정한 세계일 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건축 잡지에 실린 멋진 사진을 보면 ‘생각하기’를 놓아버립니다….그러던 저는 유일하게 ‘손’을 써가며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노숙자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위해 집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집은 동물의 둥지와 같이, ‘삶’이라는 목적만으로 지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야생의 철학과도 같은 집입니다.
엔화의 비밀? 엔화의 동전은 일본 정부가 만들지만, 지폐는 일본 은행이 만듭니다. 일본은행의 원래 이름은 스미모토 미쓰이은행,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죠. 지폐는 일본 정부가 일본 은행에 돈을 빌렸다고 하는 차용증에 불과합니다. 결국 화폐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죠.(달러와 연방준비제도은행)
제가 구상하는 경제는 받는 사람, 주는 사람 없이 사람 스스로가 돈인 경제입니다. 거래의 결과로 돈은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인연이 두터워질 뿐입니다.
내가 움직여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경제 법칙이 됩니다…사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짓고, 살고, 생각하는 존재이고, 자기가 잘 못하는 것이 있으면 남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돈은 단지 사람과 사람이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조금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화폐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습니다.(‘제로 엔’)
#행복하지만 위험하지 않아_심보선
‘제로 엔’에서 시작하는 거대한 전환
대학 시절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쿄에도 당시 70만 채의 집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노숙자는 1만 명이 넘었다. 집은 남아도는데 집 없는 사람이 늘어나는 부조리를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에게 이상한 경제였다. 아니 경제조차 아니었다. 경제는 본래 ‘바람직한 거주’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로 엔’, 일체의 비용 없이 집을 짓고 사는 테크닉과 철학을 노숙자로부터 사사받고 ‘움직이는 집’이라는 최소 단위로부터 출발하는 대안적 국가를 구상한다.
3·11대지진 이후 신정부 설립하고 자신을 초대 총리로 지명. 허무맹랑한 스토리?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의 픽션, 즉 ‘자기 조정적 시장’이라는 픽션이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며 이 픽션의 주요 저자이자 지지자들인 경제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교헤의 픽션은 바로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을 계승하며 파괴된 삶을 복구하려 한다.
자기생상성을 갖춘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픽션? 애독자들. 소설가의 첫 번째 책의 독자가 두번 째 책의 등장인물 역할을 한 셈이다
사카구치 교헤가 확장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는 현존하는 세계와 언제까지 적대 없이 공존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분쟁이 결여된 공공성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공성이란 공통의 문제에 대해 제기하는 말과 행동으로 구성된다.
#당신의 집은 살아 있습니까?_박활민
‘당신의 삶을 살아 있습니까?’
공급되는 삶? 생활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무언가를 낳거나 만.드.는.활.동. 전체 그리고 그 근거지는 주거 공간일 것이다…생명활동이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이며 이는 무언가를 생산하고 분해하며 저장하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즉 생활을 생산해내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십 년 동안 이 생활 활동의 패턴은 생산 활동이 급격하게 줄고 수급형으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의 기술을 필요한 것만 공급받았지만 이젠 생활 전반을 공급받으려 한다. 이런 현상에 도시 생활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사람들이 생활을 운영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이런 대량 공급현 생활 방식은 지역과의 관계성을 파괴하고 착취한다. 밀양의 송전탑과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는 공급소비형 삶의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위험성을 갖는지 매우 잘 보여준다. 생산의 관점으로 사고하면 생활 문제의 관계성을 파악하게 되지만, 공급의 관점으로 사고하면 관계성이 단절되고 어떡하든 더 많은 공급을 더 빨리 확보하려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생활생산 활동에 직접 참여해 본 사람들은 생활에 대한 자.기.조.절.감.각이 생긴다고 믿는다.. 굳이 바닥나는 화석 연료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공급형 삶의 방식은 공급이 줄면 당장 모든 것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생산활동이 사라지고 있다.
생활 속에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행위는 다양한 지식을 요구하고 다양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복합적인 사고의 과정이다.
생활의 생산은 삶을 소박하게 만들고 그 소박함을 즐길 수 있는 태도를 만든다. 생산활동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 삶의 모든 것들이 경쟁적 공급 확보의 문제로 과열 접근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쟁 위기에 다음 세대가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생산하지 않는 부모, 무기력한 아이들
집이라는 공간이 더는 생산을 안 하면서 아이의 인생은 생활 생산 영역에서 소외된다. 생산에 필요한 볼거리, 다양한 자연 지식, 수많은 응용력을 접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우리 부모 세대는 ‘생활’이 무언지 모르는 무기력한 세대를 만드는 건 아닐까? 무기력의 대물림이 일어나고 있다.
밖에선 경쟁으로부터 고립, 안에선 생활로부터 고립. 한국은 2012년 기준 하루 마흔다섯 명이 자살하는 곳이 되었다. OECD 국가 1위, 자살률은 가속화되어 증가….사회에서 고립된 이들이 더이상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보더라도 이웃끼리 교류할 수 있는 공간과 상상력의 복원이 절실하다.
복지? 역시 공급의 관점이 아닌 생활생산 권장과 교류의 상상력으로 접근한다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연중 내내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립으로부터 사회안전망을 그만큼 확보하는 것일 게다.
손의 퇴화. 주거 공간의 기능들이 점점 편리해지는 동안 우리는 손을 사용하는 생활방식에서 점점 멀어지고, 주거 공간 내에서도 손작업을 위한 작업 공간은 점점 위축되고 있다…생활생산 활동이 기계화되고 공급화되면서 이러한 공간들이 주거 내에서 사라지고 생각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손의 퇴화는 현대 기술문명의 방향성에 많은 의문을 낳게 하는 부분이다.
더 나은 기술, 적정기술? “인간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활동을 장려하는 방향으로의 기술”-슈마허
자신이 직접 하는 손 생산은 생활의 적정규모를 일깨워준다.
회사를 위한 활동으로 월급을 받지만 월급 자체가 내 삶이 될 순 없지 않나, ‘나를 위한 활동’이 내 삶인 것이다.
생태적 사고는 순환되는 일년의 주기를 파악하고 그것을 생활에 응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순환시스템을 이해하면 삶에 질서와 생활의 방향성이 잡히기 떄문이다. 다시 말해 순환질서 속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곧 삶의 윤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세대가 주로 사용하던 생활 손 기술들은 그 세대에게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익숙한 분야이다. 이런 즐거움을 주는 행위를 더 편리한 기술이 있다고 버릴 이유는 없다….추운 날 일찍 집에 가고 싶어진다. 불을 때기 위해서 말이다…올해는 주거 공간 안에 여러 세대의 기술들을 선택적으로 배치하고 운영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올해는 집에서 할 게 많을 것 같다.
#같은 예산으로 두 배로 크고 밝은 공간_라카통&바살
건축에서의 미적 성취는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가치나 목적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프로젝트는 건축가의 의도와 건축물이 위치하는 장소의 특성, 공간의 질적 사용에 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입니다.
건축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특정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복잡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고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미래의 가난을 읽는다_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다시 보면 그것은 ‘가난함’이라는 삶의 방식인 거예요. 가난함이 그들의 주거를 조건 짓고, 그 조건이 다시 삶의 양식을 규정하기 때문에 일찍 가출하고 동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일찍 가난한 부모가 되고 가난은 또 재생산되고…빈곤 재생산 구조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철거 재개발 지역이 곧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벌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곳이었어요. 자고 나면 아파트 값이 치솟는 때였기 떄문에 괜챦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과 중산층 주거기 확대에만 관심이 있었지, 거기 사는 사람들이 쫓겨난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럴 때 빈곤층을 위한 공간의 탈상품화를 이야기한 것은 시류보다 조금 앞섰던 셈이죠. 현장을 연구하면서 공간에 대한 자본주의적 재구조화 방식의 하나가 ‘철거 재개발’이라는 것을 너무나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어요.
영구임대아파트가 노동 빈민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노동조차 할 수 없는 초취약계층에 한정, 노동할 수 있는 가구원은 신청에서 제외되지요. 노동 빈민, 즉 노동을 하지만 생계가 힘들고 주거 해결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정책에서 묵과되는 거죠. 노동 빈민을 위한 임대주택의 확대가 이루어져야 해요.
‘달동네’ 사당동, 그곳엔 ‘마을’과 ‘동네’의 정서가 있거든요. 그런데 영구임대아파트에는 그런 게 없어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곧 ‘삶의 양식’을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에 공간을 정책화하고 건물을 지을 때 사회학적, 인문학적 접근이 적극 필요하다고 봐요.
자본주의 구조와 가난한 사람들 간에는 완충지대가 없는 듯해요. 자본주의 구조와 기제에 맨몸으로 노출된 사람들이 바로 돈 없는 사람들인 거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산다는 것은 구조의 영향을 흡수하는 어떤 막(어쩌면 돈)이 있어서 흡수하고 그 충격을 지연시키는 힘이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현장의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적 침묵_김홍중
사회는 움직이는, 거대하고 무모한, 예민하며 무상한 수수께끼
생각의 변화는 나중에 비로소 ‘선생’이 되면서 일어났다. 선생이 된다는 것은 학생, 제자와 더불어 탐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하는가?..불가능을 가르칠 수밖에는 없다. 배운 것이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러나 거기에 어떤 ‘새로운 형식’이 있어야만 했다. 방랑하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면서 방랑할 것…연구자인 동시에 작가일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구자와 작가 사이에 찢어진 영혼으로 괴로워하는 연구자일 것.
조은의 카메라는 침묵을 유지한다. 쉬운 해답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대신 기다린다. 이십이 년 동안. 묻고, 인사하고, 대화하고, 되돌아온다. 카메라는 켜지고, 꺼질 뿐이다…해답이 아니라 질문들이 생산된다. 질문들은 생각을 촉발한다.
카메라의 침묵은 이들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적 침묵이다. 요컨대 ‘사당동 더하기 22’를 통해서, 우리가 도시 빈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 빈민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청년 세대 독립생활자의 집은?_정민우
고시원이 누군가에게는 큰 이윤을 남기기 때문에, 매우 ‘비인간적’인 주거환경임에도 증식하는 것인데요. 저는 고시원이란 공간을 둘러싼 정치경제학보다는 문화적인 차원에 좀더 주목하고 싶었어요.
고시원의 독특한 공간 구조…한국 사회에서의 얼굴 없는 경쟁과 낙오, 실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구현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바벨의 월세방_박해천
#개인들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쉐어주거_키타가와 다이스케
#도시 공간으로 연결된 아주 작은 집
송파 마이크로-하우징
#개인의 주택문제, 공동으로 해결한다_박종숙,소행주 1호 입주자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만들기
문을 열면 집이 커진다-공용공간 최대한 활용하기
한 가지 반찬이 모여 푸짐한 밥상을 만든다-저녁식사 같이하기
하루 아이 보고 이틀의 자유를 누린다-품앗이 육아
함께하니 덜어낼 수 있고 덜어내니 자유롭다
주거 공간의 변화, 삶의 변화
공동 공간은 입주자의 제2의 주거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작은 평수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재산과 계급의 상징이 아닌 나의 삶과 시간이 배어 있는 집, ‘사는Buy’ 집이 아니라 ‘사는Live’ 집을 만들기 위한 용기 있는 개인들의 실험이었고, 그 실험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저의 소박한 관심사와 통하는 글이네요.
저는 스무살 이후부터 집을 떠나 주거를 옮겨다녔습니다. 기숙사, 반지하 자취방, 셰어하우스, 아파트 등 여러 곳에서 살아봤습니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러느라 짐도 크게 늘리지 않는 편입니다. 언젠가는 정착하는 것이 꿈이고, 그곳에 있어야 할 조건에 대해 미리 그려봅니다. 아직은 희망사항에 불과하지만, 집을 직접 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근에 생각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땅 값이 오를 가능성이 없는 곳
▲생산활동을 할 공간을 마련할 것(수도가 있는 텃밭, 생활 호작질용 공간)
▲암막 커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밤엔 어두울 것
▲집 외관이 튀지 않고 주변 풍경과 조화롭거나 묻힐 것
▲집의 중심은 거실이 아닌 주방이 될 것(주방에서 모든 방과 소리가 통할 것)
▲싱크대 앞에 창문이 있을 것
▲라이프스타일 및 생애주기가 유사한 이웃이 있을 것
▲가능한 한 살림이 소박할 수 있도록,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네일 것
등.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이런 메갈로폴리스 안에서는 이루기 어렵겠지만, 어떠한 방법은 있을테고, 언젠간 이루겠죠.
어쩌다보니 댓글을 엄청 길게 남겨버렸습니다. 블로그 잘 보고 있습니다. ㅎㅎ;
모든 변화의 시작은 생각이라고 하죠. 좋은 생각을 미래의 멋진 집으로 이어가실 수 있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