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데이비드 스즈키. p427
“..사람들은 흔히 우리에게 닥친 가장 시급한 환경 문제가 무어냐고 묻는다…나는 가장 큰 위기가 현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괴를 일삼는 가치와 신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로서 나는 새로운 발견에 관한 도덕적·윤리적·사회적 파장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디서도 받은 적이 없다.
세월이 갈수록 언론 보도가 시시한 정보 조각으로 왜소해지면서 세상이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뉴스를 듣거나 신문을 읽을 때마다 이야기에 살을 붙이거나 이야기를 보다 넓은 맥락에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만물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모든 행동이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므로 무슨 일을 하든 책임이 뒤따른다. 모든 사회의 의식(儀式)에는 그런 책임을 자각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자연의 친밀한 일부라는 이런 감각이 지난 몇 세기 만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우주를 어마어마한 큰 기계구조물로 본다면, 톱니나 바퀴나 용수철 같은 부분부분에 집중함으로써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고, 거대한 퍼즐을 맞추듯 모든 부분들을 다 맞추면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보가 우리를 사방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정보의 대부분은 광고나 포르노그래피나 어리석은 오락물 같은 쓰레기여서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 주는 바가 없다. 뉴스 보도라는 것도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설명해 주는 해설이나 역사나 맥락은 없고 단편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
글로벌 경제는 자연이나 자연과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경제 이외의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상호 연관성의 고리를 끊어 놓는다. 경제학자들은 모든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한 대기, 흙, 생물다양성 같은 것들을 모두 경제 외적 요인으로 여긴다.
한마디로 인간이 저지르는 침해나 착취는 글로벌 경제에 기여해도 지구를 거주 가능한 곳으로 유지시켜 주는 자연의 활동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상호 연관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상실되어 버렸고, 더불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21세기의 도전은 생물학적 자연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결정해 주고, 그런 것들이 전부 자연에서 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느냐는 문제다.
#인간의 오만과 무지를 깨닫던 날
가는 곳마다 새로운 환경과 생물들을 체험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
산업형 벌목 현장..나는 할말을 잃었다. 자연은 언제나 내 삶의 기준이었지만 나는 상당 시간을 온타리오에서 살았다. 그곳의 숲은 사람들로 인해 많이 바뀌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가고, 냇가의 물길이 억지로 바뀌고, 토양이 개량되었다. 반면 이곳의 숲은 만 년에 걸쳐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다. 숲을 이루는 수많은 생물종들이 내놓는 영양분이 끝없이 순환하는 가운데 죽은 생명이 새 생명을 낳는 생명의 군락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다. 다만 산업적 벌목이 잘못됐다는 것을, 우리가 들어간 거대한 숲은 인간의 이해를 한참이나 넘어서는 존재이므로 존중되고 외경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이제 손자들이 낚시를 가자고 하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주었던 스페니시뱅크스나 프레이저 강 어귀, 아니면 베더 강 같은 곳으로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가 없다. 다시는 옛날처럼 템스 강에서 낚시를 할 수가 없다. 너무나 오염되어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잡은 것을 먹는다는 생각만해도 진저리를 친다.
나의 청소년기를 달래 주었던 늪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그곳은 지금 어마어마한 쇼핑몰과 주차장으로 바뀌었다…남은 것은 우리가 생명의 공간을 재발견하여 우리를 지속시켜 주는 자연 세계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확신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생태 위기를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이란 없다.
나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 위기가 근·현대 도시인들의 마음속에, 우리의 파괴성을 조종하는 가치와 신념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따라서 사려 깊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임박한 문제를 넘어선 전체 시스템을 고려해야만 한다(전일적 사고)
오늘날엔 우리가 여전히 자연과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의존한다는 인식을 갖기가 어렵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은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한다…숲이 목재 아닌 신성한 나무들로,..지구가 기회가 아닌 우리의 어머니로 보인다면, 이 모든 것들을 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이다. 세계를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앞으로의 문제다.
#외계인이 되어 버린 인류
나는 이처럼 우리가 인간 행동의 위협에 대응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연 세계의 일부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만들어 낸 도시 환경에서 살게 되면서 자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환상을 갖기가 쉬워졌다. 무역을 통해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환경을 비롯한 현대 생활의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도전은 인류라는 종 전체가 무지막지한 외계인이 되어 버렸다는 것,…정말 외계인이 침략해왔을 때와 같은 대응책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생태계의 홀로코스트
조부모님의 농장은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1950년 런던. 겨우 7만, 10년 뒤 25만 명, 지금은 35만을 자랑. 이 놀라운 성장률은 경제붐과 시민의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인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생태계는 엄청나게 황폐해졌다…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는데도 우리는 전에 없던 생태 절멸로부터 거의 배운 바 없이 계속해서 광적인 파괴를 일삼고 있다..그에 따라 우리 아이들은 갈수록 인간이 만들어 낸 불모의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자연을 경험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우리 미래 세대들은 생명을 떠받쳐 주는 진짜 시스템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땅으로부터 너무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땅이 신성하다거나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책임이 뒤따르는 대단한 특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기술의 힘과 과학 지식만을 믿고 내달리는 우리는 지구가 무제한적이며 끝없이 자기재생적이기라도 하다는 듯 공격을 가하고 있다.
기술의 힘, 그리고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서구의 태도가 결합되어 멈출 수 없는 폭주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세대가 물려받은 게 그런 유산이다.
#생태 관광지가 되어버린 갈라파고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무지해서 복잡한 동물 군집이나 식물 군락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여기서도 제한된 지식에서 비롯된 인간의 인식이나 기호가 각 섬에 강요되고 있다.
#우리가 알기도 전에 사라지는 생물들
정치인들이 앞다퉈 ‘경제를 활성화할’ 전략을 세우려 할 때, 경제적 성공의 열쇠로 흔히 과학과 기술을 거론한다. 하지만…투자금의 조속한 회수를 요구하는 한, 그들의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지구의 생물권이 온통 탈이 났는데도 우리는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인들과 정부 관료들은 건전한 자원 ‘관리’ 정책을 세울 수 있는 지식과 전문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에 따라 어류·나무·물·토양·공기와 같은 자연자원을 맡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 그들은 이곳 절지동물(곤충·거미·갑각류·지네) 가운데 겨우 30%만이 알려져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구상에 3천만 종의 곤충이 있다 추정? 계통분류학은 인기가 없기 때문에 학생을 모집하기도 어렵고 졸업생이 취직을 하기도 어렵다…과학자라면 우리가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에코의 반서재)
하루 130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고작 존재하는 전체 종의 10~15%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채 식별해 내기도 전에 종들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풍요에 대한 환상
인간이 만들어 낸 경관에 함몰되어 있고,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어김없는 법칙을 경험하는 사람이 극소수인 상태에서 도시인들은 이런 한계 없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갖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도시 환경이 우리의 기준이 되면서 우리는 지난 두 세기 동안 진행된 자연의 피폐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정신적 고양감을 느낄 기회를 상실했는지 한번 상상해보라. 대평원을 지나가는 수천만 마리의 들소떼를 본다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지구의 허파’ 열대우림지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개발업자들의 감언이설에 쉽게 놀아나곤 한다. 일자리와 전기와 텔레비전을 약속하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도로와 항구 건설을 환영한다.그들에게 숲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원이다. 잘사는 나라의 우리 같은 사람들도 개발이라는 사이렌이 부르는 소리에 저항할 수 없었는데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불발한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농림업(agroforestry)? “농림을 한 사람들은 진정한 자본주의자들이죠. 그들의 자본은 생물학적인 것이어서 계속 자라거든요”(오래된 미래!)
#늑대의 밤
우리의 지각과 가치는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환경에서 사는가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나는 인간이 야생지와 자연을 반드시 경험하도록 태어났다고 생각한다…야생의 체험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가 하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어준다.
#속도를 늦추고 장미 향기를 맡자
아이들은 내게 인생의 가장 큰 선물-손자·손녀-을 주었다…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손자들과 그들의 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 때문에 걱정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세계화 경제
경제를 자연 세계보다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세계화 경제는 지역 생태계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게 되었다. 우리는 경제의 파괴성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 관념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전제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현재 지도력과 비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화 경제의 오만
오늘날 파푸아뉴기니는 궁핍해 보인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독특한 곳에서는 빈곤이라는 말이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인류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20년 전 라다크에 도착했을 때 받은 첫인상은 극도의 가난과 궁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한 소년에게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 어디냐고 물어 봤더니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하더라는 것이다.
“여긴 가난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요.”
개발과 개방 후. 이제 청년이 된 그 소년은 수도에 살면서 관광객들에게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유는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사고가 날 때마다 GNP는 올라간다
액슨모빌 원유 유츌사고로 올라간 미국의 GNP? 경제성장을 측정하는 신성한 척도이며, 확실히 환경 파괴를 조장한다
#경제성장은 미래의 자원을 빌린 것
GDP는 더할 줄만 알지 뺄 줄은 모른다? 파괴적인 활동과 생산적인 활동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천을 오염시켜도 이윤을 내는 산업은 GDP를 증가시킨다. 오염된 물 때뭄에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은 의약품 같은 재화뿐 아니라 의사·간호사·변호사의 서비스를 받아아 하는데, 그만큼 GDP가 올라간다. 오염배출 사고 해결 정부의 보조금 지급, 그러면 또 올라간다!
#불가능한 꿈, 무한한 성장
하지만 우리는 유한한 세계에 살고 있다
#경제학의 위험한 가정
세상을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의 희한한 렌즈? 경제학은 공기·물·흙과 그 밖의 생명체들을 외부화하여 인간 생활에서 미미한 역할만 하는 것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가정이다
#카나리아의 경보
“우리는 제3세계에 전쟁을 걸고 있다. 부채는 이들 국가를 계속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부채는 북반구의 채권국들이 채무국들을 자기 통제에 따르도록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다. 식민주의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인 것이다.”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
한때는 병 때문에 생명이 소진되어 간다는 뜻이었던 소비(comsumption, 폐결핵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 경제 시스템의 핵심 요소로서 지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공기나 물은 수치화할 수 없다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자연자본
#경제의 패러다임 바꾸기
후손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경제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이른바 파괴적인 길로 이끌어 가고 있다. 소비를 계속 늘리고, 재생 가능한 천연자원을 남용하고, 고용은 줄이면서 경제는 성장시키고, 세계화를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자본을 습관적으로 자유재로 간주해 왔고…오늘날 온 세계에서 자연자본은 반(反)경제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숲
“저건 베어낼 때까지는 아무 가치가 없어요”
맞는 말? 경제적 가치가 있는 거래로 인식. 하지만 나무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숲을 보는 나의 관점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무 한 그루는 만들어지는 데 수천 년이 걸리는 유기체들의 군락 중 아주 작은 일부였다. 그리고 이런 군락은 숲을 이루는 전체 생명체 중 극히 작은 일부인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공학의 빛과 그림자
#과학 기술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
“1년 동안 실험을 해보니 우리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현대 과학은 ‘성공’했다고 허풍떨지만 사실 지독한 약점을 갖고 있다. 다름아닌 방법론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약점이다. 과학자들은 세계의 일부분에만 초점을 맞춰 본 다음 그것을 분리하여 통제하고 측정한다. 전체와 조화는 모르면서 그 파편에 대해서만 이해하고 지배한다.
#반드시 대가는 치르게 마련
먼저 문제가 없는 기술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이로운 것이라 해도 과학은 나름의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기술혁신이 궁극적으로 이득보다 부작용을 더 많이 초래하는 사례는 아주 많다
부작용이 없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을 어떻게 테스트할 수 있을까?
#자동차 엔진 오일 교환에 숨겨진 비밀
이 윤활유는 재활용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땅이나 강에 버려진다. 우리 사회의 근시안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모든 세금 인센티브와 보조금이 원유 발견과 시추에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제정제를 할 경제적 동기기 없다.
우리의 시각이 근시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원자력 산업이다? 방사성 폐기물을 처분하거나 노후한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훨씬 전에 발전소를 지었던 것이다!
#식탁에 오른 방사선 처리 식품
엄청난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주장을 대체로 믿지 않는다? 이제는 담배가 도움도 되고 안전하다는 담배업계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낙농업계의 우유 홍보…오늘날 우리가 먹는 식품과 공기, 물에는 각종 약물과 오염 물질, 첨가제가 가득하다.
#학계의 매춘 행위
역사적으로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거나 전문가들이 ‘민간 부문’을 이롭게 할 목적을 가진 곳이 결코 아니었다. 원래 인간의 사상과 창의성을 함께 탐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직업학교로 전락한 대학교)
#바보상자에 살고 바보상자에 죽는다
바보상자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파편화되고 단절되고 가속되어 있는 화면들이 아니라 지질적·생물적 규모로 일어나는 실제의 썰물과 밀물을 즐길 필요가 있다…가상 현실과 정보고속도로의 자극은 피상적이고 찰나적이며, 우리에게 자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위험한 자만에 빠져들게 만든다.
#텔레비전의 진짜 메시지
중요한 사건들이 정말 사소한 것으로 되는데, 이는 전자 미디어의 세계 뉴스가 일련의 단절된 파편들로 보도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은 가장 근시안적인 매체? “텔레비전은 빠른 변화를 기대하도록 만듭니다..그리고 장기적 안목을 무시하는 문화를 부추깁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라는 횡포를 통해” 문화를 포박해 버린다는 것이다.
아침 ‘세계 뉴스’, 균형 잡히고 냉정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짧고 파편화된 보도들? 그것들이 전달하는 정보는 너무 적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우리에게 생물을 착취할 권리가 있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철학 과목이라곤 들어 본 적이 없는데 Ph.D(원래 철학박사란 뜻)라는 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아이러니다.
과학은 대부분 자연의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그것을 고립시키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연구를 해나간다…발견의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의 약점과 한계를 인시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실험 연구, 특히 공적 자금을 받아 대학에서 수행하는 연구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제대로 배우거나 알지 못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전학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악명 높았던 의사 요제프 맹겔레. 우리는 유전학자들이 나차의 인종 정화 프로그램의 막후 주도자라는 사실을,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히틀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는다.
#물고기도 고통을 느낀다
동물 권리 운동가들은 이 연구에 환호한 반면, 스포츠 낚시가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남겨줄 것인가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자
#생명은 다 소중하다
아이들은 보고 배운다. 부모를 지켜보고 부모의 행동을 금방 따라 한다. 캐나다는 야생지가 대단히 넓은 나라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시에서 자란다. 달리 말해 사람들이 구상하여 만들어 내고 지배하는 세계에서 산다…그런 환경에서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잃어버리기가 대단히 쉽다.
우리는 아이들이 진흙탕을 뒹굴거나 물구덩이를 건너갈까 봐 걱정이다.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태도와 가치를 빨리 배우는데, 도시에서 배우는 것(모기,바퀴벌레 해충퇴치 서비스까지 등장)은 분명하다. 자연은 적이라는 것, 자연은 더럽고 위험하며 역겹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스스로 자연과 담을 쌓고, 자연을 통제하려 한다. 나는 뱀, 거미, 나비, 벨레, 새-나열하자면 끝이 없다-를 혐오하는 어른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대부분 도시에 살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자연을 경험하려면 애써 노력을 해야 한다.
10대 아이들은 생전 처음으로 은하수를 보고 감탄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새로운 리더들
희한하게도 오늘날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힘없고 권리를 박탈당했던 집단 출신이다. 다름아닌 제3세계와 여성, 청소년, 노인 그리고 토착민들이다.
#어린이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오늘날 아이들과 청소년들만큼 지구 생태 위기의 해결에 영향을 많이 받는 집단도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처럼 데이비드는 자신의 간단한 과학 프로젝트 결과를 들고 곧장 근본적인 문제, 즉 환경을 파괴하고 불필요한 폐기물과 오염 문제를 파고 들었던 것이다.
#땅과 정말 가까이 사는 농부
웬델 베리
토론토 고급 레스토랑에 왜 온타리오의 양이 아닌 뉴질랜드의 양이 올라오나? “그게 더 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태적 비용은 가격에 결코 반영되지 않는다!
“농민들은 생명을 기르는 철학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농사도 완전히 과학에 의존하게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농민들은 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겁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 가장 큰 원인은 과학이다.
『짚 한 오라기의 혁명』. 자연농법은 특이하다? 자연에 인간의 생각을 강요하는 대신 자연농법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배울 게 많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연을 스승으로 삼으려 한다.
궁극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흙·공기·물의 총체적 복합체이며, 그 속의 생명들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기본적인 건 생명을 믿고, 생명이 자연 세계 안에서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에필로그
나는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거듭 해보았다.
우리가 생태계에 남기는 흔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 시민들이 따를 수 있는 열 가지 행동 지침, ‘자연의 도전’, 지구와 자연에 당신이 가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제시하는 열 가지 방법. 그중 적어도 세 가지만이라도 실천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www.davidsuzuki.org
#옮긴이의 말
수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의 비판 의식의 밑바탕은,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를 그러한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그러한 감각을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산업화로 인해 상실해 버렸으며, 그 때문에 무책임해졌고 오만해졌으며 어리석어졌다고 역설한다.
간단한 답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참여’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바뀔 것이며, 중요한 건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희망은 ‘몸부림’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감히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먼저 제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지금의 도도한 흐름은 절망적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면 더욱 절망적이다. 작은 몸부림을 치자 주위의 조롱과 질시를 받는 게 지겹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저기서 부단한 몸부림으로 작으나마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허무해 보여도 가끔은 팔이라도 휘저어 봐야겠다. 혹시 우리를 구해 줄 손길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또 그것이 희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죄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일지도 모르니까.
내 블로그에서 이 항목을 퍼감.
저 자신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글입니다. 좋은 책 한 번 사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