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언어. 데얀 수직. p322
탐나는 것들의 비밀
우리는 왜 어떻게 매혹되는가?
#물건들 속에서 허우적대는 세상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지금만큼 많은 물건을 소유한 적이 없건만, 우리가 그 소유물들을 사용하는 빈도는 점점 더 줄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간을 머무는 집만 해도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운동기구와 한 번도 식사한 적이 없는 정찬 식탁, 한 번도 요리한 적이 없는 삼단 오븐도 있다. 우리에게 그 물건들은 장난감이다. 그것들을 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감에 대한 위안이자, 그것들을 손에 넣고자 하는 우리를 유아로 퇴행시키는 장난감.
맥도날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장난감 유통업체가 되었고, 그 장남감들 거의 대부분은 영화와 관련된 브랜드 상품들이다.
소유물들의 규모가 이보다 더 거대했던 적도 없었다. 그 규모는 서구 문화권 대부분을 덮친 비만이라는 유행병에 맞먹을 만큼 팽창해 있다.
우리는 조작된 욕망이라는 현상에 대한, 우리를 집어삼킬 듯 위협하는 제품들의 산사태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에 휩쓸리기 일보 직적까지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무절제한 항공 여행’을 계속할 경우 직면하게 될 파국에 대한 밀레니엄적 불안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럴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중세 교회마저 손을 뗀 면죄부 판매 관행이 탄소배출량 상쇄용 지불금이라는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6개월마다 휴대전화를 새것으로 바꾸는 행태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존 버거. 그는 ‘실제적인’ 물건들과, 자신이 보기에 우리에게 그 물건들을 소비하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기 위한 자본주의의 조작을 구별했다.
“홍보와 그것이 광고하는 물건들로 누리게 될 기쁨이나 혜택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중요하다. 홍보는 기쁨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자극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실제적인 기쁨의 대상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홍보는 이 ‘자본주의’ 문화의 생명(홍보 없이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에서)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의 꿈이다. -존 버거, 『바라보기의 방식』(1972)
『바라보기의 방식』을 오늘날에 쓴다면 버거가 ‘홍보’라고 부른 것은 ‘디자인’이란 말로 바꿔 써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물질주의 문화는 우리의 원시적 욕망들을 억압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껏 받아주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우리와 소유물의 관계는 결코 간단명료하지 않다. 그것은 영악함과 순진함의 복잡한 혼합이다. 물건들은 결코 버거가 암시하는 만큼 순진하지 않은데, 바로 그런 점이 물건들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_그것은 인간이 만든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다
애플맥북컴퓨터…뒤집어보면 리튬 배터리에 전력이 정확히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려주는 노란연두색 불빛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실용성이라는 알리바이로 무장한 또 하나의 호들갑스러운 장식일 뿐이었지만, 소유욕의 혈맥을 정곡으로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만 해도 너무나 많은 걸 약속해주는 것 같았던 물건을 그렇게 빨리 내다버릴 수 있다는 것은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낭비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1930년대에 미국의 마케팅 선구자들이 꿈꾸던 바였다. 그들은 소비를 통해 경제공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세상 사람들을 단호하게 설득했다. 광고의 선구자 어니스트 엘모 컬킨스는 ‘소비자 공학’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색이 아닌 색인 검정은, 멋이 아니라 정밀함으로 소비자에게 호소하는 과학적 도구들에 사용된다. 아무 색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짝이 장식으로 현혹시키기 않을 만큼 미래의 구매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여 존중하겠다는 의미다. 사실 가장 효과적인 유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검은색도 공허한 기호, 실제가 결여된 신호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소유물들에 시간의 흐름이 반영된다는 것은 조금도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 곁에 머문 소유물들은 지나온 시간에 얽힌 우리의 경험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가 새로운 소유물과 맺는 관계는 무척이나 공허하다. 제품들의 매력은 물리적 접촉 후에는 남아나지 못할 외양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판매된다. 유혹의 꽃이 시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에 대한 열정은 거의 구매가 완료됨과 동시에 사그라지고 만다. 욕망한 그 물건이 헌것이 되기 훨씬 전에 희미하게 지워진다.
제품 디자인은 이제 일종의 성형수술 같은 것, 잠시 동안 미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이마의 주름살을 감춰주는 보톡스 주사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해가 가고 또 가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쓸모없는 물건일지언정 그것을 버리는 일은 어떤 면으로든 삶의 한 부분을 버리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제품들의 범주가 단순히 변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마치 공룡의 멸종기처럼 산업시대의 풍경을 누비고 다니던 동물들이 전멸해버리는 시기를 살아왔다. 그리고 그 멸종 이후로는 진화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우리는 물건들은 수단으로 우리 삶의 경과를 측정한다. 물건들을 사용해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존재가 아닌지 표현한다. 때로는 보석류가 이 역할을 맡고, 때로는 집 안에서 사용하는 가구나 지니고 다니는 개인 소지품, 또는 입는 옷이 이런 역할을 한다.
디자인 언어를 이해하려면 디자이너가 전문 직업인으로서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18세기 말엽의 산업시스템 발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디자인이 하나의 독립적인 활동으로 등장한 뒤로, 디자이너들은 19세기 잉글랜드의 윌리엄 모리스처럼 자기 시대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출발한 사회개혁가이자 이상주의자들로 자신을 보던 단계에서, 20세기 미국의 레이먼드 로위를 필두로 하는 카리스마 있고 허풍스러운 세일즈맨으로 급격하게 탈바꿈해갔다. 모리스는 기계시대를 혐오했고 수공예의 전통을 되살리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로위는 언젠가 판매 곡선을 최적화하겠다고 공언했다.
모리스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직물과 벽의 아름다운 무늬들을 디자인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레이먼드 로위가 원했던 것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포장지릐 색깔을 바꿈으로써 그 담배가 더 많이 팔이도록 돕는 일뿐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부류의 디자인 사이 어디쯤에 ‘디자인은 공적인 서비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있지만 대개는 서랍 속이나 먼지 않은 찬장에서 망각된 채 처박혀 있는 온갖 쓸데없는 물건들의 전염병을 촉발한 주범이 바로 카페 코스테스였다.
어쩌면 스타르크는 자신이 디자인한 물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꿈과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욕망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스타르크가 지닌 비결은 딱 하나인데, 그게 좀 괜찮다. 그 비결이란 바로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디자인을 바라보는 또 한 가지 관점은 스타르크가 대표하는 관점과는 상극을 이룬다. 그것은 디자인이 일종의 내적인 진실과 의미를 추구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최근에 이 관점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디터 람스Dieter Rams다…람스는 시각적인 과잉을 피함으로써 유행을 무색하게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극복할 수 있는 완벽한 물건을 디자인하는 일에 어마어마한 노력과 끈기를 쏟았다. 그가 꿈꾸었던 물건은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시간을 초월하고, 그럼으로써 까다로움보다는 지적인 엄격함을 반영하는 것이다.(less is more)
디자인이 언어라는 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들려줄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있는 사람만이 그 언어를 유창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독일어가 대문자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다면 파시즘의 출현 앞에서 그렇게 허술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그래픽 디자이너 오틀 아이허의 믿음을 생각해보자(타이포그라피)
20세기의 역사를 돌아볼 때,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1908년에 출시되어 20년 동안 생산된 포드의 ‘모델 T’가 나온 일이었다고 말해도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1989년 도쿄 모터쇼에서 처음 소개된 2만대 한정 생산된 닛산의 피가로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피가로는 우리가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디자인은 한 사회가 그 목적과 가치를 반영하는 물건들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다. 조작적이고 냉소적인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고 창조적이고 목적에 맞게 쓰일 수도 있다.
#원형Archetypes_공책을 사용하는 데는 사용 안내서가 필요 없다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조명 스탠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생산된다
디자이너들이 작업용 스탠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원형을 수정할 기회이자 더불어 가능하면 새로운 원형을 창조할 기회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앵글포이즈(스탠드조명)는 거의 구상되자마자 단지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가 되어버린 물건의 첫 사례로 자리 잡았는데, 그로부터 25년 뒤 미니도 그랬다.
미니는 편안함과 성능에서 두 차 모두 가뿐히 뛰어넘었다.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이시고니스의 발상은 엔진을 좌석과 직각이 아니라 평행이 되게 놓음으로써 차체 전체의 길이를 몇 인치 줄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니로 자동차의 새로운 범주를 발명해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자동차 제작자들은 각자 나름의 변화를 가미했지만 그 기본적인 주제는 도저히 비켜갈 수 없었다.
어떤 제품에 방대한 사용 설명서가 따라온다면 그 물건은 결코 원형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해도 좋다.
기술적으로 보면 앨글포이즈의 핵심은 스프링이다
지폐는 깊은 공명력을 지닌 또 하나의 원형이다. 기본적인 형식은 그보다 더 단순할 수가 없다. 인쇄된 직사각형 종이에 위조를 어렵게 하는 장치로 비침 무늬와 금속 띠를 엮어 넣는다.
#호사Luxury_베토벤의 교향곡은 실크와 벨벳과 레이스를 두르고 돌아다닌 사람이라면 결코 쓰지 못할 작품이다
#패션_패션이라는 괴물은 미술과 건축에 그 발톱을 꽂은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디자인 전체를 한모금 깊이 들이켜 꿀꺽 삼켜버렸다
패션이 공예에서 산업으로 변신하면서 생겨난 결과들은 지금도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다. 패션은 다른 형식의 시각 문화들을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술과 디자인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변모시키고 있다. 패션은 유명인들에 이끌려가는 우리 사회를 더욱 몰아가며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가 고갈되어간다는 거듭되는 신호들을 드러내고 있고, 그러면서도 자체의 매력을 잃어가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현재 패션 산업은 거의 대부분의 다른 산업들의 본이 되고 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이나 컴퓨터를 만드는 일에서도 패션과 동일한 여러 특징들이 눈에 띈다. 이런 과정들에 속도가 줄고 있다는 신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패션은 노후화 기제를 자체에 내장하고 있는 가장 발달된 형식이며, 문화적 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다.
#예술_예술이 언어를 창조하면 디자인은 그 언어에 반응한다
페라니는 폭스바겐보다 훨씬 많은 주목을 받지만 도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실용적이지 않다. 그리고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예술은 쓸모가 없고 디자인은 쓸모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문화에서 피카소가 르코르뷔지에보다 훨씬 더 중심적인 인물인 것이며, 레르니카가 만약 팔리게 된다면 그 값은 르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바디타숑(집합주택)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어떤 디자인은 다른 디자인에 비해 유용성이 더 떨어지는데, 바로 그런 디자인들이 다른 디자인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누린다…유용성은 지위와 반비례한다.(지위는 희소성과 비례한다)
우리는 소유물과 우리의 관계가 급진적인 변화를 격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디자인은 처음 별개의 직업으로 등장한 이후 줄곧 욕망을 조장하는 데 쓰였다.
그 요점은 제작에서 형태를 만드는 일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크 뉴슨이나 론 아라드의 작품들이 미술 갤러리에 등장하면서 일종의 위반 방지선을 이미 넘어선 셈이다.
#나는 여전히 디자인에 매혹된다
아이슬란드의 새로운 온라인 금융서비스 회사의 정체성 창조하는 작업. 아이스세이브Icesave라는 기발한 이름? 불안한 고객들의 의구심은 피터스의 신선한 타이포그래피로 깨끗이 사라졌다!
가장 흥미로운 일은 물건들의 모양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디지털 세상에 존재하는 디자인의 비물질적인 다양성을 다루는 일에서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아이스세이브의 이야기가 보여주었듯이 화면은 계산적이고 조작적인 목적에도 사용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디자인의 과정에, 그리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디자인이 열어주는 창에 매혹된다. 그러나 디자인은 우리가 음식과 술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것과 똑같은 어려움에, 그러니까 과도한 탐닉과 극단적인 자제 사이를 오가는 일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우리는 새로운 소유물과 새로운 구매, 새로운 것의 매혹이 주는 순간적인 활홀경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상태로 늘 유혹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에서 이 항목을 퍼감.
좋은 글입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